일곱 번째 편지: 전개 2 – 예수는 부활했다 (1/4)

전개 둘, 예수는 부활했다.

자, 이제 기적이 인간사에서 배제될 수 없음을 보였어. 기적이란 초자연적인 원인에 의해 야기된 사건이며, 바로 신의 행동이 원인이 되는 사건이야. 과학의 진보가 기적을 더 못 믿게 만들었다는 것은 착각에 불과해. 신의 존재와 같이 기적의 존재 역시 과학이 증명하거나 반증할 수 있는 무엇이 절대 아니야. 그렇다면 기적이 정말 일어났는지 여부는 무엇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 이것은 역사의 개연성을 따져볼 수 밖에 없어. 역사가 남긴 갖가지 기록으로 미루어 판단하는 것이지. 즉, A라는 사건이 C라는 사건으로 전개되었을 때 전개의 원인이 될 수 있는 수많은 중간 사건 가운데 하나인 B가 가장 개연성이 높다면, 학자들은 A→B→C 로 역사를 정리할 수 있겠지. 우리가 하나 염두에 둘 것은 B가 기적일 수도 있다는 것이야. 기적을 배제하지 않고 역사적 탐구를 해보자는 것이지.

난 이번 편지부터 비로소 기독교의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해. 기독교의 하나님이 바로 지금까지 우리가 논의해 온 신, 그 자존적이고 초자연적인 존재라는 것을 논증하려고 해. 이 논증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이뤄질 수 있어.

첫째는, 기독교에서 과연 참진리를 이야기하고 있는지를 따져보는거야. 기독교의 하나님이 진정 선한 신이라면 기독교의 교리는 참된 것이어야만 해. 인간의 부덕함과 한계로 인하여 조금 굽어지고 잘못 이해되었을지라도 그 중심은 빛을 발하는 진리이어야 할거야. 참진리. 우리 이성이 맞닥뜨렸을 때, 마치 지금까지의 모든 것을 설명해주는 듯한 이야기이어야 할거야. 우리를 꼭 안아주는 따뜻하고도 공정한 법칙이어야 할거야. 마치 오랜 갈증을 해소해 주는 샘물 같은 것일거야. 그 빛을 기독교 교리가 발산해야만 해. 그렇지 않다면, 기독교의 하나님은 우리가 찾는 신이 아닐 거야. 예수가 한 이야기들을 따져 보자구. 그가 헛소리를 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

둘째는 신과 인간이 어우러진 역사를 탐구해보고, 과연 그 역사가 우리가 찾는 신을 가리키는 지를 따져보는거야. 역사적 탐구를 하는 거지. 마침 기독교는 하나님이 인간 앞에 여러번 나타나 기적을 베풀었을 뿐 아니라 본인 스스로 사람으로 태어나 우리와 함께 30여년 넘게 살았다고 주장하므로 그 주장의 진위를 역사적으로 파악해보기 용이해. 그러나 한계가 있어. 지나버린 과거를 다시 눈으로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진위 여부를 확증하기가 어려워. 역사적 사실에 대한 해석에 따라 참이 될 수도 있고, 거짓이 될 수도 있는 것이지. 설령 결론이 ‘참’으로 도출된다 하더라도 우리가 아는 것은 ‘참에 제일 가까워 보인다’ 수준에 불과해. 그래서 어쩌면 믿음의 영역이라고 공격받을 수도 있지만, 범죄수사를 비롯한 사실 여부 판단은 모두 이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해. 범죄수사의 경우 제한된 사실을 가지고 이성을 최대한 활용하여 피고의 유죄 여부를 가려내잖아? 그러므로 최대한 이성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부분까지 논의해보자. 신이 우리에게 부여한 이성의 능력을 최대한 활용해 보자구.

먼저 두 번째 방법을 살펴보자. 첫 번째 방법이 더 엄밀한 방법 같아보이는 데도 생각보다는 그리 좋은 방법이 아니야. 왜냐하면 우리는 아직 참과 거짓을 가리는 도덕적 기원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지 모르기 때문이야. 어떤 것이 진정한 도덕인지 우리는 아직 모르지. 더군다나 진리는 날카로운 칼날과 같이 명확하고도 분명한 실재이거늘 우리는 추상적으로 대하는 경향이 있어. 그런 습관에 강하게 물든 탓에 ‘옳음과 그름’을 따져야 하는 종교적 진리 앞에서 우리는 ‘좋고 싫음’과 ‘같음과 다름’을 따지는 경향이 있어. 진리에 ‘순복’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호불호를 앞세워 ‘선택’한다구. 허접한 종교라면 이 첫 번째 논증으로 진위 여부가 갈리겠지만 고등 종교 사이에서는 어림도 없어. 요컨대 어느 도덕이 우월하다는 주장은 아직 논증도 불가능할 뿐더러 상대에게 오만하다는 인상을 주는 부작용까지 야기하지.

두 번째 방법은 이런 면에서 첫 번째 방법보다 나아. 용의자를 찾아서 범인인지 아닌지만 가려내면 되는 작업이거든. 과연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기적들이 진짜인지 아닌지 따져보자. 기독교는 기적이 없었음이 밝혀지는 순간 진짜 무너져내리니깐.

기독교의 핵심 역사는 바로 예수야. 그의 삶으로 말미암아 기독교는 탄생했고, 그의 부활에 기독교는 뿌리를 두고 있지. 그렇다면 우리는 그의 삶의 역사성에 대해 물음을 던져보기로 하자. 예수는 과연 실존한 인물인지, 그를 가리키는 역사적 자료는 고고학적으로 충분한지, 그 자료들은 신뢰할 만한지, 역사적 예수는 과연 기독교가 말하는 그 예수인지 등부터 따져보기로 하자.

참, 난 이 편지에서 학자들이 다룬 방대한 ‘역사적 예수’를 그려내지는 않을거야. 그럴 능력도 없구. 그러나 신학자들이 그려내는 핵심적인 부분을 요약하고 참고 문헌을 표기함으로서 더 깊은 토론을 위한 예비적 작업을 할거야. 따라서 부족한 부분이 많더라도 양해해 주길 바래.

1. 예수는 실존인물인가?

역사학자들은 예수는 기원전 2~7년 사이에 출생하여 기원후 26~36년 사이에 사망했다고 추정해(1). 예수의 자세한 삶의 면모는 대부분 복음서에서 알게 된 것이야. 예수의 집안과 그의 출생, 생애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세한 면모들이 신약성서, 그것도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서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어. 마태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는 유대인인 아버지 요셉과 어머니 마리아 슬하에서 태어나되, 성령으로 잉태되었다고 적혀 있어. 유다 지방 베들레헴의 어느 마구간에서 태어난 뒤, 나사렛이란 동네로 이사했지. 그런데 열두 살이 되었을 때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학자들과 대화를 나누며 영특함을 보였다는 것 외에는 딱히 예수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은 없어. 누가가 마리아 혹은 주변사람들을 인터뷰하여 적은 듯한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는 것이 예수의 어린 시절 묘사의 전부지. 그렇게 성장했던 예수는 나이 서른 즈음이 되어서야 기록의 전면에 등장해. 복음서에서는 이때부터의 예수의 삶에 대부분의 지면을 할애해. 남녀평등, 아이존중, 겸손의 미덕 등 당시 지나치리만치 혁신적이었던 그의 가르침을 비롯하여,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다 정치범으로 체포되어 십자가형으로 죽은 뒤 부활해서 승천한 이야기까지 적었지.

예수에 대한 다른 기록들은 어떨까? 비기독교적인 걸루 말이야. 성경만큼 자세하고 풍부한 기록이 있지는 않지만, 예수에 대한 역사적 기록 역시 적지 않아. 대표적인 것이 역사가 타키투스가 110년 경에 쓴 «연대기»라는 책이 있는데, 15권 44장 2절에서 그리스도의 처형에 관해 이렇게 적혀 있어.

64년 7월 19일 네로 황제가 로마 시내에 화재가 나자 ‘그리스도인’들을 방화범으로 지목하고 박해하였다. ‘그리스도인'(라틴어: Chrestiani)이란 명칭은 티베리우스 황제의 치세 때 폰티우스 필라투스(본디오 빌라도) 행정관에 의해 처형된 그리스도에게서 비롯되었으며, ‘이 사악한 미신’은 계속 번져나가고 있다

또한 1세기에 살았던 요세푸스(Flavius Josephus)라는 유대인 역사가는 93년경 완성한 그의 야심작 «고대사(The Antiquities)»에서 예수는 그리스도라 불렸다고,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이들이 고소를 당했음을 적었어.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산헤드린 공회를 소집한 후에 당시 그리스도라고 불린 예수의 형제인 야고보와 어떤 사람들을 그들 앞에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율법을 어겼다고 고소를 하고 돌로 쳐죽이도록 그들을 넘겨주었습니다(2).

그는 예수의 일생에 관한 훨씬 자세한 책 «플라비우스의 증언»이란 책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지. 참고로, 이 글은 세 부분이 후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가필되었다고 학자들은 생각해. ‘만약 그를 사람이라고 불러야만 한다면’, ‘그는 그리스도였다’, ‘죽은 지 사흘 째 되는 날에 부활해서 나타났다’ 라는 부분이지. 기독교에 적대적인 요세푸스가 그렇게 적었을 리 없거든.

이 무렵에 예수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만약 그를 사람이라고 불러야만 한다면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놀랄 만한 기적을 행했고 진리를 기꺼이 받아들인 사람들의 선생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많은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 그는 그리스도였다. 빌라도가 우리 중에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를 고소하는 말을 듣고 난 후 즉시 십자가에 처형하라는 선고를 내렸을 때 처음부터 그를 사랑한 사람들은 끝까지 애정을 버리지 않았다. 죽은 지 사흘째 되는 날에 부활해서 나타났는데, 이는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이미 이러한 무수히 많은 놀랄 만한 일들을 예언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이름을 따라 소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무리들은 오늘날까지 사라지지 않고 있다(3).

이외에도 «탈무드»의 ‹산헤드린›에는 이런 기록이 남아있어. 탈무드는 A. D. 500년 경 완성된 유대인의 저작으로 유대교의 구전 율법인 미슈나(Mishna)를 포함하는 책이야.

예수는 마술을 써서 이스라엘을 미혹시켜 배교하게 하였으므로 유월절 전날에 처형되었다(1).

이외에도 터키 북서방 지역을 다스리던 로마 총독 플리니(Pliny the Younger)는 그가 친구인 트라얀 황제와 주고 받은 편지에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자세한 언급을 하고 있지.

본디 종교적 운동이 널리 퍼지기 전까지는 종교 창시자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아. 특히나 로마제국과 지도급 유대인들에게 박해와 무시를 받은 기독교의 경우엔 기록이 충분하기 더욱 어렵지. 더군다나 예수의 운동은 역사가들의 관심을 끌만큼 정치적이지도 않았어. 그러나 그런 경향에도 불구하고 예수에 대한 기록은 무척 많은 편이야.

성경을 비롯한 기독교적 기록을 완전히 빼고 예수를 역사적으로 구성해볼까? 예수의 추종자들이 편견을 갖고 적었거나 심지어 왜곡시켰을 수도 있는 기록들은 모두 제외하고 말이야. 고대역사학자인 에드윈 야마우치 교수는 비기독교적인 역사기록에만 의거해서 예수란 인물에 대해 다음을 확증지을 수 있다고 주장해(4).

  1. 예수는 유대인 선생이었다.
  2. 당시의 많은 사람들은 그가 치유를 행하고 귀신을 쫓아내는 일을 했다고 믿었다.
  3. 어떤 사람들은 그가 메시아라고 믿었다.
  4. 그는 유대인 지도자들에 의해 배척을 받았다.
  5. 디베랴 지방에서 본디오 빌라도의 통치하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을 당했다.
  6. 이 수치스러운 죽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여전히 살아 있다고 믿은 추종자들은 팔레스타인 지방을 넘어 빠른 속도로 확산되어 A. D. 64년경엔 로마에서도 많은 군중들이 그의 제자가 되었다.
  7. 도시와 시골의 모든 부류의 사람들, 남자와 여자, 노예와 자유인들 모두가 그를 하나님으로 경배했다.

수많은 역사적 기록들과 전승들이 웅변해주듯 예수라는 인물의 역사적 존재 여부에 대해서는 역사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없어. 다만, 그에 대한 기록들이 왜곡되었다던지 의도적으로 수정되었다던지에 대한 이견들이 있을 뿐이야. 그렇다면 예수에 대한 기록들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 것인지 하나하나 따져보도록 하자. 예수를 직접 보고 그를 경험한 목격자들의 증언, 즉 성경의 신뢰성부터 살펴보자.

(1) 위키피디아 http://ko.wikipedia.org/wiki/예수

(2) 예수는 역사다, 리 스트로벨 지음, 100쪽

(3) 예수는 역사다, 리 스트로벨 지음, 101쪽

(4) 예수는 역사다, 리 스트로벨 지음, 1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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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번째 편지: 전개 1 – 기적은 일어난다

전개 하나, 기적은 일어난다.

지난 번 편지에서 우리의 성품을 거슬러 따라 올라갈 때 만나는 선한 신에 대한 이야기를 했어. 우리로 하여금 누미노제의 경외감과 선악의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신. 두렵고, 정의로운 신 말이야. 그 신은 아름답고, 기쁘고, 좋은 분일 거라는 이야기도 했어. 왜냐하면 우리가 그런 신을 바라기 때문이야. 우리 인간의 성품 스스로가 나침반이 되어 우리가 기대하는 무엇을 가리키고 있지. 만일 우리가 적자생존의 진화를 거쳐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존재들이라면, 슬프다던지, 아름다운 것과 정의로운 것을 추구한다던지 하는 도통 생존에 도움되지 않는 감정과 성품들을 잔뜩 갖고 태어났을 이유가 없어. 게다가 대부분의 시간 동안 그런 성품이 갈구하는 행복한 열매들을 움켜쥐지 못하는 결핍된 인생으로 점철되었을리도 없고 말이야.

난 그 선한 신이 자연에 일으키는 불협화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 기적 말이야. 어딘가 모르게 우리 삶을 더 생동감있게, 그러나 두렵게도 만드는 기적. 기적이 가능하다는 것은 곧 초자연을 배제하지 않는 역사적 탐구가 가능하다는 말이야. 이것은 기독교에서는 필수적인 전제야. 기독교가 성장한 역사 뒤에는 수많은 기적들이 뒤섞여 있거든. 아니, 기독교는 기적의 종교야. 기적이 불가능하다고 미리 단정해버리면, 예수의 부활을 증거한 신약성경은 모두 거짓말이 되어버리지.

이 편지에서 신이 왜 기적을 일으키는가에 대한 물음에는 답을 하지 않을거야. (ㄱ) 다만 기적이 자연현상과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 다시 말해, 귀납적으로 증명된 자연법칙이 틀렸다는 것을 보여주는 반례가 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기적이 또한 신의 본질이나 성품을 위배하는 무엇이 아니라는 것에 대한 논증을 하고 싶어.

자, 난 지금까지의 편지글에서 자연이 이성이라는 영역을 통해 초자연적인 무엇으로부터 침범당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어. 그래서 우리 인간이 갖는 두뇌는 두뇌 이상의 무엇이 될 수 있다고 했지. 그런데 말야. 초자연적인 존재, 즉 신이 굳이 이성을 통하지 않고 자연을 직접 건드릴 수는 없을까? 신이 자연의 특정한 시공간을 살짝 꼬집어 비틀 수는 없는 것일까? 그 경우, 자연은 움츠려진 용수철마냥 다시 튀어늘어나며 그 변화에 적응하며 자연스럽게 회복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신은 잔잔한 호수의 수면 위로 조약돌을 던질 수는 없는 것일까? 한번 우리가 호수에 던진 조약돌을 상상해보자. 호수의 바깥에서 날아온 그 조약돌의 운동량과 부력에 의해 호수는 물결을 일으키며 파르르 떨지만, 이내 잠잠해지지. 만일 조약돌을 만들어 내어 호수 위에 던진 것이 신이라고 생각해보자. 그렇다면 호수를 지배하는 자연법칙은 신의 간섭에 놀랍도록 금세 적응하여 원인에 따른 결과를 만들어내지. 만일 시간이 정지했다고 치자. 그래서 파르르 떨고 있는 물결이 잠시 멈추었다고 상상해보자구. 자연법칙이 깨졌을까? 아니, 그렇지 않아. 자연법칙 역시 시간의 멈춤과 함께 작용이 멈추었을 뿐이야. 엔트로피의 불가역적 방향으로 흐르는 시간. 시간이 멈추고, 물체의 움직임도 멈추고 자연법칙도 멈추었어. 다시 시간이 흐르자 물결이 출렁이고 자연법칙도 작용해. 물결 모양도 자연스럽고 자연법칙에 어긋난 건 아무것도 없게 되었어. 시간이 정지하는 동안은 자연법칙도 정지하고, 시간이 흐르며 자연법칙도 다시 작용하지. 시공간의 얼어버림에 자연 역시 얼어버리며, 족쇄가 풀리는 즉시 자연은 놀랍게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우주에서 운석이 날아와 지구에 떨어졌어. 지금은 누구도 이것을 기적이라 하지 않아. 신의 강림 따위로 생각하지 않는다구. 외부에서 날아온 운석의 간섭에 지구는 놀랍도록 자연스럽게 적응해. 운석이 주는 충격을 운동량의 법칙에 따라 땅이 흡수하지. 자연법칙은 바뀐 게 없어. 지구계 내에서 에너지-질량 보존의 법칙에 어긋났다구? 아니야, 우주 전체로 보면 질량보존의 법칙은 성립했어. 그렇다면 여기서 초자연주의를 기억해보자. 이미 우리는 자연이 실재의 전부라고 믿는 자연주의의 난점을 파헤쳤잖아. 그래서 자연 외의 또다른 자연, 아니 초자연마저 존재할 수 있다는 풍성한 초자연주의 철학을 견지하기로 했잖아. 그렇기 때문에 초자연적인 무엇이 우리의 시공간과 접해서 정자 하나를 어느 이스라엘 여인의 자궁 속에 하나 삽입한 것이 어찌 자연법칙을 어기는 일일까? 자연은 그 정자를 받아들여서 예수라 이름 지어진 아기를 우리 인류에게 선사해 주었지. 자연은 그 스스로의 규칙에 어긋나지 않도록 수정란을 가꾸고, 태를 열어 한 아기의 출산까지 인도해 주었지. 기적은 이렇게 가능할 수 있어.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이란 반복적인 자연법칙에 반하는 것이 아니냐구? 기적의 정의를 다시 한번 살펴보자. 기적은 특성상 하나의 예외적 사건이야. 우리가 기적을 말할 때는, 다시 반복될 수 있는 무엇을 말하는 게 아니라구. 다시 반복될 수 없는 일시적인 일이기 때문에 기적이라고 부르는 것이야. 자연 법칙에 대한 예외적 사건이 아니라면 우리가 어떻게 기적을 놀라운 사건이라고 부를 수 있겠어? 자연법칙은 반복적인 경험으로 증명된 모델이야. 반복적인 경험이 갖춰져야지만 과학은 성립한다구. 만일 모든 조건이 똑같은데 반복적으로 이루어지기만 했던 경험 외의 무엇이 일어났다면, 그 과학은 깨지게 되지. 이것이 과학의 취약점이야. 수천년간 똑같이 수행되어 왔던 것이 당장 내일 단 한번이라도 똑같이 수행되지 않는다면, 그 법칙은 무로 돌아가게 되지. 그런데 기적은 그 과학을 굳이 깨지도 않아. 아예 초자연적인 무엇에서 개입하기 때문에, 같은 조건의 경험이 아니게 되지. 단지, 이전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경험일 뿐. 예외적인 것. 그리고 흔하지 않은 것. 그래서 신기한 것. 그것이 기적이야.

요컨대 기적은 역시 신의 존재와 같은 초자연적 현상이야. 자연법칙을 깨뜨리거나 하는 것이 아닌 자연법칙 이외의 영역이야. 우리 과학자들이 수차례 같은 조건에서 실험과 이성적 추론을 통해 만든 것이 자연법칙이라면, 기적은 다른 조건에서 만들어진 실험결과라 할 수 있지. 초자연이 끼어드는 바람에 전혀 다른 실험 조건이 되어버렸다구. 기적은 자연법칙과 양립 가능해. 신이 존재한다면, 자연은 결코 기적에서 안전한 곳이 될 수 없어.

그렇다면 신은 왜 굳이 자연에 기적을 일으키려 하는걸까? 대위법으로 완성된 아름다운 화음같은 자연에 왜 굳이 불협화음을 일으키려 하는지… 글쎄, 신은 대위법 그 이상의 자연을 원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창의와 조화가 잘 버무려진, 완성될 때까지 끊임없는 진화와 발전을 거듭하는 그런 자연 말이야. 우리에게 불협화음을 허락했듯이 신 또한 그를 사용해서 다양한 색채를 자연에 입히고 있는 거라고 말이야. 그의 천부적인 재능으로 불협화음을 일반화음 사이사이에 섞어넣는 거라고 말이야. 시구에 변칙적인 운율을 섞어넣듯이 말이야.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신이 자기 마음대로 자연에 간섭한다는 뜻은 아니야. 절대선인 그는 태초에 계획해 놓은 악보대로 자신이 원하는 그 목적에 맞추어 최고의 음악을 연주하는 중일거야. 철저히 계획해 놓은 그대로 말이지. 역사의 중요한 시점에 다양한 기법으로 자신의 창조를 아름답게 이루어 가면서 말이야.

ㄱ. 이 대목이 궁금하다면, Lewis의 ‘기적’이라는 책의 12장 이후를 읽어봐. 인간의 복합체적 성질, 하강과 재상승 유형, 선택, 대리 등의 모델을 사용해 신이 기적을 활용하는 저자 나름의 이유를 적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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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편지: 기독교가 전제하는 것들 4 – 신은 선하다

전제 네 번째, 신은 선하다(God is good).

이전 편지에서 우리의 이성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신의 존재를 발견할 수 있음을 역설했어. 자연주의자들이 ‘이성은 자연발생적이다’라고 주장하는 것들을 하나하나 반박하면서 말이야. 그러면서 공리에 대한 이야기를 했지. 어디서 온 건지 모른채 우리가 ‘그냥’ 아는 명제들을 말이야. 어떤 독자적이고 근원적인 존재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면, 그의 유래를 도무지 설명할 길이 없는 그 공리들. 그 공리들로부터 신의 성품을 유도해 낼 수 있을거야. 그뿐이야?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이성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을거야. 왜냐하면 공리가 신이 추구하는 원리라면, 그가 우리에게 부여한 이성 추론의 방식 역시 그의 방식일 것이야. 게다가 신 역시 그 이성적 추론 방식에 의해 선악을 구별하게끔 했다고 가정하는 것이 마땅하지. 신의 선함은 우리의 선함과 결국 크게 다르지 않을거거든. 그렇지 않다면, 기독교의 신이 우리의 도덕적 판단에 호소하며 이렇게 일갈하셨을리가 없지.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치 아니하느냐? (누가복음 12장 57절)

그런데 아쉽게도 난점이 있어. 공리들은 대부분 수학적 공리들이고, 선악과 관련된 정리들을 그 공리들로부터 끌어내려면 매우 힘들어. 가정도 많이 필요해. 이 가정들은 또한 철학자들이 자기 입맛대로 고르기 나름이고 말이야. 그럼 선택의 여지가 많은 만큼 너와 내가 동의하기 힘들 가능성도 커져. 논쟁의 여지가 너무 많아진다구. 게다가 우리는 선악을 아는 것이 근본적으로 이성에서 비롯될 수 있는 것인지 잘 몰라. 선악의 구분이 우리가 ‘그냥’ 아는 공리 중의 하나일지도 모른다구. 따라서 나는 공리들을 역추적해보려고 해. 우리의 성품을 살피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도덕률들을 활용해서 말이야.

그럼 우리 인간의 독특한 성품들 먼저 살펴보자. 인간은 감각(sensation)도 꽤 발달한 동시에, 그 감각의 정도를 판단하는 감정(feeling)도 매우 예민해. 뜨거운 온천역을 즐기는 사람을 생각해볼까? 김이 무럭무럭 피어나는 온천물에 발을 집어넣으며 그 사람은 물의 온도가 적당한지 파악하지. ‘차갑다-시원하다-미지근하다-따뜻하다-뜨겁다’의 범위 중 따뜻하다는 감정의 판단을 내리게 된 그는 이내 몸 전체를 온천 속에 담그지(아, 따뜻해). 따뜻하다는 감정은 이성과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얼마간 지속이 돼(아, 좋다). 주변의 풍광도 너무 보기 좋아서 감탄사를 연발해(아름답도다!). 그러다가도 너무 오래 있으면 안 되겠다는 도덕적 판단을 감행(이만 나가야겠다), 결국 탕 속에서 나오게 되지.

사람의 정신활동을 관찰하면, 어딘가 물질에서 비롯하여 자연선택으로 진화만 한 동물이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도약(upgrade) 내지는 향상된 듯한 특성이 있어. 대체 사람은 아름답다는 감정을 어떻게 가진 걸까? 그게 순전히 이 사람의 생존과 건강에 좋기 때문일까? 아름다움을 느낀다는 것은 추함을 알기 때문인데, 추하다는 감정은 어디서 배운걸까? 좋다는 감정, 기쁘다라는 감정은 어디서 계발된 것일까? 혹시 어디선가 큰 만족을 경험하다가 만족으로부터 벗어나게 된 것은 아닐까? 아름다움 속에서만 지내다가 그것을 뛰쳐나와 추함을 경험해보게 된 것은 아닐까? 냉엄한 자연선택의 법칙이 존재하는 진화의 역사 속에서는 아름다움을 즐길 틈이 없었을 텐데 말이야. ‘좋다, 나쁘다, 기쁘다, 슬프다’가 따로 없었을 수도 있는데 말이야. 먹으면 먹는대로 만족하고, 못 먹으면 못 먹는대로 새로운 먹을 거리를 찾아다녔을 게 동물인데 말이지. 기쁨과 슬픔, 좋음과 나쁨에는 무감각해져도 사는 데는 문제 없었을 텐데 말이지. 게다가 슬퍼버리면 먹이를 찾으러 나갈 힘도 잃어버리잖아? 우리는 왜 이렇게 슬픔이라는 감정이 발달한 거지?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행복이라는 감정은 왜 이렇게 느끼는 순간이 짧은거야? 인간의 역사를 보자니 온통 전쟁과 범죄와 재해와 질병의 연속이고, 그 사이사이에 끼어드는 행복이라는 감정도 찾아오기가 바쁘게 무섭게 사라지니 말이야. 행복을 가진 순간, 그것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마음을 채우고, 행복을 잃은 순간 과거의 추억을 그리워하는 수준의 감정으로 치환되어 버리니 말이야.

우리는 아직 감각과 감정, 이성의 작용도 과학적으로 밝혀내지 못했으니, 논쟁이 심화될 수 있는 이 이야기는 그만하자. 과학적으로 감정과 이성의 정의가 보다 명확히 밝혀질 때까지 미뤄두자구. 다만, 인간이 여느 다른 동물과 다르게 어딘가 삶의 결핍된 점을 많이 느끼는 동물이라는 것만 기억해 두자. 그럼 이번에는 인간의 감정 중 좀 특이한 ‘누미노제(Numinose)’란 것을 살펴보자. 지금부터는 C.S. Lewis의 ‘고통의 문제’에 나온 이야기야. 그의 논증 전개가 무척 훌륭하기 때문에, 잘 요약해볼게.

그에 따르면 모든 고등종교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대. 그리고 기독교에는 성육신이라는 역사적 사건 하나가 첨가되구.

  1. 누미노제(Numinose)의 경험
  2. 도덕의 경험
  3.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신령한 힘(Numinous Power)과 의무감을 불러 일으키는 도덕의 수호자의 동일시
  4. 성육신이라는 역사적 사건

누미노제라는 것은 으스스한 감정을 말해. 죽음이나 유령 따위에 대한 공포감을 뜻하지. 방구석에 호랑이가 앉아 있다고 하면 우리는 위험을 직감하고 두려움을 느끼지만, 방구석에 유령이 서 있다고 할 경우 우리는 묘한 공포심을 느껴. 단 한번도 유령에 의해 피해를 입어본 적이 없고, 피해가 있을 것이라 그닥 믿지도 않는 우리가 말이야. 이 감정은 전혀 물질적인 것, 물리적인 것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야. 위험을 인식하는 따위의 두려움이 아니란 거지. 죽은 자들이 불러 일으킨 공포심은 어떨까? 죽은 자들은 인간 중에서도 가장 위험하지 않은 부류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공포심을 유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공포감 혹은 경외감은 본질적으로 인간이 우주에서 받는 인상과 관련된 것이라고 Lewis는 주장해. 자연에서 발생원인을 찾을 수 없는, 무언가 자연의 본질이 되는 초자연적인 것에서 인간이 느끼게 된 감정이라는 거지. 그는 이 감정이 단순히 인간 정신의 비꼬인 부분에 불과한 게 아니라면,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 즉 ‘계시’라고 불러야 마땅한 것이라고 했어.

그러나 누미노제는 도덕적 선악과 관련한 두려움과는 상관이 없어. 인간이기에 갖는 특이한 성품, 도덕을 살펴보자. 인간은 어디서 유래됐는지 모를 도덕적 판단을 수행해. 어떤 행위에 대해서 “해야 한다” 또는 “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느끼는 거야. 도움이 필요한 이웃이 있을 때, 우리는 고민해. “귀찮은데 가만히 있을까……? 아니야, 그래도 도와드려야지.” 인간이 자연법칙에 순종하여 반응하는 동물이라면, 두 가지 본능 사이에서 고민하는 일은 없었을 거야. 설령, 고민하더라도 강한 본능에 순응해야 할 텐데, 이상하게 우리는 세미한 양심의 음성에 죄책감을 느끼며 적잖은 경우 작은 본능에 순종하게 되지.

위에 말한 두 가지 경험. 도덕적 경험과 누미노제 경험은 서로 동떨어진 것이야. 그래서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아무 접촉없이 존재할 수 있었어. 고대 종교에서는 신들에 대한 숭배와 철학자들의 윤리적 논의가 분리된 형태가 대부분이었지. 유대교와 기독교가 등장하기 전까지 말이야. 인간이 이 두가지를 동일시할 때 비로소 고등종교는 탄생하지. 즉,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신령한 힘(Numinous Power)과 의무감을 불러일으키는 도덕의 수호자가 합쳐져 ‘정의로운 신’으로 재탄생할 때 말이야.

Lewis는 이 종교의 세번째 발달단계가 인간으로서 엄청난 도약이라고 말했어. 경외감과 의무감을 합치는 것은 생각만 해도 부담스런 일로서,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반대방향으로 진행된 일이기 때문이거든. 그러나 이것이 건전한 방향이었던 것만은 분명하지. 수많은 성인들은 비록 종교 없이도 이 길을 걸었으니까. 경외감으로 겸손을 배우고, 의무감으로 도덕을 단련했지.

루이스의 주장에 힘입어 내가 주장하는 것은 이거야. 유래를 알 수 없는 인간의 성품을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가 이전에 알았던 어떤 초자연적인 우주의 본질이 있었음을 알게 돼. 그리고 바로 이 본질은 경외롭고 정의롭다는 것을 알게 되지. 절대선을 꿈꾸는 우리의 본성은 바로 이 초자연적인 것과의 옛적 관계를 기억하는데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지. 우리의 성품은 또한 그 초자연적인 것을 닮았기 때문에 그 본질을 좇으려 하거든. 신에 대한 경외감과 죽음에 대한 공포감을 느끼고, 아름다움과 기쁨을 추구하며, 선을 위해 악한 행위를 통제하려 해. 이후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우리는 무언가 초자연적인 존재와의 올바른 질서로 인해 만족과 절대선을 경험했던 적이 있었어. 그는 선한 신이었어. 그래서 우리는 기뻐했었고, 항상 행복했었어. 신과의 관계를 잃은 인간은 자연계에서 가장 고등한 생물임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결핍을 경험하지.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모든 생물 중 신과 제일 가까웠던 존재여서 그랬을거야.

Lewis는 그의 책 ‘순전한 기독교’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어.

우주 전체에 정말 아무 의미가 없다면 우주에 의미가 없다는 그 생각 자체를 아예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주에 빛이 없고 따라서 눈을 가진 생물도 없다면 우주가 어둡다는 사실 자체를 알 수 없는 것처럼 말이지요. 그 경우에 어둡다는 말은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할 것입니다.

빛을 알고, 그것을 볼 수 있는 자만이 자신이 어두운 곳에 있다는 것을 알아. 아름답고, 좋은 것, 선한 것을 모르고 그것을 판단할 줄 모르는 자에게는 이런 단어들조차 아무 의미가 없게 되어 버리지.

여기까지 요약해볼게. 즉, 우리의 이성을 거슬러 올라가고, 우리 모두가 느끼는 모종의 감정들과 도덕성을 따라 올라가면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닌, 어쩌면 우리를 만든 선한 신의 존재가 있음을 알 수 있다고 주장했어.

혹자는 반문할지도 몰라. “선한 신이 존재한다구? 무한히 차갑고 공허한 이 우주를 봐. 그리고 생명력이 없는 그 광막한 우주 안에서 기껏 생명체가 편만하다는 조그만 행성 지구를 보자구. 그 쬐그만 행성에서 하루가 멀다하고 무수한 악이 자행되고 고통이 가득해. 선한 신이 우주를 창조했다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하고 말이야. 좋은 질문이야. 고통과 악을 허락할 수 밖에 없는 선한 신을 변호해 보자구. 다음 이야기 역시 Lewis의 ‘고통의 문제’에 나온 이야기야. 훌륭한 글이니까 그 논조를 잘 표현해보도록 할게.

자, 우리가 신에게 온갖 불만을 털어놓고 따지는 이유가 있어. 왜냐하면 신은 전능하다고 믿기 때문이야.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당신께서 왜 이토록 불의와 불편을 야기하냐는 것이지. 자연 속의 수많은 고통과 악을 왜 제거해 주지 않냐는 것이지. 그런데 그 전능함이 정녕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것일까? 비둘기 한 마리만 손에 쥐어주고 두 집에 동시에 거하게 하라고 했을 때, 비둘기를 갑자기 두 마리로 증가시켜도 안되고, 시공간을 변화시켜도 안 된다는 등 조건을 마구마구 달았을 때, 신일지언정 그 모순된 일을 수행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을거야. 전능함이라 할지언정 자신 스스로의 원리에 모순된 것은 할 수 없어. 전능함이란 내재적으로 불가능한 일도 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야. 물론 내재적으로 불가능한 것도 못한다고 신의 능력에 한계가 있는 것 또한 아니야. 모순되는 일이란 결국 무의미한 일이거나 불합리한 일이거든. 가령 “하나님은 자유의지를 주시는 동시에 안 주실 수 있다”는 말은 하나님에 관해 어떤 의미도 전달해 주지 못하지. 만일, 하나님이 모순된 일조차 하게 된다면 의미 없는 분인 동시에 신뢰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리지.

그러면 이제 ‘자연법칙’을 한번 살펴보자. 모두에게 공평하게 작용하는 그 엄격한 자연법칙을 말이야. 너무도 공평하고 엄격해서 신이 끼어들 데가 없어보이는 그 자연법칙. 전지전능하다는 신마저 무력하게 보이게끔 만들어버리는 그 엄연한 자연법칙 말이야. 그런데 말야. 우리 자연을 한번 잘 살펴보자구. 너와 나는 물질로 이루어져 있어. 그리고 너와 나 사이에는 너와 내가 아닌 다른 물질로 가득 채워져 있지. 그 중간 물질을 매개로 하여 우리는 서로 볼 수 있고, 냄새도 맡으며, 말하고 들을 수 있어. 공기를 매개로 음파가 전달되고, 태양이 공급해 준 광자 덕분에 우리는 서로를 볼 수 있어. 서로를 인식한다는 이야기지. 그 뿐이야? 내가 있다는 것도 너와 주위 물질 덕분에 알 수 있는 거야. 자의식이란 환경의 도움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지. 남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나의 존재 또한 아는 거거든. 또한 네가 같은 시공간에서 또다른 의지적인 존재자로서 존재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난 너의 자유를 확보해 주기 위해 나의 자유를 제한해. 자유 역시 환경이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야. 선택의 여지를 제공해주지. 만남이란 만나지 않음이 가능할 때 인식할 수 있는 것이야. 절대자인 신께서 성육신되어 우리 앞에 나타났을 때, 같은 시공간의 환경에서 타자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은 우리와 만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실 수 밖에 없었던 것이야. 그것도 우리가 익숙한 ‘얼굴’을 가진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지.

그 중립적인 장의 역할을 하는 ‘환경’은 본질에 변함이 없어야만 해. 만일 물질이 남이 아닌 내 요구에만 복종하게 되어 있다면, 타인의 자유나 의지는 존재할 수 없게 되지. 그런 세상에서는 우리가 서로의 존재를 서로에게 알릴 수도 없을거야. 왜냐하면 신호를 보낼 수 있는 물질이 모두 그의 지배 아래 있는 탓에, 우리가 그 물질을 조종할 수가 없거든.

그러나 물질이 변함없는 성질을 가지고 있고 일관된 자연법칙을 따르고 있다면, 물질의 모든 상태가 어느 한 존재에게만 유리하게 작용하는 일은 일어날 수 없어. 그렇다면, 고통이라는 악을 살펴보자. 고통은 무조건 악한 것일까? 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 고통이라는 악은 타자와의 관계의 질서가 깨졌을 경우,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으로서 일정 수준을 넘기지 않는 이상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 속에서는 유익한 것이야. 불을 쬘 때 얼마나 거리를 두어야 하는지 알려주는 고통, 즉 ‘따뜻하다-기분 좋을 만큼 뜨겁다-너무 뜨겁다-화상입을만치 뜨겁다’ 로 이어지는 과정은 당연하며 유익한 것이지. 한편, 병으로 인한 고통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병이 생겼음을 스스로 알 수 있어. 고통이 있기 때문에 또한 사람의 내면은 성숙하기 마련이야. 그리고 운동으로 인한 가벼운 통증 따위는 오히려 유쾌하기까지 해. 연인과 키스할 때 입술이나 혀를 깨무는 행동 따위는 오히려 고통을 만들어 즐기는 수준이지.

피조물들의 잘못된 행동 하나하나마다 매번 신이 개입해서 바로잡아 주는 세상을 상상해보자. 각목을 무기로 쓰려 집어든 순간 풀잎처럼 부드러워지고, 거짓말이나 욕을 담은 음파를 공기에 실으려는 순간 성대가 그것을 거부하는 세상 말이야. 그러나 잘못이라는 것을 저지를 수 없는 그런 세상에서 의지를 자유롭게 행사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빈말이 될거야. 아니, 더 나아가 물질이 거부할 것이기 때문에 악한 생각 자체가 불가능해질 거야. 우리를 너무 잘 알고 있을 신은 말이야. 우리 삶에 너무 과하게 끼어들지 않을 거야.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자연의 법칙을 이해하고 이용하는 것이 불가능해질 정도로 우리 삶에 간섭하지 않을거야. 자연질서는 어떻게 보면 필요악이야. 우리 삶을 가능케 해 주는 유일한 조건인 동시에 그 삶을 제한하는 한계이기도 하지.

전능한 신은 자신의 존재를 지울 수 없어. 다시금 존재하지 못하도록 지워버리고 다시 존재할 수도 있게 한다는 것은 자기 모순이지. 내재적으로 모순되는 것, 자신의 성품에 어긋나는 것을 하지 못할(동시에 않을) 그 전능한 신은 영원히 살아있고, 또한 선해야만 할거야. 우리의 기억에 그렇게 각인되어 있거든. 완전한 선이 이루는 행동은 아름답고 의미가 있어. 냉엄한 자연법칙의 현실 속에서 우리는 ‘사랑’을 찾아냈잖아? 막상 우리 주변에 말로 다 못할 고통과 고난이 있음을 목도하지만, 신은 선하다고 마음 한 구석 믿어보기로 하자. 그렇지도 않다면, 아픔과 고통 속의 저들을 구원할 마지막 하나의 희망마저 포기하는 것이 되지 않겠니? ‘소망’이란 현재에 연결된다는 점에서 영원과 닮았어. 빛과 힘을 주거든. 기독교의 신이 주는 소망에 대해서는 나중에 꼭 다루도록 할게.

다음 편지에 보자. 이만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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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편지: 기독교에서 전제하는 것들 3 – 신이 존재한다

전제 세 번째, 신이 존재한다.

나는 창조물을 심판한다는 신을 상상할 수가 없다 (아인슈타인)

서론에서 이 인용문에 대한 답을 간략하게 했었지. 창조물 중에는 자연법칙에 그저 순응하여 자극에 따른 반응같은 행동만 하지 않고, ‘왜?’라는 물음을 던지며 자연법칙을 파악하는 ‘이성’이라는 것을 갖춘 인간이 있다고 말이야. 그 이성이라는 것은 자연에 속하지 않아야 한다고 했어. 아니, 이성이라는 것은 필요한 만큼 자연에서 해방되어 있는 것이야. 이성은 자연을 바라보는 관계를 가질 수 있어. 마치 우리가 손목시계가 어떻게 째깍째깍 돌아가며 시간을 정확히 가르쳐주는지 그 작동원리를 이해하는 것처럼 말이야. “아하, …그래서 시계가 정확히 몇 시 몇 분 몇 초인지를 가르쳐주는 거구나.”하고 깨닫지.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성을 통해 자연을 바라봐. “중력 때문에 사과가 아래로 떨어지는 거구나.” 하고 깨닫지. 우리가 자연과 맺은 관계는 독특해. 분명 자연부품 중에 하나인데 자연과 분리되어서 자연을 관찰하고 이해할 수 있어. 이성이 자연과 관련된 것은, 시계 안의 내부부품들이 서로 관련을 맺는 것과는 다른 방식이야. 우리가 이성을 통해 얻게 된 지식은, 자연이라는 시계의 부속품 중의 하나가 되어서 알게 된 것이 아니라 시계 부품들 동작 위에 서서 작동원리에 대해 캐물었을 때 깨닫게 된 거야. 따라서 이성은 자연의 일부일 수 없어. 그렇지만 이성과 자연이 독립적인 것으로 완전히 분리된 것은 아니야. 우리 인간 스스로를 보자구. 초자연적인 이성이 자연과 어찌나 잘 결합되어 있는지, 우리는 그 혼합체를 총칭해 ‘나’라고 부르지.

지난 번에는 돌아보지 못했던 자연주의자들의 반박들을 살펴보자. 자연주의자들은 우리의 정신적 행위를 완전히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해. 육체 뿐 아니라 정신 역시 진화해 왔다고 생각하거든. 그들의 주장을 한번 들어보자. 그들은 우리가 모두 태초의 원시생물로부터 진화해 온 동물이라고 가정해. 그들에 따르면 원시생물은 전혀 이성적이지 못했어. 다시 말하면 우리 인류의 조상은 비이성적이었어. 생물의 성장과 발전이란 그저 거듭된 분자들의 결합과 분리에 의지할 뿐이라는 것이지. 다시 말하면, 우리가 가진 사고란 모두 외부에 원인을 두었었고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란 자극에 따른 반응에 불과한 것이었지. 그러나 그 반응은 의미가 있었다고 주장해. 자연선택이라는 본능과도 같은 법칙을 통해서 우리는 그 반응 중 이로운 것과 해로운 것을 가려내어 이로운 것을 선택할 수 있었다는 거야. 그러다 보니 이로운 것만 남겨지고 해로운 것은 계속 제거되어 왔다는 거야. 그래서 이로운 것은 옳은 것, 즉 참이 되었고 해로운 것은 거짓이 되었다는 이야기지. 진화를 통해 비이성적인 인간이 이성적인 인간으로 진화해 왔다는 거야.

글쎄, 과연 그럴까? 결론부터 얘기하면 그들의 이런 주장은 허무해. 그들이 맞다면 우리가 무수히 고민하고 생각해서 얻었다는 지식들이 도무지 ‘진리’ 혹은 ‘앎’이 될 수 없거든. 끈처럼 길게 이어진 인과관계의 자연현상에서 앎을 얻으려면 그 인과관계에서 벗어난 관찰자가 꼭 있어야만 해. 관찰자는 현상을 관찰하고 원인에 따른 결과가 왜 그렇게 귀결될 수 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를 파악할 수 있지. 그 이유를 파악하면서 관찰자는 “왜?”라는 질문을 던져. 왜냐하면 ‘앎’이란 “왜?”라는 질문을 던져야만 얻어지는 것이거든. 우리가 손목시계의 기어처럼 자연법칙의 앞뒤에 맞물려 돌아갈 뿐이라면 내가 왜 이렇게 돌아가는 것일까 하는 질문은 던질 수가 없어. “대체 우리는 왜 이렇게 동작하는 걸까?” 하는 따위의 질문 없이 이치에 맞게 최적의 시계부품이 되어 작동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 입장에서는 우연일 뿐, 우리가 옳다는 아무런 근거도 우리의 이성에 기대어 찾을 수가 없어. C.S. 루이스가 그의 책 ‘기적 (홍성사 펴냄, 2008)’에서 비유했듯이, 우리가 아무리 시력이 좋아진다고 한들 빛이 잘 보일 뿐이지 빛에 대해서 더 잘 알게 되는 것은 아니야. ‘왜’라는 질문, 빛과 독립된 개체로서 빛의 외부에서 던질 수 있는 그 질문을 던져서야 비로소 빛의 성질을 깨달아갈 수 있게 돼.

어떤 이들은 자연선택이 아닌 경험을 내세우기도 해. 무수한 세월 동안 쌓여진 경험의 학습을 통해 본래는 이성적이지 않았던 정신적 행위가 결국 지금의 이성으로 발전했다는 이론이야. 날카로운 도구를 쓸 때 고기를 더 쉽게 자를 수 있다는 반복 경험을 통해 고기를 자를 때면 날카로운 도구를 기대하거나 연상하게끔 인간을 조건화했다는 거야. ‘기대=추론’ 혹은 ‘연상=추론’이 된 셈이지. 그런데 기대나 연상은 감정에 속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감정은 자극에 대한 반응으로 볼 수도 있는 영역인데 이것이 과연 이성적 추론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을까? 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 이성적 추론이란 “왜?”라는 질문을 던져야만 되거든. 그리고 어떤 명제에 대해 ‘왜냐하면’으로 시작된 답이 마련되어야만 해. 영화 매트릭스를 기억해 보자. 그 영화에서 사람들은 매트릭스라는 철저하게 프로그램된 가상현실 속에서 살아가. 그렇게 착각 속에 사는 이들 중, 프로그램의 오작동으로 인한 자연스럽지 못한 현상을 발견하는 이들이 있어. 그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하지. 왜냐하면 자신들이 익숙했던 그 법칙과 어긋나는 듯한 일들이 일어나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상하다는 생각만 가지고 그냥 지나쳐버리지. 설령 의문을 품었다손 치더라도 매트릭스의 교묘한 세뇌로 인하여 기억이 상실되어 버려. 그런데 그 현상이 잘못되었음을 보고 “왜?”란 질문을 끊임없이 던진 이들이 있었어. 주인공 네오같은 이들이야. 결국 이들은 매트릭스의 실상을 깨닫게 되지. 매트릭스가 가상현실이란 걸, 자신의 삶이 철저하게 프로그램된 영상이란 걸 이들은 깨달았어. 그래서 그들은 매트릭스에서 벗어나고야 말지. 그들의 이성을 따라서 말이야. 매트릭스의 오작동을 보고 그저 이상하게 느낄 뿐이면 매트릭스가 가상현실이란 걸 절대 알 수 없어. “왜?”라고 끊임없이 묻고, 어떤 원인과 과정으로 말미암아 그 오작동이 귀결되었는지 파악해야만 매트릭스에 대해 ‘알’ 수 있어. 마찬가지로 고기를 보고 날카로운 도구를 기대하거나 연상할 뿐이면, 왜 날카로운 도구가 고기를 잘 자르는지 그 이유는 영원히 알 수 없어. 그 원리에 대한 이성적 질문을 던지지 않으면 말이야. 이것은 우리가 자연이라는 기계 안에서 돌아가는 부품에 불과하다면 할 수 없는 일이야. 이것은 결국 우리 내면에 자연 너머로 한 발자국 성큼 내딛을 수 있는 무언가가 존재하기에 가능한 일이지.

재미있는 것은 자연주의자들도 이성적 추론을 사용해서 자신들이 진리에 도달한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점이야. 그들의 이론에 따르면, 이성적 추론에 따른 것들은 결국 믿을 게 못되는 것인데두 말이지. 인간성을 배제하는 철학을 견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역시 인간인 셈이야. 이성으로 자연을 총괄하는 습성에 너무 익숙한 탓에 자연주의자들 역시 자신들 생각 이상으로 자신들이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을 잠시 잊은 셈이지.

자, 아직까지는 이성에 대한 이야기만 했어. 신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이것은 ‘존재’의 근원에 대한 것을 고민해 봐야돼.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존재자. 다른 존재를 파생시키는 근원이 되는 존재. 그리고 그 존재의 주체가 되는 존재자 말이야. 바로 모든 존재의 근원이 되는 특별한 존재자 말이야. 자연 위에 군림하는 우리 이성을 살펴보자. 우리의 이성은 독자적일까? 그런 것 같아. 적어도 나는 그것이 이성의 자유의지라는 특성에 의해 예증된다고 주장했고, 각 개인의 이성은 독자적이고 자발적이라고 전제했어. 그렇다면, 그 이성적 사고가 절대적으로 독자하는 것일까? 인간의 이성은 과연 태초로부터 주어진 것, 자생한 것, 절대적인 것일까? 그렇지 않아. 이것은 우리의 이성의 불완전함을 보면 답이 나오지. 우리 이성은 우리 몸이 죽었을 때 더 이상 활동하지 못해. 죽음으로 인한 유한성이 있지. 그리고 각 사람의 이성은 다른 사람의 이성의 도움을 받아 무언가를 깨달아 왔어. 다른 사람의 이성은 또 제 3의 다른 이성에게서 배웠을 테고 그 3의 이성은 또 다른 제 4의 이성에게서 배웠을 거야. 우리는 이렇게 계속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거야. 지지부진한 이런 생각을 멈추고 돌이키면, 우리는 독자적인 존재, 영원부터 존재하는 무엇을 생각할 수 밖에 없어. 스스로 존재하는 자. 따라서 존재하기를 멈출 수 없는, 죽음이 없는 존재. 우리는 그 존재를 신이라 부르지. 이런 이성의 연관 속에서 우리는 신의 특성을 하나 배울 수 있어. 우리 인간의 이성은 신이라 불리는 그 이성적 존재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 말이야. 루이스는 ‘기적’에서 이런 은유를 사용했지. ‘각각의 인간 정신은, 말하자면 그 초자연적 실재가 자연 속으로 뻗은 가지이자 창끝이고 지류입니다’라고.

여담이지만, 갑자기 성경구절 하나가 생각나는구나.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란 것이 각 개인의 이성에 창끝을 꽂듯 작용하는 묘사가 말이야.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영혼과 정신을 갈라놓고 관절과 골수를 쪼개어 그 마음속에 품은 생각과 속셈을 드러냅니다. (성서 공동번역, 히브리서 4장 12절)

여전히 자연주의를 견지하는 다른 신관도 살펴보자. 자연 그 내부는 기계에 불과하더라도 자연 그 전체 체계가 스스로 존속하고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존재일 수가 있어. 자연 그 전체가 주체성을 갖는 셈이지. 그래서 자연 그 전체가 무언가 우주적인 의식을 형성하며, 이것을 우리는 ‘신’으로 인식한다고 주장하기도 해. 그렇다면 우주는 신의 몸이 되는 셈이야. 그런데 말이야. 이것 역시 자연주의를 견지하려면, 똑같은 난점을 갖고 있어. 자연에 존재하는 우주적 의식이란 게 역시 원자활동으로만 구성된 원인과 따른 결과가 되는 한 절대 이성이 될 수 없어. 자연이 태초부터 이성적이었던 게 아닌 이상, 누군가가 이성적인 자연을 만들었던 게 아닌 이상 불가능한 일이야. 비이성적인 것이 이성적인 무엇으로 스스로 진화할 수는 없어. 지금까지 설명한 것과 같은 이유지. 게다가 자연의 부속품에 불과할 인간이 이성을 지니는 이유를 설명할 수가 없어. 이 이론에 따르면 주체적인 이성의 소유자는 자연 그 전체일 수 밖에 없거든.  따라서 이것은 또한 수많은 우리 개개인들 이성의 근원이 될 수 없어. 자연의 주체되는 그 무엇이 자연 스스로를 바라보고 스스로에게 의지를 부여할 수 있다고 하여도, 이 관점 역시 신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게 돼. 이 경우 자존적이고 근본적인 그 전체 의식은 결국 신이 되는 것이거든.

이성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다 보면, 신의 존재를 긍정하는 것이 훨씬 자유롭고 풍성한 철학이라는 것을 깨닫게 돼. 자연주의로 이성을 설명하려다 보면, 그래서 신의 존재까지 부정하게 되면 수많은 난제가 떠오르게 되지. 자연주의로 설명하기 어려운 이성의 특질 하나만 더 이야기해볼게. 바로 ‘공리’라는 것이야. 우리 이성이 추론을 시작하기 위해 출발점으로 삼는 명제들이지. 따라서 증명이 불가능해. 논리학에서는 무증명명제라고도 일컫지. 우리는 이것들이 옳다는 것을 ‘그냥 알아’. ‘그저’ 깨달을 뿐이라구. 공리의 예를 몇 개 살펴볼까?

  • 명제 P가 성립한다면 명제 ‘P 또는 Q’도 성립한다.
  • 두 점이 주어졌을 때, 그 두 점을 통과하는 직선을 그을 수 있다. (유클리드 기하학)
  • a=b 이면, a+c = b+c 이다.
  • 공집합이 존재한다.

위에서 예로 들었던 고기 자르는 날카로운 도구도 생각해보자. 고대인들의 사고를 추정해보면 다음과 같을거야.

  1. 난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좋다.
  2. 난 살기 위해 먹어야 한다.
  3. 난 소화가 잘 되는 것을 먹어야 한다. 그것이 내게 이롭기 때문이다.
  4. 고기가 작은 것이 소화도 잘 되고 먹기에 좋다.
  5. 날카로운 도구를 쓰면, 뭉툭한 도구보다 적은 힘으로 빠르게 고기를 자를 수 있다.
  6. 앞으로 고기를 자를 때면 날카로운 도구를 이용하자.

고대인들은 분명 반복된 경험으로 날카로운 도구가 자신에게 이롭다는 것을 깨달았어. 날카로운 도구가 콜라겐 분자 결합을 끊기에 수월하다는 것을 당시에는 굳이 몰랐더라도 말이야. 그런데 고대인들은 이미 몇 가지를 알고 있었어. 날카로운 도구를 사용해서 고기가 수월하게 잘리는 것이 ‘좋다’라는 것을 말이야. 결국 그것이 자신에게 ‘이롭다’는 것을 말이야. 그리고 남들과 다른 ‘자신’이라는 것을 말이야. 우리 ‘자신’이란 결국 매 7년마다 심장과 두뇌의 일부를 제외하곤 모든 분자가 교체되는 물질 덩어리에 불과한 데 말이지. 사실 우리 몸이 주변환경과 구별될 수 있는 것은 우리 몸의 분자들끼리 보다 더 가까이 위치하고 있을 뿐이지, 수없는 물과 공기분자가 우리 몸을 쉴 새없이 들락날락거리며 너와 나의 경계를 무색하게 만들고 있거든. 그런데 우리는 우리 ‘자신’을 명확하게 인식해. 두뇌에서 연결된 신경의 감각들이 ‘나’라는 경계를 파악하게 도와주지. 그렇지만 우리는 어떻게 우리 ‘자신’을 인식할 수 있는 걸까? 그리고 사는 게 죽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대체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그 이기심은 어디서 비롯된 걸까?

어디서 배웠는지 모를 이 ‘앎’들. 우리는 대체 어떻게 이것들을 알고 있는 걸까? 그리고 어떻게 모두가 공감하고 있는 것일까? 자연주의가 인간의 정신활동은 자연발생된 것이라고 주장하려면, 이 공리들에 대한 것부터 설명해내야 해. 우리가 대체 이것들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 말이야. 그리고 여기서 어떻게 추론과정을 인간이 수행할 수 있는지 역시 설명해내야 하지. 공리들은 비이성적인 게 아니야. 자명한(self-evident) 것이지. 따라서 우리의 이성은 이 내재적으로 합리적인 명제들에 의존해. 난 말이야. 이 공리들은 신이 자연에게 부과해 준 원리라고 생각해. 어쩌면 신 그 자체의 성품이 담긴 것인지도 모르지. 신의 일부일지도 몰라. 분명한 건, 이 공리들은 우리가 가진 이성의 뿌리가 된다는 것. 독자적으로 사유하는 우리의 이성들이 추론을 해대며 활개칠 수 있는 터전이 된다는 것이야. 그런 의존성을 살펴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에도 근원의 실체가 있음을 알 수 있게 되지. 바로 ‘신’이라는 존재를 말이야.

자, 재미있지 않아? 난 초자연적인 신이 존재한다는 전제의 근거를 바로 인간에게서 찾았어. 우리가 자연의 일부라고 여겨서 ‘동물’로 구별하기도 하는 인간에게서 말이야. 그것은 인간이 다른 자연의 구성원들과는 다르게 이성적 추론과 도덕적 판단을 할 수 있기 때문이야. 대지 위를 흐르는 강물은 ‘난 왜 이렇게 하릴없이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려가야만 할까?’ 하고 캐묻지 않아. 노을을 바라보는 나무늘보는 ‘햐~ 아름답다’ 하며 미학적 판단을 하지 않지. 사자가 노루를 사냥해 잡아먹는 모습을 보면서, 독수리는 ‘사악한 사자녀석들’ 하고 도덕적 비판을 가하지 않아. 자연은 자연법칙에 순응하며, 자연스럽게 살아갈 뿐이야.

인간은 달라. 굽이치며 도도히 흘러가는 강물을 보며 ‘삶이 어찌 이리도 휘몰아치며 흘러갈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시상을 토해내는 것이 인간이야. (각주는 나중에 미국에 도착해서 달자) 이성적 판단을 수행하고 끊임없이 삶의 의미를 좇기 때문에, 사고하는 인간의 눈 앞에 신의 존재는 지평선 너머로 희미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지. 왜냐하면, 내가 전제했듯이 인간은 구원을 스스로 얻지 못하는 한계성이 있고 인간의 이성은 신적 이성에 의존하고 있으며 인간의 도덕적 기준은 신에게 그 기원을 두고 있기 때문이야.

물리학자들의 뛰어난 이성적 탐구 능력은 신이 존재해야만 문제가 풀리는 한 가지 난제를 발견하게 해 주었어. 바로 우주의 기원에 대한 문제야. 무신론자들은 우주가 현재 상태로 영원토록 지속되어 왔다는 견해를 편하게 고수해 왔어. 그러면 신이 어느 시점에 우주를 창조했다는 견해를 반박하려 애쓰지 않아도 될 뿐더러 따라서 굳이 우주의 기원에 대해 설명하지 않아도 되거든. 그러나 우주가 대폭발(Big Bang)로부터 비롯되었다는 물리 이론 때문에 더 이상 그 입장을 고수하기 힘들게 되었어. 빅뱅 이론은 현재까지도 우주 배경 복사(Cosmic Microwave Background Radiation)의 존재와 여러 특성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이론으로서 거의 모든 천체물리학자들에게 지지를 받아. 우주 배경 복사는 우주 모든 방향에서 검출되는 160.2GHz의 마이크로파로서 뜨거운 가스 형태의 무엇이 현재의 우주 크기로 팽창했을 때 방출될 것으로 예상되는 복사야. 150억 년전 우주가 대폭발을 통해 생성되어 팽창하고 그래서 점점 식어갔을 때 우주 전체에 걸쳐 남겨진 복사라는 거지. 중요한 것은 우주의 시작이 있었다는 거야. 자, 존재하기 시작하는 모든 것에는 원인이 있어. 예컨대 내가 존재할 수 있던 것은 내 나이만큼의 햇수 전에 우리 부모님께서 나를 낳아주셨기 때문이야. 그리고 우주는 어느 시점부터 존재하기 시작했어. 그 시점 전에는 우주가 존재하지 않았어. 따라서 우주를 존재하게 한 원인이 반드시 존재해. 어떤 사건이던 그 사건을 발생하게 한 원인이 존재하기 마련이지. 갑자기 우리 귀에 쾅 하는 소리가 들렸다고 하자. 우리는 그 소리가 비롯된 원인이 당연히 있다고 생각할거야. 그렇다면, 우주가 탄생하면서 발생한 큰 굉음(Big Bang)에 원인이 있는 것 또한 당연하지 않겠어? 물리학자들은 우주의 탄생과 더불어 시공간이 생기고, 물질들이 만들어졌다고 생각해. 우주 탄생 전의 시간과 물질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의미없다고 여기지. 그렇다면, 우주를 생기게 한 원인은 시공을 초월하는 존재요 초물질적(transphysical)인 존재여야 해. 더불어 원인 없이 존재하는 존재여야 하고 그러므로 변함없는 존재여야 해. 그렇지 않다면, 우주의 원인 그 이전 원인을 또 찾아야 하는데 이것은 의미없는 물음의 반복에 지나지 않지. 무에서 아무런 원인 없이 유가 나올 수는 없어. 어느 시점부터 존재하기 시작한 우주는 우리에게 초자연적인 존재가 있음을 가르쳐 주지. 바로 ‘신’이라는 존재를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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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째 편지: 기독교가 전제하는 것들 2 – 절대적 타자성과 자유의지

전제 두번째, 나와 다른 타인은 절대적 타자성을 지니고, 우리 모두는 독립된 자유의지를 가진다.

“날 있는 그대로 사랑해 줄래?”

“남을 사랑한다는 건, 있는 그대로의 상대방을 받아주는 거야”

우리 젊은 날 사랑에 대해 토론할 때 많이 나누었던 이야기지? 사랑은 이런 거야 하고 드라마에서 듣고, 그걸 우린 술상에서 반복하고 말이야.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것이 사랑이다’란 생각. 이 생각이 근래에 유행한 이유는 아마도 20세기 초 철학자 레비나스의 ‘타자’ 개념 덕이 클 거야.

그는 1906년생의 유태계 프랑스 철학자였어. 그는 후설과 하이데거의 제자였지만, 나치에 협력한 스승에 대해 크게 실망하게 되었고, 당시 2차 세계 대전의 경험은 그의 철학을 크게 변화시켰어. 그의 가족들은 유태인 학살과정에서 희생되었어. 레비나스 본인은 프랑스군 장교로서 참전, 독일군 포로가 되어 강제노동을 했을 뿐 아니라, 무수한 동족 유태인의 죽음을 경험했지. 그는 묻기 시작했어. “1500여년이나 기독교 복음의 영향 하에 놓인 유럽이 어떻게 그처럼 엄청난 폭력과 살상을 자행할 수 있었는가? 전쟁의 폭력은 어디로부터 비롯되었는가?” 레비나스는 당시 서양의 전체주의적 철학과 전쟁이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어. 전체에 복종하는 것이 곧 전쟁의 철학이지. 전체를 거부하는 사람은 무참하게 제거되기 마련이야. 그런 의미에서 전쟁은 전체주의적이야. 그런데 당시 서양철학은 모든 것을 통일하고 포괄하여 한 이념에 묶는 노력이 대부분이었어. 그의 스승이었던 하이데거의 철학도 ‘존재의 진리’에 인간을 종속시키고자 했던 면에서 전체주의적 성격을 벗어났다고 하기 어렵지. 레비나스는 이에 반기를 들었어. 그는 평화의 철학, 즉 어떤 무엇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개인의 인격적 가치와 타자에 대한 책임을 강조하는 사상을 구축했어. 전체를 강조하다 보면 사회로 하여금 한 방향을 향해 바라보게 만들어. 아침 조회 때 훈화하는 교장을 향해 열을 지어 서 있는 초등학생들처럼 말이야. 사람과 사람끼리 똑바로 마주보지 않고 있지. 그리고 사람 사이도 어떤 공감대를 통해서 교감하게 되어있고, 결국 공통의 이념과 예절이란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채 마주하게 돼. 레비나스는 가면을 벗고 ‘나’와 ‘너’가 마주보는 관계에 시선을 두기 시작했어. 그러면 우리의 정신 뿐 아니라 몸도 보이게 돼. 우리 정신이 존재하는 것은 몸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그래서 우리 모두는 한편 물질적이야. 우리가 상대방을 인지, 인식할 때는 나 중심에서 상대방을 이해하지. 일종의 도구로서 상대방을 바라보는 측면이 항상 있거든. 그렇지만, 상대방은 나의 도구이기 전에 그저 존재하는 또 하나의 존재자이지. 물질적으로 같은 시공간에 함께 존재하기 때문에 내가 활개칠 수 있는 세계의 범위를 제한하며, 그래서 나로 하여금 나 중심적인 세계에서 벗어나게끔 인식하게 도와주고, 결국 타인과의 공생을 꿈꾸는 이타성을 갖게 도와주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타자의 타자성. 바로 절대적 타자성이야.

레비나스는 타인을 이렇게 정의했어. ‘타인은 내가 조종할 수 없는 존재다’ 라구. 타인은, 완벽하게 독립된 자유의지(주체성)를 지니고 있어서 내가 억압할 수는 있어도 내 것으로 만들 수는 없는, 절대적 타성을 지녔다고 했지. 심지어 남을 살해하더라도 그는 영원히 타인으로 남는다고 주장했어. 동시에 타인이란 우리가 절대로 완벽하게 알 수 없는 존재이기도 해. 만일, 타인이 내가 알 수도 없고 조종할 수도 없는 존재라면 이것을 일단 인정하는 것이 타인과 나 사이 관계의 출발점이 될거야. 타자의 절대적 타자성을 인정하는 것. 이것이 사랑의 시작이야. 반면에 타자를 자아에 환원시키고자 하는 것은 폭력이지. “사랑은 사랑의 대상이 되는 사람을 그가 있는 그대로 있게 하는 것이다.” 바로 하이데거가 표현한 사랑의 정의야.

난 극심한 고통을 겪은 어느 날, 절대적 타자성의 존재를 깨달았어. 세상에 도움으로 해결될 수 없는 고통의 수준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그 날, 그 어느 누구도 구출해 낼 수 없는 고통의 심연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은 그 날… 난 좌절했어. 왜냐하면, 어딘가 모르게 내 이상이 깨져버린 것만 같았거든. 치기어린 생각이었지만, 난 내 인생의 모습은 ‘남을 돕는 것’이어야 한다고 늘 생각해 왔어. 유토피아를 꿈꾸기도 하고, 역사의 진보를 믿기도 했지. 난 내가 남에게 무언가를 줄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었고, 내가 줄 수 있는 그 도움은 실제 남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믿었어. 그런데 그 날, 난 내 꿈이 허황된 거라는 걸 비로소 깨달았어. 남을 돕는다는 게 얼마나 오만하고, 자기 중심적인 생각이었는지를 깨닫게 됐어. 고통의 심연에서 타인의 동아줄이 미칠 수 없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 왜 천국에서 음부로 거지 나사로가 건너가지 못하는지 이해했어. 결국 고통을 벗어나는 것은 자신의 몫이라는 것을, 구원의 동아줄을 찾아서 붙잡아 올라오는 것은 그 어느 누구도 강제하지 못하는 본인의 몫이라는 것을 알게 됐어.

자유의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볼게. 자유의지(free will)는 자신의 행동과 결정을 스스로 조절·통제할 수 있는 힘이야. 실제 이것을 인간이 전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가지는지 아니면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학계에서 논란이 계속되고 있어. 난 인간이 전적으로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그 자유의지는 자연법칙과 양립 가능하다고 전제해. 서론에서 이성의 초자연성에 대해 언급했지. 자유의지 역시 이성의 영역에 속한 것으로서 그것이 신체에 미치는 작동은 자연법칙을 따르되(즉, 뇌의 동작은 철저히 자연법칙에 따라 수행되되) 자유롭게 자연을 넘나들며 뇌의 동작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무엇이라고 주장했어. 그 이유는 이것이 우월한 철학으로 여겨지기 때문이었어.

스피노자는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대표적인 철학자야. 그는 자유행동으로 보이는 것은 실제 자유롭지 못하다고 주장했어. 왜냐하면 내적 믿음이라는 것은 이전의 사건들에 의해 필수적으로 영향받기 때문이라는 거지. 사람에게 의지가 있어보이는 것은 결국 원인이 되는 사건들을 무시함으로 말미암은 착각이라는 거야. 따라서 자유의지란 없고, 우리가 갖는 의지라는 것은 결국 결정된 모종의 결과물이라고 주장해. 더불어 현대 유물론자들은 임의성(randomness)이란 개념을 추가시켜 자유의지같아 보이는 것은 사실 자연의 임의성에 의해 돌출된 또다른 인과적 결과물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지.

어떻게 생각해? 우리의 행동과 사유가 전적으로 물질적이며, 법칙에 철저하게 귀속된다는 것. 어딘가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아? 인간의 존엄이 무시받은 것 같지 않아? 우리가 과연 물질에 불과하다면, 왜 우리는 이런 모욕을 느낄까? 왜 자연에 불과한 우리는 자연을 거스르며, 더 나아가 자연을 지배하고 정복하려 드는걸까? 왜 본능대로 살지 않고 이성적으로 살려고 하는걸까? 자극에 대한 반응만 잘 수행하면 될 것을 그 반응을 굳이 선악으로 판별하려 하는 건 왜일까? 이성 역시 자극에 대한 반응에 불과하다면, 우리의 모든 이성적 추론은 그저 감각적 환영에 불과해. 결국 유물론자들의 주장도 믿을 수 있는 근거가 하나도 없게 된다구. 게다가 이게 사실이라면 우리는 사회에서 죄인들을 제재할 강력한 윤리적 동기를 갖기가 힘들어. 그래, 백 번 양보해서 모든 게 자연으로 설명된다고 해자. 그렇다면 과연 우리 삶의 의미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우리는 왜 살고 왜 존재하는 것일까? 영원이 없는 그 삶 속에 우리 삶에 동기를 부여해 주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자연주의, 혹 철저한 유물론은 이런 질문에 대해 전혀 좋은 답을 제공해주지 못해. 게다가 우리가 경험하는 4차원 시공간의 자연이 자연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만일지도 몰라. 저 밖에 색다른 시공간에 터를 잡은 자연이 또 있을지 어떻게 알아? 그리고 그 새로운 자연과 우리 자연이 어떤 방식으로든 서로 교통하고 있을지도 몰라. 그렇다면 그 교통이 어떤 초자연적인 존재의 중재로 인하여 이루어지고 있을지도 모르고. 세상에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듯이 우리의 지식과 지혜는 분명 제한적이야. 우리는 인생에서 수없이 경험하는 스승과의 만남에서도 우리의 부족함을 깨닫지. 모든 것을 인간의 이성으로 파악하려는 것은 교만이라고 생각해.

철학적으로 따져도 자유의지를 부정하기 어렵지만, 경험적으로도 그래. 깊은 고통 속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발견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나치 시절에 수많은 유대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악명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감되었던 사람의 이야기야. 정신요법 제 3학파라 불리는 로고테라피(logotherapy)의 창시자 빅터 프랭클(Victor Frankl)박사는 젊은 시절 나치에게 잡혀가 바로 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감되었어. 영양실조와 동상, 발진티푸스를 비롯한 각종 질병, 온갖 멸시와 고난을 겪었지. 그는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에서 그의 체험과 깨달음을 기록했어. 그는 그 지독스런 환경 속에서 ‘선택’이란 것을 영위하는 동료들을 보았어. 그는 가혹스런 환경에 압도되어 정신이 무감각해지지 않도록 자신의 마음을 지키는 사람들을 보았어. 불안감을 제압하고 정신적 독립과 영적 자유를 지켜내는 소수의 영웅들을 보았어. 반면에,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자신의 삶을 지탱하기를 포기하기로 선택한 사람들도 보았어. 그들은 삶을 포기했기 때문에, 희망을 붙잡기를 관두었기 때문에 급속하게 스러져갔지. 옳든 그르든 간에 자신의 의지를 최대한 활용하여 선택하는 동료들을 보며 프랭클 박사는 이렇게 말했어.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 갈 수 있어도 단 한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갈 수 없다고 말이야. (ㄱ) 즉, 인간이 벼랑 끝에 몰려 서 있는 순간까지도 자유의지를 간직한다는 말이야.

심리학자들 역시 자유의지에 관심이 있어. 어떤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의지가 강하고 어떤 사람들은 약하대. 재미있는 것은 두뇌가 상해를 입은 환자나 혹은 정신병에 걸린 환자들의 경우 의지가 거의 작동하지 않다시피 하기도 한다는 거야. 뇌상이 생긴 이후로는 의지적으로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일들을 하지 않더라는 것이지. 난 이들의 문제에 이렇게 답을 할수 있어. 이성은 몸에 의존하는 것이라고. 이성 역시 초자연적인 영역에 속한다고 하나 여전히 자연을 딛고 작동하는 것이지. 따라서 이성이 작동할 수 있는 특정한 뇌의 부위가 파괴되었거나 손상을 입었으면 이성 역시 제대로 활약할 수 없게 되는 거야. 인간은 물질만이 아니요, 영과 혼과 육의 결합체라고 플라톤 선생부터 그렇게 주장해왔잖아?

자, 그렇다면 이 모든 난제들을 해결해줄 수 있는 초자연적 성질을 인간에게 부여함과 동시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질 수 있게 돼. 그 초자연적 성질이 주체성을 갖고 있기만 하다면 말이야. 난 인간이 주체적인 자유의지를 갖고 있다고 전제해. 그것이 기독교에서 전제하는 바야. 다시 말하지만 난 여기서 개인의 독립적인 자유의지의 존재와 타자간의 절대적 타자성에 대한 전제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중이야. 형이상학의 영역이기 때문에, 과학적 논증의 방법을 통해 증명할 수는 없지만 너와 내가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을 들어 전제를 뒷받침하고 있어. 두 번째 전제에 대한 설명은 이 정도로 마칠게. 다음 편지에서 보자.

(ㄱ) 죽음의 수용소에서, 빅터 프랭클 지음, 청아출판사, 1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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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편지: 기독교가 전제하는 것들 1 – 원죄

이론을 전개, 논증해나가기 위해서는 전제가 있어야겠지? 내가 공부하는 과학도 ‘보이진 않지만 자연법칙은 존재하며 그 법칙을 따라서 움직이는 물체가 존재한다’라는 전제에서 시작하니까 말이야. 기독교가 전제하는 것들은 무엇일까?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우리 인간에 대한 것부터 찾아보자. 참, 경고 하나. 내 전제는 자연과학적이지 않아. 그럴수가 없어.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아직 과학으로 다 설명하지 못하거든. 영혼이나 의식, 무의식, 그리고 자유의지 등은 우리 오감으로 측정할 수 없는 과학 외의 영역에 들어가. 법칙을 발견할 수가 없으니까. 뭔가 법칙이 있는 것 같더라도 그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측정가능한 물체들이 없기 때문에, 좀체 증명이 불가능하지. 게다가 반복적이지도 않다면… 휴, 과학이라는 도구가 이렇게 무력한 영역이 또 있을까. 뇌과학의 발전으로 인간의 사고에 대한 더 큰 이해가 있기를 기원하며, 이제 전제를 골라보자. 인문과학적인 걸루 말이야.

전제 첫번째, 우리 기독교는 ‘인간 혹 인간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고 전제해. 내가 심오한 철학적 전제들을 다 건너뛰고, 인간의 한계성을 바로 전제해 버린 이유는 이게 제일 가슴에 와 닿을 것 같아서야. 우리 삶을 한번 돌아보자. 세상을 바꿔버릴 것 같은 자신감으로 가득차서 의욕적으로 힘차게 살다가도 또 어쩔 때는 축 늘어져 슬퍼하고 절망할 때 있지 않아? 낙담하고 말이야.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고 외치지만 난 그 자리에 앉지 못한 열등감, 패배감. 건강이 나빠져 업무를 전폐하고 집에서 쉬기만 할 때의 무력감. 내 잘못은 전혀 없는데도 교통사고 때문에, 자연재해 때문에 사랑하는 이들을 잃거나 자신의 건강을 잃은 이들의 깊은 슬픔. 우리 내면은 또 어떻구? 우리 마음 속을 살펴봐도 우리 안의 추악한 이기심, 허영심, 교만함은 좀체 사라지질 않지. 심지어 선행을 가득히 한 날도 남과 나 스스로의 칭찬에 어깨가 으쓱해지며, 자고하는 마음과 남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허영이 슬그머니 마음 속에 들어오지. 그뿐이야? 우리는 결국 모두 죽어. 겨우 백년 남짓 살고 흙에 묻히지. 영원히 살지 못하고, 영원히 행복하지 못할 바에야 대체 우리 삶과 우리 업적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심지어 인류 모두가 백여년 이내 소행성 충돌 등으로 아예 멸망해버릴 수도 있다는데, 대체 인류의 삶이란 그럴 때 어떤 의미가 있는걸까? 성경 전도서에는 인간의 궁극적 한계와 우리 삶의 허무함에 대한 탄식이 가득하지. 지혜의 왕이라는 솔로몬은 노래했어.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과연 그 누가 모든 한계를 넘어서서 선을 이루고 구원을 획득할 수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난 그런 사람은 없다고 봐. 자, 난 지금 내 전제가 옳다는 것을 인문과학적으로 논증하는 중이야. 전제가 옳아야 논증이 의미가 있으니까. 참, 참고로 방금 얘기한 인간의 죽음은 과학적인 증거야. 자연과학은 분자생물학부터 기원해서 이걸 증명해주지. 모든 인간은 죽는다구. 모든 인간은 유한해. 모든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절대선에 다다를 수 없어.

구원은 무엇일까? 구원은 우리가 바라는 무엇이야. 항상 마음 편하고 행복할 수 있는 거라고 할까? 그러기 위해서는 구원이 이뤄진 사회는 공의로워야 할거야. 즐거워야 할거야. 사랑이 가득한 곳이어야 할거야. 그리고 그 사랑이 식지 않는 곳이어야 할거야. 영원해야 할 거야. 그래서 우리 존재 의미에 대한 물음이 주어질 때 “너무 좋으니까 영원히 살지요!”란 쾌활한 답을 항상 줄 수 있는 곳이어야 할거야.

이런 건 이상향에 불과하다고? 한낱 몽상에 불과하다고? 엄연한 자연법칙이 지배하는 적자생존의 세계에서 무슨 과욕을 부리냐고 묻는다면… 친구야, 잠시 그 몽상을 거부하지 말고 마음에 담아두라고 하고 싶다. 적어도 내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는 말이야. 부탁할게. 잠시만이라도 꿈을 가져보자구.

자, 요약하면 인간은 행복을 추구, 갈망하고 그것을 영원히 갖기를 소망한다. 그런데 신체적 정신적 한계로 인하여 인간은 그것을 스스로의 힘으로 얻을 수가 없다고 전제했어.

이 내재적 한계성을 기독교에서 뭐라고 하는지 알아? ‘원죄’라고 불러. 거부감이 팍 드는 익숙한 단어지? 뭐, 신학적으로 엄밀히 따지면 ‘원죄로 인해 우리가 깨닫게 된 창조물의 특성’ 또는 ‘원죄로 인해 창조물에 부과된 공의의 저주’쯤 되겠지만, 그냥 원죄라고 기억해 주어도 좋겠어. ‘죄’란 히브리 단어는 종류도 다양하고 뜻도 하나만 있는 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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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기독교인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서론)

나의 죽마고우에게,

각하야! 야, 일단 힘차게 별명 한 번 불러보자. 조만간 얼굴 맞대고 원없이 보겠지만, 막상 편지 형식으로 글을 시작하고 나니까 그리운 마음이 불쑥 솟는구나. 일찍부터 정치와 사회참여에 관심이 많았던 널, 난 저 어린시절 ‘각하’라고 불렀지. 가끔 손끝을 눈썹 가장자리에 착 갖다 붙이면서 말이야. 내가 네게 붙여준 그 별명은, 너의 괴짜다 싶을 만큼 조숙한 진지함을 살짝 비꼬는 동시, 역사의식과 사회의식이 투철한 너를 존경하는 내 마음이 담긴 것이라고 할까.

우린 함께 같은 대학에 입학했어. 난 교회를 한번 제대로 다녀보기로 했지. 깊게 기독교를 공부해 보고 싶었어. 그래서 기독교가 진리면 헌신, 거짓이면 다시는 교회 문턱에 발을 들여놓지 않겠다고 결심했어. 각오를 다지고 교회생활을 시작했고, 성경에 매료된 난 얼마 지나지 않아 소위 ‘예수님을 영접’한 기독교인이 되었지. 그렇지만 미성숙한 얼치기 신앙인답게 방황도 많이 하고 남에게 무례한 짓도 많이 했던 것 같아. 한 때는 성경이 이해도 안가고 받아들여지지도 않아서 벽에다 냅다 던져버린 적도 있었지. 넌 남들과는 좀 다른 대학생활을 보냈지. 비종교인으로, 그렇지만 다양한 사회서적을 섭렵하며 네가 고민하고 공부한 바를 실천에 옮겼어. 그러다보니 남들에 비해 대학을 좀 오래 다녔던 넌, 학부전공과는 조금 다른 인문학 분야에서 네가 가졌던 이상을 좀 더 구체적으로 구현해보자고 박사과정에 입학했지. 그렇게 대학 졸업하고 각자 다른 분야에서 일을 하고, 각자의 삶의 철학을 길러나갔던 것 같아. 우린 종종 만나서 서로의 생각도 나누고, 정치에 대한 담론도 가져보았지. 그런데 종교 부분은 그다지 깊게 얘기하지는 못했던 것 같아. 아무래도 ‘신앙’의 영역인지라 네가 나에게 상처를 줄까봐 질문도 아끼며 신중히 날 대해주었지. 무리도 아닌 것이, 신앙인들이 자기 생각으로 따져도 답이 나오지 않는 어려운 문제들은 ‘난 전능한 신께서 다 해결해 주실 거라고 믿어’ 하고 신앙으로 무질러 버리곤 하니까.

친구야, 종교 이야기를 다시 한번 해보자. 사실 우리 모두는 종교생활을 하는 거나 마찬가지야. 우린 모두 이성으로써 우리 스스로를 제어하면서 살거든. 각자 삶의 철학이 있고, 그것을 지키려고 노력하지. 늦잠 자려는 본능을 억제하고 일찍 일어나, 우리는 하루 몇 시간씩 일을 해. 설령 마음은 게임방에서 카트라이더를 실컷 하고 싶더라도 말이야. 남에게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화를 참고 인내하며 행복한 하루를 보내려고 노력하지. 그렇게 삶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삶을 이끌어나가는 방식도 달라질테고, 이 관점의 차이는 종교와 관련된 문제지. 종교를 가진 이는 그 종교에서 가르치는 세계관을 중심으로, 종교를 신봉하지 않는 이는 각자의 철학과 양심을 중심으로 삶을 대하지. 이것은 오랜 친구 사이에 나눠봄직한 주제인 것 같아.

친구야, 난 기독교 이야기를 다시 한 번 해보고 싶다. 카톨릭이나 개신교가 아닌 기독교 이야기. 그리스도교 이야기 말이야. 하지만 어려운 문제에 봉착했을 때 신께 문제를 툭 맡겨 버리는 무책임한 짓은 가능한 한 하지 않을게. 철저히 논리적이고 논증적으로 대화를 해보고 싶다. 너도 기독교에 대해서 궁금해 했잖아? 2005년 Adherents 통계로 21억명에 달하는 기독교인들. 그 중심에 세계 4대 성인 중 하나로도 추앙받는 예수. 창기와 세리와 함께 했다는, 그래서 혹자는 혁명가로 혹자는 humanist로 해석하는 그 분. 그렇지만 너도 성경을 읽어봐서 알잖아? 그 분 언행이 다른 성인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자고로 진리를 좇는 이라면 티끌보다 겸손해야 한다고 간디께서 말씀하셨고, 간디를 비롯한 많은 성인들은 자신들의 한계와 부족함을 겸손하게 드러내며 겸허하게 진리를 좇았지. 예컨대, 공자는 제자들의 질문에 모르는 건 항상 모른다고 답변하고 함께 고민했다고 해. 그런데 예수는 좀 특이해. 예수의 언행을 보면 나이 서른밖에 안된 젊은이 주제에 자기가 모르는 게 없잖아? 진짜 하나님의 아들인 양 행동했고, 타인의 죄를 감히 자신이 용서한다고 하질 않나(재판관도 아니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야기와 생각으로 가득찬 그는 심지어 자신이 죽다가 살아날 것이요 재림할 때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구름을 타고 내려온다고 했지. 자신만이 길이요 생명이라는 오만한 말도 했어. 천지는 없어져도 자기의 말은 없어지지 않는다고 못박기까지 했지. 게다가 로마의 압제에서 유대동족들을 구원하지도 못했고, 바리새인들의 부정과 부패를 말소하지도 못했으며, 유대민족 영광의 상징인 성전을 재건하지도 못한 그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면서 “다 이루었다” 라고 외쳤지. 그런데 과대망상가요 영웅주의에 가득 물들어 있는 그로 말미암아 기독교는 탄생했고 무서운 속도로 부흥했어. 유대민족의 메시아 요건-유대민족의 회복과 성전의 재건-을 하나도 만족시키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적잖은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 즉 메시아로 추앙받았어. 그는 그를 따르는 유대인들에게 메시아로 추앙받은 것도 모자라 지금은 그를 ‘주’로 부르는 세계인들의 메시아가 되었지. 그의 종교는 이천 년이 지난 지금도 세계 최대의 종교가 되어 중동인들 뿐 아니라 거의 모든 대륙에 광범위하게 퍼져버렸어.

온갖 사람들이 예수를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지. 자신이 원하는 인물상을 그려놓고 마음에 드는 언행만 골라서 예수를 자신이 원하는대로 짜맞추어 조형하곤 하지. 혁명가 예수, CEO 예수 식으로 말이야. 그렇지만 우리는 제대로 이야기해 보자. 대체 예수란 누구였고, 이스라엘 역사의 한 조각에 불과한 듯한 이 한 사람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된 기독교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우주의 창조로부터 인류를 포함한 자연의 구속(redemption)까지 아우르는 이 종교는 대체 무엇을 전제하고,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다음 사진을 봐 다오.

반기독시민운동연합이 게재한 버스 광고. '나는 자신의 창조물을 심판한다는 신을 상상할 수가 없다' 라는 아인슈타인의 말이 적혀있다.

반기독시민운동연합(이하 반기련)이 반기독교 광고문을 2010년 2월 5일부터 서울 시내버스에 게재했어. 기독교가 끼치는 해악이 궁극적으로는 기독교의 존재 그 자체에 있다고 여기는 분들이야. 일명 ‘개독 박멸’이라는 과업을 향한 활동의 일환이라 할 수 있지. 광고문을 보면,

나는 자신의 창조물을 심판한다는 신을 상상할 수가 없다 (아인슈타인)

(관련 기사: 반기독교 버스 광고 ‘4일 천하’로 끝났다)

와, 난 멋지다는 생각이 들더라. 한국기독교에 화가 날 대로 나신 분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저렇게 절제된 언어로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는지. 아인슈타인이 실제 이야기한 원문 “I cannot conceive of a God who rewards and punishes his creatures (나는 자신의 창조물들을 보상하고 처벌하는 신을 상상할 수 없다)”과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충분히 자신들이 따지고자 하는 바를 간결히 표현했다고 생각해.

그런데 이 광고에 대한 기독인들의 대응이 좀 실망스럽더라. 어떤 분들은 항의 전화를 하고, 해당 버스 회사 앞에서는 목회자들과 신도들이 항의 집회까지 했다고 하더라구. 게다가 위 기사에 따르면, 한국기독교총연합회 김운태 총무란 분은 “기독교 역사에서 반기독교 세력은 항상 있어왔지만 최근 들어 더욱 치밀하고 강도 높게 교회를 공격하는 경향이 있다”며 “이번 일과 관련해 명예훼손 소송 등 법적 조치까지 포함된 대응 방안을 마련할 계획”이라고 하셨다는군.

이것은 현재 민주주의 사회에 사는 우리 시대의 사회적 합의에도 어긋나는 것일 뿐더러 종교인으로서도 바람직한 행동이 아니지. 다시 말해,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는 우리 사회에서 당연히 허용되어야 할 행동을 실력행사로 억압했다는 것이 잘못되었고, 진리를 좇는 종교인으로서 열린 마음으로 언제든지 참진리 앞에 자신의 오류를 수정할 겸허한 태도가 없었다는 점, 그리고 타인에 대한 존중과 사랑이 엿보이지 않는 점은 비판받아 마땅하지. 존 밀턴의 사상과 표현의 자유에 관한 연구서 <아레오파기티카>(박상익 옮김, 소나무 펴냄, 1999)를 보면 이런 글귀가 있어.

진리와 거짓으로 하여금 서로 맞붙어 싸우게 하십시오. 자유롭고 공개적인 경쟁에서 진리가 패배하는 일은 결단코 없습니다. 진리의 논박이야말로 최선의 억압이며 가장 확실한 억압입니다.

자, 그렇다면 어떤 것이 옳은 대응이었을까? 반기련이 제기한 비판에 반론을 제공하면 되지 않았을까? 공개적으로, 기독교가 갖고 있는 교리를 최대한 보편적 언어로 묘사해서 말이야. 예컨대, 위의 반기련 비판에 대한 간단한 답을 해보자. 아인슈타인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어. 그는 인격적인 신을 믿지 않으나 조화로운 자연 법칙을 믿는 사람이었지. 저 인용문에서 아인슈타인이 따지려는 건 아마도 하나님의 속좁은 성품이 조화로운 자연법칙에 감히 끼어들 데가 없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었던 걸 거야. 창조주가 있다면, 어떻게 자기가 손수 만든 조화로운 창조물에 감정을 개입시키고 선악의 잣대를 들이대느냐는 거지. 엄연히 감정과 무관한, 그리고 선악과 동떨어진 완벽한 자연법칙이 존재하는데 말이지. 설령 신이 만들었다고 한들 자연법칙에 의해 완벽하게 운용되는 자연에 그가 간섭할 데는 어디며 또한 자신이 직접 초래한 것을 무책임하게 심판하여 벌 주는 권리는 어디 있냐는 물음이기도 할거야. 음, 정말 좋은 비판이야. 그럼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짧게 해볼게. 심판을 해야만 하는 신을 한번 변호해 보자구. 반기련이 이 인용문을 통해서 제기하려는 비판을 내가 잘 해석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변론에 앞서 인용문을 다시 한 번 적어볼게.

‘나는 자신의 창조물심판한다는 신을 상상할 수가 없다’.

자, 그럼 저 인용문에서 먼저 ‘창조물’이란 무엇인지 살펴보자. 창조물이 어떠한 것인지 파악해야 왜 신이 굳이 자신이 직접 손수 만든 것을 재판에 회부해야 하는 지 알 수 있거든. 게다가 창조물은 우리를 포함한 우리 주변의 것들이라 특성을 파악하기가 용이해. 형이상학적인게 아니야. 보고 만질 수 있는 형이하학적인 것들이라구. 그럼 우리가 무생물이라고 부르는 창조물부터 살펴볼까? 글을 쓰는 내 책상 위의 노트북, 컵, 펜, 책들이 먼저 눈에 들어오는구나. 눈을 돌려 창 밖을 보니 햇살이 나무와 건물들을 비추고 있고, 바람이 불고 있어. 바람을 바라보니 유체역학을 전공한 나로서는 나비에-스톡스(Navier-Stokes) 방정식이 머리에 먼저 떠오르는구나. 연속체(Continuum) 가정만 성립한다면야 흐르는 공기는 위 방정식에 의거한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매우 정밀하게 움직임을 묘사, 예측할 수 있어. 그리고 주변의 물체들은 전부 중력을 받네. 만유인력의 법칙이란 물체들이 왜 아래로 힘을 받는지 설명하는 매우 훌륭한 공식임이 분명해. 노트북을 볼까? 전력을 공급받은 회로의 복잡한 입출력 작동으로 인해 훌륭하게 내가 쓰는 글을 화면에 보여줘. 우리 보기에 무생물들은 분명 자연법칙에 완벽하게 복종해. 우리 인간이 이성적 추론으로 논증한 정리들, 즉 자연법칙들에게 말이야.

자, 그럼 이번에는 이성적 추론을 활용하여 훌륭한 자연법칙을 발견한 동물인 사람을 한번 살펴보자. 기독교에 따르면 역시 창조물이야. 그런데 이 창조물은 무언가 독특해. 자연체계에 속해 있으면서 마치 자신은 자연과 독립된 개체인 마냥 자연을 관찰하고 자연을 판단하며 자연을 지배하거든. 자연을 보고 풍경화를 그리고, 사진과 동영상을 찍으며 무엇이 좋다 아름답다 평가를 내리기까지 하지. 게다가 자연을 조작하고 통제하기까지 해. 댐이나 저수지를 만들어 자연적이지 않은 무엇을 창조하기도 하고 그 안에서 양식업을 해서 생선을 길러먹지. 자연상태에 있으면 경쟁적이고 공격적일 동물들을 사로잡아 동물원에서 길들이기도 하고 심지어 애완동물로 거듭나게 하기도 하지. 위키피디아에서 ‘사람(human)’으로 검색을 해 보면, 사람은 다른 생물들에 비해 월등하게 발달되었다고 여러 번 강조가 돼. 두 발로 걷는 탓에 두 손이 자유로운데다가 지적능력이 매우 뛰어나서 여느 동물에 비해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도구를 만들어 사용할 수 있어. 특히, 사람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이해하고 그에 대해 영향을 끼치려는 욕망이 있어서 각종 자연 현상을 설명하고 다루려고 해. 과학, 철학, 신화, 종교 등을 활용해서 말이야. 이러한 본성은 도구와 기술의 발전을 이끌었어. 인간은 유일하게 불을 다루고 음식을 요리하며 옷을 입고 그 밖의 수많은 기술들을 사용하는 종으로 알려져 있지.

자연주의자라 불리는 철학자들은 이렇게 주장해. 세상은 자연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말이야. 신적인 존재는 없다고 생각하지. ‘우주=자연’이야. 따라서 인간도 다른 생물과 별로 다를 게 없는 자연의 일부이며 진화의 산물이라고 주장해.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 역시 자연법칙을 따르는 원자들의 조합에 의해 탄생된 물질 덩어리야. 그리고 인간의 감정을 비롯하여 이성적 추론 능력, 의지 등은 모두 자연스럽게 진화에 의해 발생한 것이라고 설명하지. 어때? 우리가 암암리에 상상했던 익숙한 주장이지 않아? 우리의 조상은 원숭이라고 생각하는 것 말이야. 진화에 진화를 거듭해서 두뇌가 발달하고 두 발로 서서 걷기 시작했던 원숭이는 결국 유인원을 거쳐 인간이 될 수 있었어. 그래, 좋아. 우리 인류는 원숭이로부터 진화해 왔을 수 있어. 진화론에는 별로 토를 달지 않을게. 진화론을 수용하는 그리스도인도 무수히 많거든. 지금까지 발전된 신학에 따르면 진화론이 기독교와 상충되지도 않고 말이야. (참, 진화론이 생명의 기원을 설명할 수 있다는 부분은 예외야. 생명의 기원만큼은 어떤 자연주의적 이론도 뾰족한 설명을 내놓지 못하고 있지)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순전히 자연적인 결과, 물질적인 결과에 의해 비롯된 것이라는 관점은 난점이 있어. 독특하게도 우리 인간은 자연스럽지 않은 특징들이 있거든. 자연스럽게 진화했고,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스럽기 그지없어야 할 인간인데 이상하게 자연스럽지 않아. 인간적이야.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인간은 바로 선악을 판별하고 이성적으로 생각, 행동하기 때문이야.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우리는 자연스러운 것임에 마땅한 일들에 대해 선악적 기준을 들이대고, 자연스러운 우리의 본능을 이성으로 통제해. 살의가 들어서 사람을 죽였을 뿐인데 우리는 살인자를 매우 악하다고 판단해. 게으름과 이기심을 이겨내며 살고, 때때로 친구를 위해, 대의를 위해 소중한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기도 하지. 대체 이러한 인간의 특질들을 자연주의가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 한 번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인간만이 수행할 수 있는 능력 중 하나인 이성적 추론부터 살펴보자. 이성적 추론이란 간단히 말해 결과에 대한 원인을 찾아내는 능력이야. “왜?”란 질문에 “왜냐하면…”으로 시작하는 답을 마련해주는 능력이지. 우리는 바로 이 능력에 기대어 ‘지식’ 혹은 ‘앎’이란 것을 얻을 수 있어. 불을 사용할 줄 알았던 우리의 조상님들을 상상해 보자. 산불이 되었든 번갯불이 되었든 우리 조상님들은 불이 생기는 과정을 관찰하셨어. 불이 생기는 것을 보시고 “왜?”라는 질문을 수없이 던지시며 그 이유를 조금씩 깨달아가셨지. 결국 불이란 나무 같이 불이 잘 붙는 물질이 높은 온도에서 공기와 만날 때 발생한다는 것을 깨달으셨어. 득도하신 거였지. 그분들은 그 과정을 이해한 뒤 모방하기 시작하셨어. 일단 바람을 막기 위해 옹기종기 여럿 모여 앉으셨지. 그 후 나무판 위에 짚을 얹고 뾰족한 나무막대를 그 위에서 손으로 비비며 빠르게 돌렸어. 나무판과 나무막대 끝 사이에 발생한 마찰열은 발화점 이상으로 온도를 올릴 수 있었고, 결국 불은 우리 인간이 활용 가능한 것이 되었지. 그렇게 불이 생기는 원리, 불을 발생시키는 기술은 조상님들의 ‘지식’이 되어 후손에게 전수되었어.

자연주의자들의 주장대로라면 인간의 모든 능력이란 진화의 산물이야. 이성적 추론을 수행하는 능력도 예외가 아니지. 그리고 인간의 생각과 행동 모든 것은 자연법칙에 순복하는 인과의 산물이 되어버려. 순차적으로 벌어진 자연현상에 불과하다구. 임의성이 있다고 한들, 모든 것은 자연법칙에 의해 처음부터 정해진 결과물에 불과해. 그들에 따르면 지금 내가 네게 편지를 쓰는 행동도 모두 우주 태초부터 미리 정해진 것이야. 내가 지금 점심으로 설렁탕을 먹을까 초밥을 먹을까 고민하는 것도 우주 태초부터 정해져 있던 거라구.

그들에 따르면, 우리 조상님들이 깨달으신 것 역시 순차적으로 일어난 자연스러운 현상에 불과해. 그리고 우리가 경험하고 반응하는 것이 자연현상에 따른 것이라면, 우리가 느끼는 모든 것은 ‘옳은’ 것이 되어버려. 자연법칙에 어긋난 게 없잖아? 우리는 보고 듣고 만지고 느꼈을 뿐이거든. 불을 오감으로 느끼신 여러 조상님들을 상상해보자. 어떤 조상님들은 면밀한 관찰 끝에 불이란 것이 일종의 화학작용이고, 재생산 가능한 것이라고 느끼셨지만, 어떤 분들은 그렇지 못했어. 어떤 조상님들은 불이 신이라고 느끼셨어. 모든 것을 태워버리고, 죽일 수 있는 강렬한 존재, 두렵고 초월적인 존재라고 말이야. 어떤 분들은 불을 영적인 것으로 보셨어. 이리저리 나무들에 옮겨 붙으면서 이동하고 퍼져가는 불을 보며 어떤 영적인 실체로 여기셨지. 어떤 조상님들은 불이 화학적인 현상이란 것을 알았지만, 공기 따위는 필요없고 나무와 온도에만 의한 것이라고 느꼈어.

자,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해. 자연주의자에 따르면 모든 조상님들의 생각은 하나같이 옳아. 자연법칙에 철저하게 순복한 결과가 되거든. 느낀 대로 표현하셨을 뿐이야. 그런데, 정말 모든 조상님들의 생각이 옳은 걸까? 아니야,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걸 뚜렷이 알고 있어. 우리는 어떤 주장은 옳고 어떤 주장은 그르다는 것을 알고 있지. 불에 대한 지식을 전수해주셨던 조상님들 역시 어떤 주장은 옳고 어떤 주장은 그르다는 것을 알고 계셨어. 불은 신이 아니고, 영적인 실체도 아니며, 불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타는 물질과 온도 뿐 아니라 공기도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계셨어. 그래서 그 옳다고 논증된 ‘지식’을 우리 후손들에게 가르쳐 주실 수 있었어.

자연주의자들의 주장은 여기에 큰 난점이 있어. 그들의 주장을 따르면, 우리가 ‘지식’이란 것을 도무지 얻을 길이 없게 된다는 것이야. 모두들 그렇게 ‘느낄’ 뿐이라면, 모든 느낌은 정당한 것일 뿐더러 어떤 느낌이 옳은지 도무지 판단할 수가 없어. 모두 A→B→C 의 과정을 거쳐 얻은 것이 되는 거지. 자극에 대한 반응에 불과한 것이야. 그러나 지식은 그렇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야. ‘지식’이란 순서에 맞춰 진행되는 인과관계에서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며 “왜?”란 질문을 던졌을 때 비로소 얻어질 수 있는 것이야. 논리학에서 이를 ‘귀결’이라고 부르지. 다시 말해 C←B←A 의 과정을 설명해내었을 때에만 우리는 옳은 ‘지식’을 얻을 수 있는거야. 왜 C가 A와 B 과정을 순차적으로 거쳐야만 했는지, B가 아닌 다른 것으로는 왜 C가 귀결될 수 없는지를 설명해내야만 우리는 비로소 ‘지식’을 얻었다고 할 수 있어. 충분한 이유가 없으면 어떠한 사실도 생겨나지 않으며, 어떤 판단도 참된 것이 못된다는 것. 어려운 말로 충족이유율(Principle of Sufficient Reason)이라고 하지.

그러나 그 C←B←A 과정을 설명해내기 위해서는 외부의 관찰자가 필요해. A→B→C로 진행되는 대상의 과정을 살필 수 있는, 그리고 왜 A가 B를, B가 C를 초래할 수 있는지 설명할 수 있는 옳음과 그름의 기준을 가진 관찰자 말이야. 그런데 자연주의자들에 따르면, 우리 인간 모두 자연의 일부로서 모든 생각과 행동이 A→B→C 로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는 소위 귀결의 논증과정을 수행할 수 없어. 다시 말하면, 우리에 의해 자연법칙이 옳다는 것은 절대 증명될 수 없어. 우리 생각과 행동 모두는 자연법칙에 종속된 것이 되기 때문에, 자연법칙이 옳다 그르다 판별할 수가 없지. 일찍이 영국의 진화생물학자인 J. B. S. Haldane 교수(ㄱ)는 이것을 간파했어. 그는, 우리의 뇌가 원자들로 구성되었고 우리의 정신 활동은 모두 뇌 속 원자의 운동에 의해 결정된 것이라면 우리가 갖는 소신, 혹은 이성적 추론이 옳은 것이라는 어떠한 이유도 우리는 갖지 못하다고 이야기했어(ㄴ).

만일 A→B→C를 보면서 C←B←A를 추론해 낼 수 있는 관찰자가 자연의 바깥에 존재한다면, 그 관찰자는 비로소 지식을 얻을 수 있어. 그런데 어때? 우리가 익히 하고 있는 것들 아니야? 맞아, 우리 인간은 자연의 일부임에도 불구하고 그 관찰자 역할을 해낼 수 있어! 바로 우리의 신비한 정신세계에 의존해서 말이야. ‘이성’ 말이지. 만일 우리 정신이 자연의 바깥에 존재하여 자연의 필연적 귀결을 인식한다면 인간의 이성적 추론은 비로소 타당성을 가질 수 있어. 정신을 심판자로 둔 상태에서 우리는 진정한 통찰을 가질 수 있고 지식을 축적할 수 있는거야. 그러나 이러한 통찰이 단순히 우리 정신 안의 느낌에 불과할 뿐, 우리 너머의 실재들에 대한 객관적 인식이 아니라면 우리는 지식이라는 것을 가질 수 없게 돼. 자연주의자들 관점에 의하면 우리가 축적한 과학 지식도 우리의 사고활동이 타당한 것이라는 것을 믿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뤄진 것이 되거든. 다시 말해, 자연주의 관점에 의하면 우리가 밝혀낸 자연법칙이란 건 전혀 타당성을 보장받지 못하는 것이 돼. 그뿐이야? 삶의 의미 따위는 더더욱 찾기 어렵게 돼. 인간의 사유와 행동이 모두 프로그램된 로봇의 그것과 같다면, 그저 자극에 따른 인과적 반응에 불과하다면 어떻게 인간의 삶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겠어?

이런 난점 때문에, 우리는 자연 너머에 있는 무언가가 자연과 연동하여 작동하며 이성적 추론을 일으킨다는 관점을 선호해. 자연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야. 그래서 자연 너머에 실재하는, 그래서 자연을 자연 바깥에서 통찰하고 자연에 의미를 부여하는 초자연적인 존재가 있다는 거야. 그럴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갖는 ‘느낌’이 옳은지 그른지 여부를 심판할 수 있고, 따라서 ‘지식’을 축적하며, 삶의 의미까지 적극적으로 찾을 수 있게 돼. 그 능력은 전적으로 인간이 갖고 있어. 인간의 마음 안에 있는 능력이야. 그렇다면 우리 인간은 자연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결합된 창조물이란 결론에 이르게 돼. 자연과 초자연이 결합된 창조물. 몸과 영혼이 결합된 창조물. 자연과 이성이 결합된 창조물이 되는 거야.

이성이란 자연법칙에 인과관계로 복종되지 않아. 그리고 오히려 자연에 영향을 끼쳐. 그러나이것은 인간의 이성이 자연과 절대적으로 독립하여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야. 이성은 두뇌가 있기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지. 그리고 이성의 동작은 자연법칙 너머의 초자연적 실체의 조명을 받아 일어나는 것이야. 자연스럽게 자연법칙과 섞이되 필요한만큼 자연법칙에서 해방되어 초자연적 실체와 교감한다는 말이야. 그렇게 이성은 자연 위에 군림할 수 있어. 이성을 가진 두뇌는 두뇌 이상이 무엇이 되지. 우리는 이성을 사용하여 자연을 지배해. 우리는 노트북을 정교하게 만들어서 테이블에 올려놓았어. 자연적인 현상만 있었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야. 인공적인 일이야. 맥도널드에서 감자튀김을 한 봉지 더 시켜 먹으려는 자신의 식탐을 통제해. 역시 자연스럽지 않은 일이야.

자, 이렇게 이성이 존재한다고 했을 때, 모든 인간은 서로 다른 각각의 이성을 소유한다고 가정할 수 있어. 실제 모든 사람은 다 제각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잖아? 자, 여기서 ‘자유의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모든 인간은 자신만의 ‘자발적인 의지’에 의해 행동해. 그 개인의 이성과 의지는 자연과 어느 정도 독립되어 있어. 그뿐 아니라 이성을 불 붙여버린 어떠한 초자연적인 실체로부터도 독립되어 있어. 개인의 의지란 고유한 것이며 타인이 침범할 수 없는 곳이야. 그러나 의지의 사용이 잘못 되었을 때 타인 또는 환경에게 해를 가할 수도 있어. 그럴 때 그 악행은 타인의 이성에 의해 판단을 받아. 그리고 그것은 모든 이성을 초월한 탁월한 신적 존재에게서 절대적으로 공평한 판단을 받게 돼. 기독교에서는 이런 신이 존재한다고 믿으며 그를 ‘하나님’이라고 부르지. 공의로우며 그름의 여지가 전혀 없는 정확한 이성의 소유자. 하나님. 그리고 그에 의해 이뤄지는 심판. 이것이 곧 기독교에서 말하는 ‘심판’이야. 현대사회에서 죄인들은 재판에 회부되어 형벌을 받잖아? 우리는 그만큼 이성적 판단에 타당성을 부여하고, 그에 따라 선악을 분별하며 정의를 세우기 위해 노력해. 만일 자연 너머에 있는 초자연적 존재자가 창조주라면, 자신이 창조한 자연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항상 노력하지 않겠어? 만일 우리에게 부여된 특권, 자유의지에 의해서 악이 발생한다면 그것은 심판을 받고 선으로 탈바꿈되어야 마땅해. 따라서 이성 위의 이성, 자연 위의 자연이라 할 수 있는 ‘신’은 그만이 가질 수 있는 공의를 바탕으로 심판을 수행하며 약자를 악에서 구원하고 선을 회복시킬 거야. 신은 무턱대고 자연의 모든 것을 심판하지 않아. 그가 자유의지를 부과했기 때문에 악으로 부패될 수 있는 독립된 창조물에 대한 심판을 수행해.

심판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해볼게. 우리는 심판이란 단어를 들으면 법원에서 판사가 피고에게 내리는 판결을 떠올려. 아울러 피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죄의 중량에 비례하여 그에게 부과되는 형벌을 떠올리지. “징역 3년, 집행유예 2년!” 등의 선고 말이야. 죄인은 죄값을 돈으로 치르거나, 참회의 기회를 얻기 위해 사회봉사를 강제로 떠맡게 되거나, 혹은 감옥에 갇혀 살게 돼. 그런데,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심판이 과연 이런 모습일까? 구약성서에 보면 여호와의 심판이 속히 임하길 바라는 탄원의 글을 여럿 찾을 수 있어.

“하나님이여 일어나사 세상을 심판하소서.” (ㄷ)

“세계를 심판하시는 주여 일어나사 교만한 자들에게 마땅한 벌을 주소서.” (ㄹ)

유대인들은 왜 만인이 두려워하는 심판을 그토록 갈구했던 것일까? 그것은 그들이 꿈꿨던 재판은 민사재판이었기 때문이야. 지주에게 수탈당했던 농민으로서, 피지배계급으로서 또는 주변강국으로부터 핍박받은 약소국의 국민으로서 그들은 억울함을 풀어주고 피해를 보상해달라고 신에게 탄원했어. 약자가 당한 설움을 누구에게 호소해야 하지? 정의는 어디서 회복될 수 있는거지? 힘이 없고 지식이 없어 당하기만 했던 그들은 절대적 힘과 지혜를 소유한 심판관을 애타게 불러. 우리 사회의 약자들, 현대사회에서도 공평한 취급을 받지 못했던 모든 일들은 심판받아 바로잡혀야만 해. 우리 현대인에게도 공평한 민사재판은 필수적인 것이야. 혹 이 글을 읽는 이들 중에서도 기독교인들이 자행한 죄악 때문에 상처받은 이들이 있다면, 바로 그 기독교의 신이 올바른 심판으로 원고의 억울함을 풀어줄 거야.

그리고 기독교에서 그려내는 심판은 현대사회의 심판과 사뭇 달라. 현대 재판에서 선고가 내려지면 피고에게는 그의 의지에 무관한 강제가 행해져. 그러나 신의 심판은 그렇지 않아.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경우, 죄인을 지옥에 ‘집어넣지’ 않아. 죄인이 지옥에 거하도록 ‘허락’하지. 창조주는 자신이 만든 창조물에 부과한 자유의지를 자신마저 침범할 수 없는 불가침의 영역으로 만들어 두었어. 피조물의 선택은 두가지야. 천국 아니면 지옥이지. 천국은 피조물이 의지를 스스로 포기하고 창조주와 관계를 회복하는 장소야. 창조주와의 관계 회복은 곧 사랑이라는 질서에 순응한다는 뜻이야. 모든 피조물의 생명의 근원 되는 초자연적인 존재, 사랑 그 자체인 창조주와의 관계 회복을 통해 피조물은 구체적이고도 실재적인 영원의 무엇으로 거듭나. 지옥은 그것을 거부하는 곳이야. 피조물이 창조주를 거부하는 이상, 창조주는 그의 의지에 아무런 강제를 가할 수가 없어. 그가 내리는 심판은 간단해. “네 원하는 대로 하거라.”

CS 루이스는 그의 책 ‘천국과 지옥의 이혼(김선형 옮김, 홍성사 펴냄, 2009)’에서 신의 심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어.

세상에는 결국 두 종류의 인간밖에 없어. 하나님께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라고 말하는 인간들과, 하나님의 입에서 끝내 ‘그래, 네 뜻대로 되게 해 주마’ 라는 말을 듣고야 마는 인간들. 지옥에 있는 자들은 전부 자기가 선택해서 거기 있게 된 걸세. 자발적인 선택이라는 게 없다면 지옥도 없을 게야. 진지하고도 끈질기게 기쁨을 갈망하는 영혼은 반드시 기쁨을 얻게 되어 있네.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95쪽)

답변은 여기까지야. 답변이 좀 길었지? 질문이 워낙 좋지만서두 대답하기 난해한 ‘심판’에 대한 것이다보니 간결하게 좋은 대답을 하기가 참 힘들구나. 요약하면, 신은 무턱대고 아무 창조물이나 심판하지 않아. 창조물 중에는 자연의 일부임에도 불구하고 자연을 초월하는 능력, 즉 이성적 능력을 지닌 인간이 있어. 인간은 독립된 이성을 바탕으로 자유의지라는 특권을 누리기 때문에 악으로 부패할 수도 있어. 신은 이 인간에 대한 것만 심판을 수행해. 특히 이 재판은 형사재판과 더불어 민사재판이기도 해. 불의에 의해 고통을 받은 창조물들의 억울함을 풀어줘야만 하지. 잘못된 것은 바로잡혀야만 해. 공의를 위해서라면 반드시 수행되어야만 하는 심판인 것이야.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창조물을 심판하는 신을 이해할 수 있을 뿐더러, 그 심판을 바라기까지 하지.

반기련이 제기한 물음에 대한 답이 얼마간 되었는지 모르겠구나. 그렇지만 내가 바라는 것은 이렇게 문답이 오가는 것이야. 공개적인 토론을 통해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서로에게 배울 수 있으며, 그렇게 함께 진리에 다가갈 수 있을거야.

실은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부분도 이거야. 우리는 종종 신문에서 교회 내외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기사들을 보게 돼. 그런데 아쉽게도 현상에 대한 보도와 비판이 주를 이룰 뿐, 그 현상의 근본적인 원인에 대한 깊은 고찰과 토론이 거의 없더라구. 많은 경우, 그 사태의 발단을 거슬러 올라가면 기독교인들 스스로 기독교를 잘못 이해해서 벌어진 일인데 말이야. 종교인들의 행태는 그들이 믿는 교리와 신앙에 기반하기 마련이야. 특히 열심이 가득한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더욱 그러하지. 행동지침에 따라 움직이는 병사와 같다고 할까? 그렇다면 그 행동지침의 잘잘못을 따져야지, 그를 믿고 수행할 따름인 사람들을 쥐고 흔든다구 뭐가 바뀌겠어? 만일 그 행동지침을 이해한다면, 모 행동경제학서적 제목처럼 ‘Predictable irrational’이 될거야. 대응책까지 마련할 수 있다는 이야기지.

행동지침에 해당하는 기독교의 교리. 그 교리에 대한 진솔한 소통을 했으면 하는 바램이 있어. 신학자, 종교학자, 목사들이 더 나서서 대중의 눈높이에 맞추어 깊고 넓게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해. 그런데 인터넷에서 그런 글들을 거의 보질 못한 것 같아. 물론 복음과 상황 같은 잡지, 기독교 전문웹사이트, 종교서적들에는 풍성한 자료가 있지. 그런데 그 자료들이 많은 기독교인들에게도 미치지 못함은 물론, 일반인들에게도 전달이 충분히 안되는 것 같아. 그래서 그냥 답답한 마음에, 내 개인 필요도 있으므로 글을 써보기로 했어. 그리고 난 터놓고 ‘기독교란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 내가 이해한 기독교의 교리, 즉 기독교인들이 갖는 삶의 철학과 그에 따른 행동지침을 나누어 볼거야. 이걸 나누는 것이 너와 나, 그리고 또우리 이야기를 함께 보는 다른 이웃들에게 조그마한 도움이라도 되기를 기대해 본다. 또한 너와 함께 삶에 대해서 고민하고 토론하는 좋은 기회가 되리라 기대해. 모쪼록 마음을 담은 비판과 조언, 부탁할게.

그럼, 이만 줄일게. 다음 편지에 보자.

(ㄱ) 1892-1964. 영국의 유전학자, 진화생물학자

(ㄴ) «가능한 세상들 Possible Worlds», 209쪽

(ㄷ) 시편 82:8

(ㄹ) 시편 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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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에 대한 믿음 – 2. 하나님 용서하기

1. 칭의에 대한 재정의

2. 고통의 유용성? – 재미, 감동, 긍정을 긍정하는 부정…??

2. 하나님을 용서하기 – punishment로서의 고통

이제까지 고통에 대한 신념의 역할에 대해서 논하였습니다. 회복의 시작이 되는 믿음. 그리고 고통의 경험이 이해되어지면서 자신이 갖게 되는 새로운 신념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였습니다. 고통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서 비롯되고 공동체에서 책임져야 하는 것이라고도 하였고, 그러나 회복은 공동체에서 돕되 마취 수준에 그쳐야 한다는 것도 이야기하였습니다. 고통에서 회복하고 고통에서 벗어나는 그 모든 것의 과정에는 신념이 자리한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지식을 얻었습니다. 슬픔은 지식이고, 고통은 앎입니다. 저는 여기서 한 가지 특별한 믿음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종교적 믿음, 그 중에서도 기독교의 믿음입니다. 바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고통을 허락하는 선한 신을 변호하려는, 흔해빠진 변신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거냐.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믿다가 격한 고통 때문에 하나님을 용서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서 이 장을 준비했습니다. 무신론자나 불가지론자가 유신론자가 되는 것은 상대적으로 좀 낫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없는 옵션이 추가되어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신론자가 신을 잃는 것은, 그 자체로 고통스런 일입니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무엇에 대한 모든 것의 열쇠를 신에게 맡겼는데, 만일 신이 없다면 나는 죽음, 타인, 사랑, 미래, 삶의 의미 모든 것을 재정의해야 합니다. 바울이 말한 바, 우리는 불쌍한 자가 됩니다.

저는 두 가지 기준은 분명히 세워놓고 시작하고자 합니다. 천국과 지옥입니다. 그리고 절대선과 사탄. 예수의 음성을 아는 양과 그렇지 못한 양. 우리를 넘어 양에게 다가오는 늑대들의 존재. 선과 악 두가지 기둥을 분명히 박아놓고 논의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돌이켜보건대 악은 실존하기 때문이요, 악에 대한 하나님 심판의 엄정성은 이미 자신의 아들마저 십자가에 못박는 결의한 태도로 자명해졌습니다. 사탄의 목소리를 듣거나 사탄에 빙의된 사람을 볼짝시면, 사탄의 존재를 부인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성령과 사단이 우리의 의식에 잇닿아 있어 감각할 수 없이 우리와 교감하는 존재일 수도 있기에, 그들의 존재가 전혀 비과학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초자연적인 요소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아니면 아예 영혼이 존재한다면 성령의 존재와 더불어 사탄의 존재는 우리와 공존하며 서로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입니다.

1. 칭의에 대한 재정의

2. 하나님 용서하기

기대를 가지고 이 장을 읽기 시작하셨다면 여러분이 겪고 계신 고통은 순수한 정서에 가깝다는 것을 먼저 인지하시기 바랍니다. 흥미, 즐거움, 놀라움, 공포, 분노, 수치심, 모욕, 역겨움 등 정서를 느낄 때의 뇌의 기작과 다를 바가 없다는 말입니다. 사실 누가 분류한 정서의 종류에는 고통이 들어가며,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몇몇 과학자들은 고통이 감각의 인지가 아닌 순수한 정서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당연한 것은, 여러분이 고통을 느끼는 것은 올바른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아프게 하는데 아프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으며, 생떼같은 자식을 잃은 부모를 잃었는데 슬프지 않을 부모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이성을 잃는 분노. 고통도 마찬가집니다. 이성을 찾도록 도움을 주는 글입니다. 즉, 진통제 혹은 안정제와 더불어 이성을 잡아주는 글도 함께 적어보겠습니다.

통증이 특별히 과한 이유. 고문하는 하나님. 이걸 믿어! 하나님이 원하는 신념은 머리로만 믿는 게 아닌 것 같다. 지식에 대한 것이라면, 잘 배우면 될 일이다. 맞다 틀리다. 그러나 좋다 나쁘다의 개념. 선악의 개념. 사랑이 머리로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일지. 내가 너를 사랑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때려서 교육하는 거라고? 그 이상의 의미는 없을까? 근데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확실히 그러하다. 사랑의 대가는 가혹합니다. 그리고 제가 보기에 심한 고통을 겪는 일부를 보면, 남을 위해 사용될 무엇만 같습니다. 혹 고통을 통해 하나님을 믿는 이가 있다고 합시다. 당신과 비슷한 고통을 겪을 때, 그가 일어나는 것이 혹 당신을 위해서인지 어찌 압니까? 예수의 고통이 당신을 위한 것이란 것을 어찌 알았습니까? 듣고 안 것이 아닙니까? 예수의 십자가 고통은 제자들로 하여금 그보다 더한 고통도 견뎌낼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냥 정치범으로 몰려 죽은 것으로 보인 그야말로 실패의 죽음이, 그리될 지 누가 알았단 말입니까?

하나님의 침묵. 그것은 고통받는 당신에 대한 믿음일지도 모릅니다. 왜 배신이 아닌지 나서서 설명해주면 될 일을 그리도 침묵으로 일관한단 말입니까? 음~

아무도 의식적으로 ‘아파하지’않는다의 무엇. 고통당할 뿐이다.

답해야 할 질문들:

– 고통이 선을 초래하는가 악을 초래하는가? 악을 초래하는 고통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고통이 최종적으로 선을 위해 기능하는 것이라면, 아무리봐도 쓸데없는 고통은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죽음이 선을 초래하는가 악을 초래하는가? … 같은 질문 물어보기

엄청난 통증이 몰려올 경우, 죽음을 꿈꾸는 것은 당연합니다. 죽음보다 더한 고통. 그렇습니다.

 

 

이 장에서는 큰 딜레마를 다룰 생각입니다. 불의의 고통이 편만한 세상에서 나는 좋으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가.

하나님은 어찌 이러실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에 대한 분노와 불만, 원망과 실망, 저주와 살의에는 모두 하나님에 대한 배신이란 기저가 깔려 있습니다. 배신. 신념을 배반한다는 것. 그러나 우리는 한 가지 자문해야 합니다. 누구의 신념이란 말입니까? 그 신념이 진리라도 된단 말입니까?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고통은 안타깝게도 크던 작던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조정하는데 사용됩니다. 우리가 죽음 앞에 겸손해야 한다면 고통 앞에서도 그리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만드신 사랑의 질서를 지키면 현세의 고통이 사라진단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마저도 친히 십자가의 고통을 지셔야 했던 곳입니다. 주님의 열두 제자마저도 극심한 고통을 맞으며 세상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고통을 남을 위한 사랑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다릅니다. 사랑은 악으로 빚어진 고통마저도 아름답게 승화시킵니다.

여러분, 죽음이 선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어떤 면에서는 고통이 죽음보다 더 악합니다. 그야말로 의미없는 고통, 미치는 고통, 의인이 악인되는 고통. 우리가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는, 죽음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이란 권세 앞에 무력한 우리는 죽음에 대한 운명을 내면화하고 대신 자신이 원하는 죽음을 맞게 해 달라고 신과 타협합니다. 그렇기에 자신이 원하지 않는 죽음을 경험할 때 고통하는 것입니다. 변신론이 성공할 수 없는 이유는 자명합니다. (고통은 미지의 것이 아니로되 미지의 죽음보다 강력합니다. (통계 사용) 자살하는 이들을 보면 자명합니다. 이들이 신념이 약해서 자살합니까? 좋습니다. 그렇다면 그 고통은 누구의 책임입니까? 그것은 우리 모두의 책임입니다. 고통에 몰려 죽음에 이르는 이들을 한명도 남김없이 구할 수 없다면, 우리는 고통에게 영원히 패배하는 것입니다.)

믿으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여전히 어찌할 수 없는 것들로 인하여 우리는 고통을 받습니다. 태어남, 죽음, 자연, 지식의 부족, 미래, 과거, 통증, 타인 등등.

죽음은 무엇이 극복합니까. 완전한 자아의 소멸에 대한 두려움은 무엇으로 극복합니까. 믿음과 소망입니다. 자연은 지식으로 얼마간 극복할 수 있으나, 여전히 우리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며, 자연재해, 전염병, 유전병, 암, 바이러스, 질병,

재미 – 스릴, 고통을 이기며 느끼는 쾌감. 쾌락. 경쟁에서 이기는 짜릿한 기분. 유머는 조금 기분이 고조된 상황, 그래서 마음이 쉽게 상하지 않는 상태, 그 긴장 사이를 유연하게 파고들며 예의를 어길 때 발생합니다. 몸으로 웃기는 유머는 남에게 판단받거나 놀림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무릅쓰고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용서될 뿐더러 즐거운 이유는 우리가 즐길 준비가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감동 –

악이 편만하여 상식을 초월하는 고통을 겪곤 하는 우리와 선하시고 전능하시다는 하나님.

 

“왜 하나님은 나에게 이런 고통을?”

첫째, 당신에게만 그야말로 스스로 절멸할 것만 같은 그 고통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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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 머리말과 맺음말

머리말쯤 사용될 토막생각들

이 책은 제 자신의 고통 극복에 대한 수기입니다. 따라서 매우 비전문적입니다만, 그러나 제가 감사할 수 있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게 하기만 한다면 어떤 하찮은 지식이라도 저에게는 긍정입니다. (따라서 고통에 대해서는 매우 많은 책들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고통은 정상인 고통이 있고, 비정상인 고통이 있습니다.

희미해져가는 기억 속에서 고통의 기억은 그 무엇보다도 선명하게 내 안에 자리잡습니다. 뉴스에서나 나옴직한 다른 이들의 고통은 내 기억을 스쳐 지나가는, 그야말로 세상이 무섭구나라는 느낌만을 남기는 것입니다. 나 밖에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은 언어로도 다 표현할 수 없기에 타인이 위로해 줄 수도 없습니다.

나의 고통과 이웃의 고통을 상기해 보고자

고통을 겪다보면 고통의 의미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게 될 때가 있습니다.

이 책은 일단 깊고 어두운 고통의 심연에서 “왜 고통이, 나에게, 지금?”이라고 절규하는 분들을 염두에 두고 쓰여졌습니다.

이 책은 철저히 실천을 격려하기 위해 쓰여졌습니다. 실천윤리학.

이 책은 사실 고통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대체 이 처절하고 끔찍한 고통들의 의미는 무엇이며, 그 고통들로부터 우리는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내용의 주입니다.

아주 작은 고통에서부터 블랙홀에 갇혀 한 줄기 빛마저 허락하지 않는 극심한 고통에 이르기까지 다루어 볼 생각입니다.

“…힘내.”

“넌 좀 가만히 있어. 누군 힘낼 줄 몰라서 이러고 있는 줄 알아? 네가 대체 내가 겪는 이 고통에 대해 뭘 안다고 충고야?”

(그렇지만 친구가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둘의 대화에서 의미를 찾고, 고통 해결의 의미를 찾아가는 데 있습니다.

머리말 (루이스의 서문을 보면서 참조해서 적자) “고통 안의 소통”

“고통에서 어떻게 벗어나야 하는가?”
“고통에 빠진 이를 어떻게 도와야 하는가?”

윤리적 요구는 그저 과부와 고아의 얼굴을 본다고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연민 이상의 것이 필요.

고통을 겪고 있는 누구라면 가질 의문이 바로 “왜?” 입니다. 그리고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떠올릴 질문이 “어떻게?”일 겁니다. 위의 두 질문은 고통을 겪는 당사자 외에도 당사자 옆에서 그를 돕고자 애를 쓰는 이들도 함께 묻는 것일 겁니다.

좋습니다. 그렇게 타인의 도움과 나의 노력으로 나는 고통에서 벗어났습니다.

맺음말

개인의 고통이 조금이라도 본인에게 의미가 있다면 그를 살려야만 합니다. 그가 죽으면 고통도 쓸모없는 경험이 되기 때문입니다.

고통 받는 이가 있을 때 우리는 그가 고통에 의한 악영향을 받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고통이 없어지면 어쩌고 저쩌고.

고통의 당위성: 사랑을 하다보면 죽도록 사랑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가 겪은 십자가에서의 고통은 악에 대한 단죄와 죽음의 고통도 불사하는 표현되는 사랑이 모두 담겨있습니다. 네가 날 사랑한다면 저 호수에 빠져. 그런 고통과 불편을 감수할 정도로, 다시 말해 그런 총체적 부정들을 이겨낼 정도로 네가 내 말을 따르고자 하는 의지, 즉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보여줄 마음이 크냐는 겁니다.

예수가 죽어서, 그래서 고통을 겪어서만 우리에게 사랑을 웅변할 수 있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쾌락을 주는 것만으로 우리가 그 사랑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을 아는 이유 중 큰 것은 그들이 우리를 위해 희생하기 때문입니다. 몸과 마음이 힘들고 손해인 데도 심지어 아이가 미운데도 불구하고 (그 부정의 메세지를 거스르고) 아이를 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얼굴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예수님 역시 얼굴 너머의 그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변신론자들 중에 예수가 십자가형에서 세상의 모든 고통을 다 짊어졌다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믿음, 특종 사건) 그러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화형을 당해보지 않았고, 손가락이나 발가락이 잘리는 극도의 고통도 경험하지 않았으며 여성만이 겪을 수 있는 특별한 고통의 경험도 하지 못했습니다. 고통의 기능 중에는 긍정을 긍정하는 부정이 있습니다. 고통 중에 특별히 남에게 가시적인 고통들이 있습니다. 특히 가시적 효과가 드러나는 제국들의 형벌이 그러하지요. 짐승들에게 피와 살이 뜯기며 먹히는 형벌, 태형, 화형, 십자가형.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고문의 전문가들, 인간이 어떻게 고통을 극도로 느끼는 동시, 그것을 바라보는 자들이 두려움의 고통을 크게 느끼는지를 극대화시키는 것을 잘 아는 이들입니다. 예수의 십자가형은 그 기능에 충실히 부합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그의 정신이 함몰되지 않은 것이 그 증거인데, 그가 뇌에 충격을 받아 이성의 지배력을 증강시키는 세로토닌 따위의 신경전달물질 분배가 교란되면, 매우 부정적인 감정에 사로잡힐 수가 있습니다. 불만, 걱정, 신경질적, 증오, 분노, 심지어 살의까지 들 수 있습니다. 예수의 행적에서 이와 같은 모습이 드러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리고 드러날수도 없고 드러났을리가 없는(그렇잖다면 사람들이 그리 따르지 않았을 것) 것을 생각한다면, 예수는 적어도 우리가 아는 수십 가지 정신병은 겪지 않았습니다.

긍정을 긍정하는 부정의 기능을 활용해 예수가 웅변한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십자가형만치 엄정하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통이 악에 대한 형벌이라면, 그는 고통받을 일이 없으므로 그가 남의 고통을 대신 짊어졌다고 볼 수 있는데 그렇다면 남의 형벌과 고통이 그만큼 크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죄가 크고 그 대가가 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죽음이 그야말로 확실했다는 것. 그런데 그가 부활했다는 것.

십자가에서 예수가 웅변한 메세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보라 내가 네 악과 네 잘못을 모두 책임졌다. 네가 할 일은 너도 나와 같이 하라.

예수의 메세지는 공동체를 향한 메세지이기도 하며 개인을 향한 메세지이기도 합니다. 개인의 고통은 그만이 아는 고통이면서도 꼭 그렇지 않고 타인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다. 마취로 그가 고통으로 죽음에 이르지 않도록 도울 수 있으며 이는 정신적, 육체적 마취가 있습니다. 육체적 마취라 하면 20세기 이르러 개발된 마취제를 말하는 것 같은데 과학기술이 개발된 요즘에서야 적용되는 이야기가 아니냐. 아닙니다. 중국에는 기공이 동양에는 침술이 있었으며, 스트레스가 가득한 생활을 떠나 안전한 자연에 기거할 수도 있었습니다.

레비나스는 고통을 고통으로 볼 수 있는 이성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변신론은 죽었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아우슈비츠마냥 악하다 일컬어진 소돔과 고모라는 그렇게 멸망했습니다. 변신론이고 자시고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멸하셨습니다. 아모리의 죄악이 차지 않았기 때문에 심판이 지연되었습니다. 곧 죽을 이들입니다.

고통에 대한 과학적 연구는 분명히 개인의 고통에 대한 책임이 개인보다 타인에게, 그리고 공동체에게 있음을 밝혀낼 것이라 저는 확신합니다. 고통을 겪은 이들은 두 가지 반응을 보입니다. 고통으로부터의 회피냐. 고통을 겪은 이들을 향해 나가 돕느냐. 자기 방어냐, 남을 도우러 나가느냐. 저는 다른 건 몰라도

* 고통을 경험할 기회를 얻지 못하는 이들: 부자들. 주께서 왈,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느니라

* 힘을 지난 고통을 겪어 살 소망까지 끊어질 이들:

(당신의 고통은 의미있습니다. 다만 그 의미가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았을 뿐. 아직 당신에게 선택의 여지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당신을 떠미는 악한 세력은 이미 힘을 잃고 떠벌이는 이들이라는 것을. 선과 악이 존재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어렵다!! )

저는 여러분들께는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정서의 폭주는 이성이 통제하지 못합니다. 자신을 자살로 이끄는 고통이 육체적인 것이라면 진통제의 사용을 권하겠고, 정서적인 것이라면 필히 두뇌의 건강이 안 좋아졌을 테니 우울증, 조울증, 정신분열증 등등 회복제의 섭취를 권하며, 그럼에도 스트레스가 과할 때에는 주변인들의 도움에 하나님의 지혜가 함께 하기를 기도하며, 혼자 계시다면 그야말로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기를 간구하겠습니다.

끝끝내 당신과 함께 하기를 원하는 고통이 있다면 그를 안으십시오. 니체처럼 고통을 애견삼아 이름도 붙여주고 함께 해도 좋습니다. 상실의 슬픔은 많은 이들이 죽음까지 안고 갑니다. 슬픔의 고통이 그러한 이유는 슬픔을 놓으면 잃은 이의 기억마저 놓아버릴 것 같기 때문입니다. 제랄드 싯처는 그래서 강의시간에도 울었다. 심지어 육체적 질병인 암마저 친구가 되어야 잘 극복한다고 합니다. 고통을 받아들이지 않고 싸워 이기려고만 하면 오히려 질병을 이길 확률이 낮다고 합니다. 우울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고통을 안고 자란 이들. 갑작스런 사고로 전신마비를 겪은 이들.

세브란스 병원에서 만난 젊은 여성분. 첫 아이를 출산하면서 마취의 잘못인지 전신마비가 되어 목 위의 근육만 움직일 수 있는 분. 다행히 병원에서 책임을 떠맡으며 죽는 날까지 공짜로 입원과 관리를 해주는. 그러나 남편이 재혼하고 떠나고 심지어 아이의 면회마저 허락하지 않아 외롭게 침대에 누워 있는 분. 벽에 붙어있는 성경말씀을 읽으며 감사의 태도로 일관하는 그분의 환한 얼굴은 그야말로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저는 깨닫되, 고통을 겪고 있는 이에게 진리를 논하는 것보다 무엇보다 옆에 앉은 침묵이, 그리고 그보다도 힘든 이의 마음을 울리는 몇 마디 격려가 큰 힘이 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자신의 고통을 안을 수 있는 이가 타인의 고통을 안을 수 있습니다. 고통은 자신을 재발견하는 기회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고통은 개인의 책임만이 아닙니다. 남의 도움이 미숙하고 서툴더라도 받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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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7장 기독교 믿음에 대하여 – 1. 칭의에 대한 재정의

1. 칭의에 대한 재정의

2. 하나님을 용서하기

이제까지 고통에 대한 신념의 역할에 대해서 논하였습니다. 회복의 시작이 되는 믿음. 그리고 고통의 경험이 이해되어지면서 자신이 갖게 되는 새로운 신념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였습니다. 고통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서 비롯되고 공동체에서 책임져야 하는 것이라고도 하였고, 그러나 회복은 공동체에서 돕되 마취 수준에 그쳐야 한다는 것도 이야기하였습니다. 고통에서 회복하고 고통에서 벗어나는 그 모든 것의 과정에는 신념이 자리한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지식을 얻었습니다. 슬픔은 지식이고, 고통은 앎입니다. 저는 여기서 한 가지 특별한 믿음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종교적 믿음, 그 중에서도 기독교의 믿음입니다. 바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고통을 허락하는 선한 신을 변호하려는, 흔해빠진 변신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거냐.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믿다가 격한 고통 때문에 하나님을 용서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서 이 장을 준비했습니다. 무신론자나 불가지론자가 유신론자가 되는 것은 상대적으로 좀 낫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없는 옵션이 추가되어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신론자가 신을 잃는 것은, 그 자체로 고통스런 일입니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무엇에 대한 모든 것의 열쇠를 신에게 맡겼는데, 만일 신이 없다면 나는 죽음, 타인, 사랑, 미래, 삶의 의미 모든 것을 재정의해야 합니다. 바울이 말한 바, 우리는 불쌍한 자가 됩니다.

저는 두 가지 기준은 분명히 세워놓고 시작하고자 합니다. 천국과 지옥입니다. 그리고 절대선과 사탄. 예수의 음성을 아는 양과 그렇지 못한 양. 우리를 넘어 양에게 다가오는 늑대들의 존재. 선과 악 두가지 기둥을 분명히 박아놓고 논의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돌이켜보건대 악은 실존하기 때문이요, 악에 대한 하나님 심판의 엄정성은 이미 자신의 아들마저 십자가에 못박는 결의한 태도로 자명해졌습니다. 사탄의 목소리를 듣거나 사탄에 빙의된 사람을 볼짝시면, 사탄의 존재를 부인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성령과 사단이 우리의 의식에 잇닿아 있어 감각할 수 없이 우리와 교감하는 존재일 수도 있기에, 그들의 존재가 전혀 비과학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초자연적인 요소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아니면 아예 영혼이 존재한다면 성령의 존재와 더불어 사탄의 존재는 우리와 공존하며 서로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입니다.

1. 칭의에 대한 재정의

옳은 믿음은 고통의 시작에서부터 끝까지 살아남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정의하고 있는 이신칭의에서의 믿음은 “예수가 하나님의 성육신한 아들로서 십자가에 나의 죄를 대신해 못박혀 돌아가셨다”를 믿는다는 믿음입니다.

이 명제를 믿는 믿음이 대체 고통받는 이들에게 무슨 힘을 주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톰 라이트의 단순한 명제가 그래서 좋습니다. 바울이 이야기한 복음은 “예수를 믿는” 것이다. 유대인이 역사와 문화를 통해, 다시 말해 구전적으로 전해내려온 이야기를 토라를 배경으로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했을 때, 그리고 저 끝의 시간에 이방인이 심판받고 고난받는 유대인이 부활할 그 끝의 시간이 아닌, 역사 중간에 예수가 부활함으로서 재조명되는 유대인들의 이야기. 그리고 거기서 유대인들이 믿게 된 메시아로서의 ‘예수’. ex) 김요석 목사님의 이야기. 나사로의 이야기. (미래적 지향성)

저는 믿음이란 하나님을 향해 바라보는 아이의 얼굴같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신뢰하고 의지하기에 저를 맡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기에 자신의 행동도 하나님의 말같지 않은 율법이나 명령까지에도 순종할 수 있는 겁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Love Wins 저자처럼 ‘믿는다’도 동사이므로 행위에 들어간다구요? 맞습니다. 우린 게다가 하나님을 이 꽉물고 힘주어 믿지요. 습관처럼 하는 행위보다 오히려 더 힘이 듭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에 힘줄 때는 그것을 방어하기 위한 것입니다. 믿음은 내가 아는 최선의 지식으로 신념을 구축하고 그 위에 올라타면 하나님이 나머지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십니다. 시골 농부의 믿음과 톨스토이 작가의 믿음.

절대 정의, 절대 기억, 심판 이런 게 없다면 고통은 무의미, 반이성 등을 떠나 그야말로 불의의 결정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죽음에 유일하게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이 초자연적인 존재입니다. 그리고 시간의 처음과 끝, 우주의 시작과 끝을 언급한 경전은 기독교가 유일합니다.

저는 사랑이 창조세계를 붙잡는 하나님의 질서라는 것 때문에라도 기독교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 믿음이 위대한 것은 그 믿음이 참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죽음, 고통, 윤리, 폭력, 그리고 좋은 것까지 한계가: 사랑, 은혜, 자비, 리소스, 건강 등등. 한계가 깨어지지 않으면 우리 삶에는 의미가 없습니다. 굳이 의미가 있어봤자 백 년 남짓합니다. 참을 가리키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삶을 제한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레비나스의 철학을 받아, 예수가 나의 고통과 과오까지 책임을 지고, 그 책무를 다하는 것이 곧 십자가에서 못 박히는 일이었다면 나는 두 방향에서 모두 명령을 듣는 셈입니다. 타인의 얼굴로부터 오는 호소, 명령. 그리고 그를 도우라는 예수의 명령.

구원의 확신에 대한 교리는 잘못되었다고 봅니다. 우리가 누구관대 감히 죄인이 죄인의 구원을 정할 수 있단 말입니까? 마치 저 양은 목자들의 소리를 분별못할거야. 하고 속삭이는 우둔한 양무리와 같습니다.

믿음은 내가 만든 길과 같습니다. 이 길들의 방향은 내 삶의 모든 과정에서 수정되기도 하고 강화되기도 합니다. 항상 하나님을 바라보고, 성경을 읽고, (온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런 자라야

믿음은 분명 지식일진데 가장 교육받지 못한 이에게도 잘 받아들여 집니다. 믿음은 쉬운 무엇입니다.

시골농부도 가고, 백부장도 가며, 나사로도 가고 톨스토이도 가되 어느 동방나라의 커다란 교회 목사님들은 가지 못할 그런 길일 겁니다.

믿음이란 나의 앎이 진실에 미치지 못했음을 좌절하지 않는 것이다.

믿음이란 아직 나의 지식이 절대 진리에 미치지 못한 것을 좌절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직 절대 진리에 미치지 못했다고 해서 내가 얻은 지식을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얻은 지식에 만족하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얻은 지식에 만족했다면, 그것은 곧 무지이고 교만입니다. 믿음은 무지에 대한 자각이며, 더 나은 지식

믿음이란 진실의 존재를 믿는 것이며, 이 믿음에 기반해 나는 진실을 탐구한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란, 다시 말해 하나님이 의롭다 여기는 믿음이란 순전히 은혜입니다. (로마서 4장 2절부터) 순전히 은혜라면서 또 믿어야 구원받는다는 것은 무언지. Love Wins의 저자처럼 믿는다verb는 동사인지. 그럼 믿으면 존나 힘줘서 믿어야 하는지. 강하게 자기 최면 걸어야 하는건지. 하하 우습습니다.

로마서 10장 6-15절

6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7 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8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11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14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신명기 30장 11-14절

11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12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이 아니요
13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도 아니라
14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바울이 로마서에서 율법과 믿음을 대조하며 이야기하고자 한 것은 믿음이 쉽다는 것입니다. (음, 믿음이 있네 없네 식으로 천국에 갔네 못갔네 따지는 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이야기할려고 봤더니 그런 의미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쉬운 믿음.

2. 하나님 용서하기

“왜 하나님은 나에게 이런 고통을?”

첫째, 당신에게만 그야말로 스스로 절멸할 것만 같은 그 고통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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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받는 인간 – 손봉호

제 1장 논의를 시작하면서

(3) 고통의 경험은 그 자체 내에 이미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기를 바라는 욕구가 포함되어 있다. 그것이 고통의 본성 가운데 하나요, 고통이 주어진 목적 가운데 하나다. (목적을 지향하게끔 하는 동기라고 봐야할 듯하다) 그런 점에서 고통은 기쁨, 사랑, 그리움, 슬픔 등 우리가 경험하는 다른 느낌과 다르고 배고픔, 목마름, 가려움과 비슷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

(6) 사유실험에 관한 이야기, 현상학적인 방법 적용 (담장에 피어있는 장미꽃을 보면서 동시에 빨간 색을 인시하는 본질직관의 방법) – “만약 사람에게 고통의 경험이 없었다면 어떻게 될까?”

(12) 선천성 무통증 환자(congenital insensitivity to pain)와 환상지통(phantom-limb pain) 환자의 특별함. 전자는 통증을 느낄 수 있는 모든 신경조직이 갖추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통증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경우고, 후자는 팔이나 다리를 절단당한 사람들의 약 35%에게 일어나는 것으로 잘라내어져 없어진 부분에 고통을 느끼는 경우다. 그 외에도 척추하부 통증에 시달리는 환자의 75%에 있어서는 어떤 신체적 결함도 발견하지 못한다는 연구발표가 있었다.

(16) 즉 학문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들은 그렇게 심각한 것들이 아니거나 아예 진정한 존재가 아니라고 취급해 버리는 것이다. 현상학자 후설은 서양에서 갈릴레오로 시작된 과학주의가 그런 오류에 빠졌다고 지적한다. 즉 자연과학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세계는 진정한 세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고통을 느끼게 하는 선험적 실체가 있다고 해 봅시다.

무섭다. 두렵다. 으스스하다. 어떤 이들에게는 전혀 무섭지 않으며 두렵지 않습니다. 죽음. 시체. 귀신.

제 3장 ‘아픔’, ‘괴로움’, ‘고통’

1. 정확한 정의를 거부하는 고통

국제고통학회가 정의한 고통은, “조직의 실체적 혹은 가능한 파손과 관계하여 겪는 불쾌한 감각적 그리고 정서적 경험, 혹은 그러한 파손이란 표현을 사용하여 서술되는 불쾌한 감각적, 정서적 경험”

고통을 표현하는 언어는 ‘작용자의 언어(language of agency)’일 수 밖에 없고, 그것은 주로 ‘마치… 것 같은’의 구조를 갖는다고 한다.

동물이 느끼는 고통? – (26) 프레디네에 의하면 가장 하급동물에서는 고통의 감각이 거의 발달되어 있지 않고, 의식과 지능을 갖춘 고등동물에 있어서 비로소 확실하게 등장하며, 행동이 지능적이고 의식작용이 분명한 정도에 따라 고통을 느끼는 정도가 더 강하다고 한다.

사람은 짐승들과 같이 단순히 아파할 뿐 아니라 짐승들과는 달리 ‘괴로워’하도록 결정되어 있다.

아픔을 느끼는 것은 확실성을 갖는 것이다. 고통에 있어서 상대성이란 있을 수 없다. 흔히 사람들은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질 때 그것이 꿈이 아님을 확인하기 위하여 자기 살을 꼬집어 본다. 자신의 몸이 자신의 의식에게 전달해 주는 가장 확실하고, 가짜일 수 없는 정보를 주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지식과 감각을 다 의심할 수 있어도 고통은 의심할 수 없는 현실이다.

꿈을 꾸면서 쾌락에 겨운 나, 고통에 신음하는 나 등을 경험한다. 꿈 깨고 나서 꿈 깨서 다행이다. 아아, 꿈이여 영원하라라는 생각을 한다. 환상인 줄 알면서도 오히려 꿈 속에서 행복과 쾌락이 부여되면, 영원히 꿈 속에 있기를 바라며, 환상임에도 불구하고 꿈 속의 고통이 싫어 다시는 그와 같은 꿈을 꾸지 않기를 바란다.

자신의 존재와 활동에 대한 인식이 있기 전에 고통을 경험하고, 고통을 통하여 자신의 몸과 자신의 존재를 인식한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이전에, 나는 아파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2. 가장 원초적인 고통

원초적이란 말은 근원적이란 뜻이어서, 고통이란 경험을 다른 경험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뜻이다. 물론 고통만이 원초적인 경험은 아니다. 기쁨, 슬픔도 그렇다. 어떤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선악에 대한 개념은 직관적 어쩌면 원초적인 것이라 하겠다 (37). 아리스토텔레스 왈 우리가 나쁜 짓을 하는 것은 쾌락 때문이고, 고상한 행동을 하기 싫어하는 것은 고통 때문이다? 아냐, 고통을 줄이기 위해서 나쁜 짓을 하기도 해.

미국 남북 전쟁 때 외과의사였던 미첼. 불행하게도 고통은 지속될 수 있고 지속되면 더욱 심해질 수 있으나 행복감은 지속되지 않는다. 지속되는 행복은 행복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재미있는 관찰이다. 신으로부터 멀어져 고통을 계속 느끼게끔 되어 있는 우리는, 영속적인 고통을 체험하나 쾌락은 한순간이다. 왜 한순간의 쾌락이라도 허용되었을까? 루이스의 말대로 천국의 맛봄이 조금이나마 허락되었기 때문일까?

3. 부정의 근원으로서의 고통

쾌락은 사람이 능동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지만, 고통은 당하는 것이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고통의 수동성은 우리 감각기관의 수동성보다 훨씬 더 심각한 의미에서 수동적이다. 감각의 수동성에는 환영하는 능동성이 있고 그렇게 함으로 바로 지각이 일어난다. 그러나 고통을 당하는 감수성은 상처에 노출된 약점이 있고 따라서 수용성보다 더 수동적이다. 그것은 경험보다 더 수동적인 시련이다.

고통은 인간의 연약함과 유한성을 죽음보다 더 절실하게 인식시키는 경험이다. 고통은 선천적 주체를 세계내로 끌어 내리며, 창조자가 아니라 피해자로 만든다. 고대 그리스 인들은 “고통을 당하는 자는 영원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한다. (그러나 하나님도 우리 때문에 슬퍼하고 아파하시지 않나? 그도 고통을 당하지 않나?)

고통이 수동적이라지만, 그것은 오히려 우리를 적극적인 행동으로 내몬다. 추워서 집과 가죽옷을 짓고, 배고파 농사와 목축을 했다.

고통은 모든 ‘문제거리’의 근원이다. 직간접적으로 우리에게 고통을 가져다 줄 만한 것은 문제거리고, 직간접으로 우리의 고통을 감소시키거나 제거하는 데 공헌할 수 있는 것은 ‘흥미’롭다. 인간에게 고통이 없다면 도무지 무엇이 ‘문제’가 되겠는가? 아마 인간에게 고통이란 경험이 없었따면 인간은 영원히 사유활동을 시작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고통은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는 가장 근원적인 조건이라 할 수 있다.

고통은 문제거리의 뿌리일 뿐 아니라 모든 부정의 핵이기도 하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긍정적인 것들이 쾌락을 가능하게 하고 부정적인 것들이 고통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을 가져다 주는 모든 것을 우리는 ‘긍정적’이라 부르고, 고통을 가져다 주는

일반적으로 ‘부정적’이라 표현한다 하는 것이 옳다. 즉 ‘쾌락은 긍정적이고 고통은 부정적’이 아니라 쾌락과 고통이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의 표준이 된다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무자유(non-freedom) 혹은 고통을 당하는 것에서 중요한 것은 부정(not)의 구체성이 어떤 논리적인 부정(not)보다 더 부정적인 상처란 이름으로 대두된다는 사실이다. 악의 부정성은 아마도 모든 논리적 부정(not)의 근원이요, 핵일 것이다. 악의 부정(not)은 무의미의 정도에 이를 만큼 부정적이다.” 라고 주장한다. 고통을 통해서 부정이 태어나고 부정을 인식한다는 것이다. 고통이 상처란 경험으로 인간에게 다가오지 않은 한 부정은 단순히 놀이의 규칙처럼 약속에 의한 사고놀이의 규칙에 불과할 것이다.

부정은 신에 의해 정의되나, 인간의 이에 대한 선험적 지식은 신만큼 충분하지 않다. 후천적으로 인간은 이를 고통에 의해 배우게 된다.

제 5장 주관적 경험으로서의 고통

1. 사적인 고통

고통은 표현될 수 없으며, 나밖에 모르는 것이다. 슬픔은 고독을 불러온다. 슬픈 자들은 홀로 있을 수 밖에 없으며 이들이 서로 만날 때는 제 3자가 개입되었을 때 뿐이다. “함께 모이자” 라는 외침은 슬픈 자들이 할 수 없는 것이다.

박완서 씨 예를 기억해보니, 자기는 장성한 아들이 죽었고, 자신을 찾아온 이는 딸이 위중한 병에 걸렸다. 자신의 슬픔으로 달래니, 상대방은 위로가 되었다. 그것이 무척 싫었으나, 상대방 깊은 고통에 한줌 위로가 되었다는 것은 일단 기억해두자.

2. 지향적이 될 수 없는 고통

고통을 겪을 때는, 고통이 주는 대상이나 고통을 받는 나에 대한 생각을 하지 못한다는 이야기이다. 사과의 빨간 구형의 모습을 보면, 우리는 사과를 생각한다. 사람의 얼굴을 보면 우리는 그 사람을 생각한다. 감각을 타고 뇌로 전달되는 그 빨간 신호에 집중하지 않는단 얘기다. 그러나 고통은 다르다. 신호 그자체가 경험이 되며, 우리는 철저하게 그 경험에 당하고 만다.

3. ‘나’를 의식하게 하는 고통

데카르트, 로크, 칸트, 후설 등의 주관주의적 철학에서는 자아의 존재가 직관적으로 확실하고 그 확실한 바탕 위에서 다른 사람, 세계, 신의 존재를 증명하거나 연역하려 하였다. 그에 대항해 쉘러, 사르트르, 부버 등은 타인에 의한 나의 존재 인식을 말하였다. (69)

어떻게 ‘나’의 인식이 가능한가? 미드의 설명을 보자. 상대방의 반응을 통하여 나를 의식한다. 내가 뭘 보고 gesture를 취했을 때, 상대방의 반응을 보고 내 gesture가 가진 의미를 파악한다는 것이다. 자의식은 이렇게 생길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목적격으로의 자신(me)이지 주체격으로서의 자신(I)이 아니다. (67)

고통을 통해 이뤄지는 ‘나’의 인식을 생각해보자. 다른 사람이 나로 하여금 나를 인식하게 한다면, 과연 다른 사람이 내게 주는 느낌은 무엇인가? 무엇을 오감으로 감지하여 “아, 이게 나구나!” 하고 느끼게 하는 것일까? 이것은 고통이다. 기쁨에 겨운 사람은 흥분으로 자신의 바깥으로 나가버린 뒤 자신을 망각해버릴 수 있다. 그러나 고통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네덜란드 심리학자 바으텐데이크 왈, “모든 형태의 고통은 자기 자신에게로 파고들고, 고통과 직접, 간접으로 관계되지 않은 모든 것으로부터 자신을 격리시킨다. 이렇게 시야를 한정시키는 현상은 정서적인 면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심지어 사고에 있어서도 일어난다.”

헤겔도 “아픔을 통하여 사람은 자신의 주체성을 느낀다.” (71)

(오, 갑작스런 나의 생각. 플라톤이 아리스토텔레스와 다르게 육신을 악한 것으로 설정하고 이데아를 상위의 것으로 여기게 된 것은 고통과 쾌락 구도와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고통은 한없이 육신을 향하게 하니 매우 육적인 것이요 또한 싫은 것이니 악한 것이다. 인간은 쾌락을 느끼고 느끼며 하늘로 날아오르는 느낌을 갖기를 바란다. 육체를 떠나고 싶다는 것은 고통에서 회피하는 것이요, 더 나아가 쾌락에 잠기고 싶은 것이다)

물론 고통을 느낄 수 있다고 해서 항상 자기의식이 생긴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그런 주장은 무책임한 환원주의가 될 것이다. 중추신경이 없는 곤충은 고통을 느끼는 것 같지 않으나 중추신경을 가진 모든 생물은 고통을 느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런 짐승들에게 자아의식은 찾아볼 수 없다. 이성, 혹은 정신이라고 부르는 반성의 능력이 있어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그런 인간이 구체적으로 자기의식을 얻는 과정에서는 다른 사람, 혹은 ‘너’ 못지 않게 고통의 경험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4. 공개적이 되려는 사적인 고통

심한 고통을 당하면 비명을 지른다. 사적인 고통은 심하면 심할수록 공개적이 되려고 한다. 사적이지 못하고, 가장 정직하며 적나라한 것이기에 객관적이다. 남들이 절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인 동시에 남의 이해를 기반으로 꽤 객관적이다. 고통은 주체를 괴롭히는 객관성이다. 고통을 가장 주관적인 것으로 경험하는 것, 즉 그 표현은 객관적으로 매개된다. (76, 아도르노) 언어와 사고를 분리할 수 없다면 고통은 동시에 언어적 표현을 요구하는 충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제 6장 고통과 역사의 의미

1. 고통의 의미에 대한 요구

(78) 고통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경험이며, 철저히 사적이면서도 공적이 되려는 충동을 가진 독특한 경험임을 살펴보았다. 언어를 거부하고 언어를 파괴하지만 동시에 고통은 우리의 사유와 언어형성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경험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인간이 당하는 고통이 가진 또 하나의 중요한 특성은 그것이 다른 어느 느낌이나 경험보다 더 그 의미에 대하여 관심을 갖도록 한다는 사실이다. 고통은 우리를 위협하므로 무시해 버릴 수 없다. 고통은 계속해서 왜 그 자체가 있어야 하는지를 묻도록 요구한다.

긍정적인 ‘왜’보다 부정적인 ‘왜’가 더 절실하고 중요하다.

인간은 물론 다른 방법으로도 고통을 당했다. 인간은 주로 병든 동물이다. 그러나 그의 문제는 고통 그자체가 아니라 ‘무슨 목적으로 우리가 고통을 당하나’ 하는 ㅈ러실한 질문에 대해 대답이 없다는 사실이다. 가장 용감한 동물인 인간. 그러나 무엇보다도 확실하게 고통을 당하게 되어 있는 인간은 고통을 그 자체로 부인하지 않는다. 그 고통의 의미가 분명하다면, 즉 고통의 목적이 드러난다면, 그는 고통을 바라고 심지어는 추구할 것이다. 고통 그 자체가 아니라 고통의 의미 없음이 … 인류 위에 내려진 저주였다. – 니체

어떤 사건이나 현상이 ‘의미’를 가지려면 우리는 그것이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나 과정으로 ‘이해’되거나 아니면 과거에 이미 일어난 사건의 불가피한 결과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어떤 논리적 설명이 가능해야 하는 것이다.

2. 고통의 의미와 역사의 합리성

고통은 어떻게 합리화는가 질문이 있다면, 그 후에는 “역사가 어떤 합리성을 가지고 있는가”란 질문을 할 수 있다.

역사에 대한 어떤 해석이 생겨날 수 있는 가장 두드러진 요소는 악과 고통에 대한 기본적인 경험이며 인간의 행복추구다. 역사의 해석은 궁극적으로 역사의 의미를 역사적 행위에 의하여 일어나는 고통의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다. – 뢰비트

고통이 역사의 해석을 요구하는 것은 지금 당하고 있는 고통이 앞으로 무슨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될 수 있으며 과거 어떤 원인의 결과인가를 묻도록 하기 때문이다. 지금 당하고 있는 고통이 그 자체로 목적으로 인식되지 않는 한, 즉 그 자체로 만족스러운 것이 아닌 한, 그것은 과거에 일어난 원인에 의한 불가피한 결과이든지 아니면 앞으로 달성하려는 이상을 위한 불가결한 수단임이 밝혀져야 의미가 있다 할 수 있다.

3. 고통에 대한 역사철학적 이해

(1) 허무주의 비극의 주인공들

니체의 초인은 고통의 운명을 ‘기쁘게’ 수용한다. 일종의 운명에 대한 사랑이며, 운명을 거절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는 합리적인 태도이다.

(2) 라이프니츠의 변신론 (신을 변호하는 이론)

더 큰 선을 가져오기 위하여 전능하신 신이 악을 허락했다.

등산사고에서 아들을 잃은 슬픔에서 월터스토프는 “나는 설명할 수가 없다. 이 가장 깊고 가장 고통스러운 비밀에 직면하여 그저 견디고 있을 뿐이다. ~ 사람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정당화하려고 만들어 낸 변신론들을 읽어 보았다. 별로 설득력이 없었다. 내가 제기한 질문 중 가장 고통스러운 것에 대해서는 답을 얻을 수가 없었다. 나는 하나님께서 왜 그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만 계셨는지 알 수가 없다. 그가 상하는 것을 왜 보고만 계셨는지 모른다. 짐작할 수도 없다. (89)

4. 역사철학의 걸림돌로서의 고통

모든 사람의 고통이 역사의 흐름 속에 설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제 7장

1. 생물학적 생존과 고통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어떤 소년은 온몸이 상처투성이고, 손가락 몇이 부러졌으며, 피가 흐르는 무릎으로 기어 다니고, 불에 손을 넣고, 날카로운 물건에 부딪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한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아이들의 부모는 하루종일 그런 아이들을 지켜 보지 않으면 안되고, 그런 아이들은 대개 일찍 죽는다 한다.

고통은 무엇보다도 비정상적인 상황을 인식하게 하는 기능을 한다. (104) 그래서 적어도 우리가 지금 아는 바 생물학적 구조가 유지되는 한 동물에 있어서 고통은 생존보존에 불가결하다.

2. 공동체 유지와 고통

3. 고통과 희생

(113) 고통이 인간의 생존을 가능케 하고, 공동체 형성에 중요한 기능을 한다 해도, 그런 고통을 왜 ‘내’가 당해야 하는 가에 대한 충분한 대답은 되지 못한다.

“왜 구태여 나까지도?” 혹은 “왜 구태여 나만?”에 대해서는 종교외에는 아무 이론도 만족스런 대답을 제시해 줄 수 없을 것이다. 헤겔은 “이성은 개인 하나하나가 고통을 당하는 것에 대해 머물러 있을 수 없다.”고 함으로써 고통이 개개인에게 가지는 의미에 대하여 철학의 무력감을 표시하였다.

제 8장 고통과 윤리

1. 실천을 목적으로 하는 윤리이론

윤리학은 실천을 이끌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적유희에 불과하다. 실천을 이끌어내지 못하는 윤리학이란 마치 병을 고치지 못하는 의학과 같다.

“사람은 윤리적으로 행동해야만 한다.”
“사람은 본래 윤리적인 동물이므로 윤리적으로 행동하지 않으면 짐승이나 다름없다.”

와 같은 것은 설득력이 없다. 윤리학이란 좀 더 ‘피부에 와 닿는’ 표현으로 실천력이 있는 철학이어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통에 기반한 윤리학은 힘이 있을 것이다.

2. 고통의 윤리적 의미

(1) 윤리적 당위와 고통

앞에서 고통을 선과 악을 구별하는 가장 원초적인 기준이라고 주장하였다.

(127) 쾌락은 항상 느껴지지 않아도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으나 고통을 제거하지 않고 정상적인 삶을 사는 것은 매우 어렵다.

3. 비도덕적 행위와 고통

욕망은 고통 바깥에 있는 또 하나의 본능이 아니라 바로 고통 그 자체의 본성에 놓여 있다. 고통은 그 자체가 제거되기를 원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고, 그것이 바로 욕망의 근원인 것이다.

4. 사회윤리와 고통

(141) 권세에 대한 이야기. 일반적으로 제도, 구조, 법률, 집단 등 비인격적인 세력들이 가져다 줄 수 있는 고통은 인격체들이 가할 수 있는 악보다 더 파괴적이며, 고쳐질 가능성도 훨씬 더 희박하다. (니버가 이에 대해 매우 좋은 책을 썼단다. 1932년에)

제 9장

고통의 극복과 문화

1. 고통과 경이

경이의 저 밑바탕 어느 구석에는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 숨어 있는 것이다. (진짜?) 아름답다고 느끼고 왜 그런지 이해하려는 것도 고통에 대한 두려움일까?

고통은 비정상의 전형이요, 비정상적인 것을 비정상적인 것으로 인식케 하는 계기가 된다. 강영안 교수의 “악에 대한 형이상학적 성찰”, 악이란 무엇인가 란 책을 읽어볼까?

쾌락은 쾌락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2. 고통의 자살지향성

3. 자살과 진통

4. 고통의 극복과 종교

(1) 불교에서의 고통

존재가 고통이다. 그니까 고통에서 해방되는 것은 이게 다 고통이라는 걸 깨닫고 거기서 해방되어야 한다. 이게 소승불교인데 사실 철저한 개인주의요, 자기 중심적이다. 그래서 등장한 것은 대승불교. 어미 호랑이를 잃은 새끼호랑이들을 보고 자신의 목을 찔러 엎드려 짐승과 새끼를 살린 마하사바타 왕자의 이야기. 열반을 포기하고 중생을 위해 희생하는 보살을 등장시켰다.

(2) 기독교와 고통

(169) 기독교의 고통관이 불교의 그것과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은 고통이 인간에게 있어서 본래적인 것이 아니라 죄의 결과라는 주장에 있다. 죄를 짓기 전의 아담과 하와는 고통을 당하지 않았고 죄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천국에서도 역시 고통이란 있을 수 없다. 엄격하게 말해서 모든 고통은 기독교에서는 어디까지는 벌이요, 불교에서처럼 인간에게 존재론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윤리적으로 선택된 것이다.

기독교의 고통관은 여러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하나님이 전능할 뿐 아니라 사랑으로 가득 찬 인격적인 신이라면 그런 자비로운 신이 어떻게 인간에게 그렇게 참혹한 고통을 허락하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될 수 밖에 없다.

(171) 그러나 모든 변신론적 시도는 특별히 나쁜 죄를 짓지 않았으면서도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나 그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족시킬 수 없다.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그런 논리적인 위로를 거부하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고통당하는 사람들, 특히 절망적인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은 지푸라기라도 잡으려 하고, 가능한 한 설득력 있는 변신론이 주어지기를 열망한다. 그렇기 때문에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변신론을 제시해 보려고 안간힘을 다한다. 그러나 그것이 근본적인 위로를 제시할 수 없는 것은 ‘카라마조프 형제’에서 이반이 말하듯 우리는 유클리드가 아는 세상에 살고 있고, 거기서는 전능자의 사랑과 무죄한 사람의 고통이 어떤 이론으로도 조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이 문제를 궁극적으로 내세와 하나님의 공정한 최후 심판에 대한 교리로 해결한다. 고통을 가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잘못을 회개하고 피해자에게 응당의 보상을 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그에 상응하는 보응을 이 땅 위에서나 내세에 받을 것이다. 회개란 단순히 잘못을 반성하는 정도의 것이 아니라 잘못에 상응하는 고통의 벌을 받을 각오를 할 정도의 철저한 뉘우침을 뜻한다. … 그러나 회개하지 않은 사람, 그리스도의 대속의 혜택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내세에서 영원한 벌을 받을 수 밖에 없다고 가르친다.

5. 고통과 노동

노동은 필수불가결한 것이며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데 꼭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노동은 괴롭다. 이 딜레마를 어떻게 풀 수 있을까. 아무도 모른다.

제 10장 인간과 고통

1. 인간이란 신비

2. 이론적 인간 이해의 약점

3. 고통받는 인간

4. 고통받는 얼굴과 윤리적 의무

5. 현대인과 고통

 

 

<<COPY 본>> 2011.08.26

“잠”과 “실신”에 대하여

고통이 지나칠 때, 우리의 의식은 감각의 인식을 거부한다.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닥쳐올 때 우리는 그 고통을 느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미칠 피해를 막기 위해 스스로 감각을 차단합니다.) 우리 스스로 고통을 피해 도망치는 출구는 잠 또는 자살이요, 우리 몸이 스스로 의식을 보호하기 위해 실행하는 기제는 실신 또는 기절이다.

고통을 가진 이가 불면증에 걸렸다면, 이는 더할 나위없는 고통이 된다. 고통을 피할 수 없다는 두려움까지 겹쳐 패닉 상태에 이른다. 죽음 너머로 간 이의 정신을 연구할 수는 없으므로 대신 잠을 살펴보기로 하자.

잠에서는 시간을 인식할 수 없다. 감각체계도 어느 이상 무감해진다. 내가 위장의 움직임을, 심장의 박동을 제어할 수 없듯이 몸이 한순간에 무정부상태가 되어버린다.

인간이 철저하게 물질적이라면, 잠은 물질 체계를 정돈하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인간이 정신적이라면, 초자연적인 무언가가 육체와 결합하여 연동하는 거라면?

꿈에서 깨는 것. 행복한 꿈을 꾸다가 깨며 아쉬워하는 경험. 무서운 꿈을 꾸다가 깨서 안도하는 경험.

고통은 자아로 하여금 끊임없이 내면으로 향하게 한다. 자기 연민에 빠질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고통은 자아의 블랙홀이 될 수 있다. (슈바르츠실드 포인트)

내가 우울증을 겪으며 경험한 것은 단순하게 블랙홀이 되어 버린 고통의 실재를 목격한 것이다. 수없이 자살을 생각했다. 내 고통을 겪는 것은 내 몸이니 이를 버리면 고통의 블랙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 고통의 블랙홀은 내 몸에 갇힌 것이니 내 몸을 죽이면 따라서 고통도 없어질 것이라 확신했다.

우리의 역할은 끄집어 내는데 목적이 있다. 선한 신이 창조한 이곳은 묘하게도 선과 악이 공존하는 곳이다. 우리가 할 일은 선한 길을 따라 가는 것이다. 과거에서 미래로 향하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우리는 신을 향해 올라가고 그는 내려와 우리를 만난다. 그 길은 좁은 길이다. 중용의 길이다.

고통의 블랙홀에 빠져보지 않은 사람은, 고통은 극복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약간의 남의 도움만 있으면 자력으로 극복할 수 있는 범위의 고통만 경험해보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자신의 시야에 회복의 지평선이 들어와 있기 때문에 얼만큼의 시간과 노력이 들어 회복될 수 있을지 압니다. 혹은, 그것을 모르더라도 계속 회복을 향해 한발짝씩 걸어갈 의지와 힘이 있습니다.

고통은 고독한 인간의 고독함을 더욱 깨닫게 합니다. 인간이 겪는 고통을 하나의 숫자에 대변할 때, 비슷한 고통이라 해도 그 숫자는 저 숫자와 다르며 한끝차이인 것 같아도 그 사이에는 무수한 숫자가 존재할 수 있는 것처럼요.

왜 이런 고통이 존재할까요? 신은 왜? 창조과정에 불필요했을까요? 예수님은 왜 십자가 고통을 겪은 건가요?

고통은 분류를 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고통의 기작을 이해하고 고통이 사람에게 주는 영향을 파악하기 위해서 등등) 자연의 타락으로 인한 고통. 자연재해에 의한 고통. 신체의 통점이 가져다 주는 고통. 그리고 2차적으로 정신이 느끼는 고통. 정신이 느끼는 고통은 똑같이 날아오는 돌에 맞아도 고의냐 우연이냐에 따라 크게 달라집니다. 고의로 맞았다면 즉각 화가 납니다. 상대방에 대한 증오가 일 수 있으며 억울하게 느낄 수도 있습니다. 증오, 분노 등은 마음에 담아둘 경우 좋지 않다는 것은 이제 심리학적으로 상식이 되었습니다. 반대로 우연히 맞았을 경우 그날 특별히 기분이 나쁜 것이 아니라면 그리고 상처가 대수롭지 않다면 넘어갑니다. 그런데 돌이 팔을 때린 것과 얼굴을 때린  것이 또한 고통이 다릅니다. 얼굴은 소중하게 여기는 부분이기 때문에 그 부위에 상처를 입은 것이 너무 싫고 화가 납니다.

신체적 고통은 누구에게나 비슷하게 다가옵니다. 고통에 대한 민감도의 차이가 있을 뿐, 신체적 고통이 두뇌에 보내는 신호의 스펙트럼과 amplitude는 대개 비슷합니다.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영역이 마비되지 않았다면 말입니다. 누구나 때리면 아픈 것도

신체적 고통은 정신적 고통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예컨대 길에서 누군가가 어깨를 치고 지나갔을 때 실수로 부딪힌 것이 아니라 일부러 그랬다면 화가 납니다. 무덥고 습한 여름 날씨는 사람들을 짜증나게 할 수 있습니다. 사우나에 들어앉은 사람은 마냥 기분 좋은 데 말입니다. 그러나 똑같은 신체적 고통에 대해서 사람들이 느끼는 정신적 고통은 제각각입니다. 어깨를 치고 지나간 사람을 향해 분을 쏟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를 즉각 용서하고 감정을 추스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신체적 고통이 정신적 고통으로 확산되는 것을 그들의 이성, 그리고 이성으로 훈련된 습관이 함께 제어합니다.

정서적 고통은 비로소 의식됩니다. 신체적 고통은 그만의 경로를 통해 의식에 도달합니다. 의식에 도달하는 신체적 고통이 극심할 경우, 신경이 고통의 전달을 스스로 차단합니다. 그 때 사람은 기절합니다.

지나친 정서적 고통은 그를 제어하는 사슬을 끊고 폭발할 수 있습니다.(우울증, 조증) 그런 고통은 고삐가 다시 잡힐 때까지 우리의 정서를 유린합니다.

그 때 우리 이성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아니, 의식이라고 해야 할까요.

유대인을 설득시키기 위한 의미 – 대속. 하나님이 그런 낡은 제도로 인류를 구원한다고는 보기 힘들다. 대속이란 하나의 상징이다. 그가 받은 고통의 의미란 대체 무엇일까. 다 이루었다란 뜻은 대체 무엇일까. 블랙홀에서 모든 이를 구출해 낼 특권을?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일까? 희망과 두려움(포기, 안주), 쾌락과 고통, 행복과 불행, 사랑과 무관심 이런 대조는 왜 생긴 것일까? 전쟁과 평화, 선행과 악행.

자유의지. 질서와 무질서. 먹이사슬, 자연에서 발생하는 악. 재해.

지옥이란 고통이 주어지는 곳이 아닙니다. 안식없는 고통, 무한한 고통이 있는 곳이기에 지옥이라 불리는 겁니다. 우리가 찾아가거나 불려가는 곳이 아닙니다. 우리가 고통 안에 거하기에 우리를 지옥이라 부릅니다.

블랙홀의 심연에 빠져드는 순간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어둠을 등지는 것입니다. 고통이라는 중력이 자아를 블랙홀로 몰아갑니다. 심한 고통은 슈바르츠실드 선을 지나 우리의 블랙홀은 고독의 극치입니다. 홀로 있는 자아는 얼굴을 타인에게로 돌리지 못합니다. 타인의 얼굴을 그래서 볼 수도 없습니다. 개인주의를 넘어 이기주의로 발전합니다. 빛마저 빨려드는 저 심연에서, 나는 내가 들어왔던 빛이 있는 입구를 향해 애써 고개를 돌려야 한다. 빛의 자취만 남은 입구라 하더라도, 아니 이제 빛이 없는 곳이라 하더라도 내가 떨어지는 방향을 등지고 빛이 있었던 그곳을 향해 얼굴을 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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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에게도 감사를

고통 속에 있던 때를 기억하자.

그리고 감사하자. 그 시간이 지났음을. 그리고 그 고통을 통해 얻게 된 황금의 열매들을 감사하자.

인정받고 싶은 욕구에서 자유로워졌음을 감사하자.

겸손해졌음을 감사하자.

이제 작은 기회와 작은 시간에도 감사하자.

탐욕에 영혼을 내맡기지 말자.

창가에 비치는 햇살에도, 그 햇살에 비쳐 형체를 드러내는 먼지에도 감사하자

잎새에 부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시인의 마음으로

순수하되

그러나 생명이 가득한 사랑의 삶을 살자

주님을 기억하자. 생명과 사랑을 위해 처절한 고통의 순간을 지났다.

그 고통을 함께 나눴음에 감사하자.

그리고 일어서자. 사랑하자. 기뻐하자.

아버지,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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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은…

여호와의 오른손이 높이 들렸으며 여호와의 오른손이 권능을 베푸시는도다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을 선포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나를 심히 경책하셨어도 죽음에는 넘기지 아니하셨도다
내게 의의 문들을 열지어다 내가 그리로 들어가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
이는 여호와의 문이라 의인들이 그리로 들어가리로다

시편 118편 16-2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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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졌던 삶의 의미조차 가치없게 느껴질 때

사랑이 가치있게 느껴지는 것은 그것을 깊이있게 경험해 보았기 때문이다. 사랑해보았기 때문에, 사랑을 꿈꾼다. 따뜻함, 행복함, 설레임, 가슴 벅찬 그 느낌을 경험해 보았기 때문에, 우리는 안다. 사랑이 우주의 온전한 질서라는 것을. 에너지를 샘솟게 하는 원천인 것을 안다. 우리의 영과 몸에 좋은 것이라는 것을 안다. 설령 경험해 보지 못했더라도 간접적으로 그것이 무척이나 아름답고 행복한 무엇으로 배워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 행복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 우울함으로 마음이 착 가라앉아 있다. 그저 하고 싶은 것은 영원히 자고 싶은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소변이 마려워 화장실을 들르고, 차려진 아침을 입에 우겨넣은 뒤 하는 일이라곤 다시 에어컨이 시원하게 틀어진 방에 들어와 침대 속에 몸을 집어넣는 것이다. 누우면서 고민한다.

‘나는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삶의 의미란 대체 무엇인가?’

그는 구도자였다. 인간이 지켜야 할 우주의 질서 – 사랑을 탐구했고, 그것을 실천하려 온 몸과 마음을 다해 애썼다. 남에게 삶의 의미란 무엇인지 나누려 애썼다. 당신이 보편적인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하기보다 삶이 당신에게서 의미를 찾게 하라고 강변하기도 했다. 현재만큼 영원을 닮은 건 없다면서 현재에 충실한 삶을 살으라고 조언하곤 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삶의 의미를 잃었다. 사랑을 다시 추구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사랑이 가져다주는 환희의 열매를 다시는 충분히 만끽하기 어려운 상태가 되었기 때문에. 뇌의 신경전달경로가 왜곡되어 기쁜 일이 있어도 기쁨을 충분히 만끽하지 못했고, 그나마 오래가지도 못하게 되었다. ‘기쁘다’란 신호가 뇌 안에서 퍼져가면서 금방 약해지고, 그나마 신호가 금방 꺼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시 사랑을 그러잡으려고 하지 않는다. 마치 사랑을 전혀 해보지 못한 사람처럼. 사랑을 맛보지 못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그는 사랑을 잃어버린 것이다.

한 때, 열정과 에너지가 넘치는 이였다. 뇌 안에 세로토닌이 넘쳐 흐르던 이였다. 행복감과 뿌듯함이 가득하되, 튼튼한 전두엽이 이성적으로 동물뇌 변연계와 측두엽을 잘 조절하던 뇌를 소유한 이였다. 성취한 것도 많았다. 소싯적 적은 글이 잡지에도 실리고, 우수한 성적으로 좋은 교육기관을 졸업했다.

내가 찾아야 할 길이란. 다시 사랑해보는 것이다. 지금은 할 수 있는 한 모든 힘을 다해서. 구원의 의미란 영원한 행복이다. 그를 위해 믿음, 사랑, 소망이 필요한 것. 거룩한 삶이 필요한 것. 질서를 위해 구별된 삶이 필요한 것. 행복을 잃어가는 것은 안될 일이다. 건강을 잃어갈 때는 이를 악물고 먹고, 운동해서 건강을 회복해야 한다. 생각만으로 될 일은 없는 것이다. 일어나자. 달리자. 뛰자. 너의 몸이 반응해서 다시 행복을 갈구할 때까지. 너의 뇌가 자극되어 과거의 그 희열을 기억할 때까지. 최선을 다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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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개 2: 창조, 그리고 기적의 의미

신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기적에서 안전한 곳에 있지 못해. 자연은 초자연적인 존재로부터 얼마든지 침공당할 수 있지.

태초에

기적은 하나님의 성품에 부합해야만 해.

하나님이 의미 있는 일을 한다고 했을 시, 기적은 그 의미를 담고 있어야만 해. 적합성.

자연법칙에 하나님의 기적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그 오해 풀어주기.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기적 하나만 언급하고 싶다. 바로 창조의 기적이야.

무신론자의 반론.

나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보다 더 나은 철학을 아는 바가 없다.

신. 참되고 유일한 왕, 자연과 인간의 왕이라면,

기독교의 기적들은 서로 간에, 그리고 그 기적들이 드러내는 종교의 전제 구조와 유기적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에서, 기타 기적들보다 훨씬 더 큰 내재적 개연성을 가지고 있다는 거야.

적합성.

“왜 신은 굳이 인간사에 기적을 일으켰을까? 그것은 의도가 담겨진 일이었을까? 그렇다면 신은 세상을 향해 어떤 목적을 갖고 있는 걸까?”

신의 마음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인간의 역사는 의미가 있다는 것을 짚고 넘어가고 싶다. 아니, 전 우주의 활동은 어느 목적을 향해 진행되고 있어. 물질들이란 그저 물리적인 자연법칙에 순응하여 의미없이 합쳐지고 분리되는 것들이 아니란 말이야.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그저 의미없이 태어나고 살다가 죽어가는 인생들이 아니야. 과학자들이 밝혀낸 자연법칙들은 물리현상들에 의미가 담겨있음을 깨닫도록 도움을 주었어.

첫째, 시간에는 방향성이 있다는 것이 밝혀졌어. 시간은 거꾸로 흐르지 않아. 언제나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흐르지. 이것을 나타내어 주는 물리법칙이 바로 열역학 제 2법칙이야.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이지. 고립된 계에서 추가 에너지의 유입이 없다면 엔트로피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증가하게 되어 있어. 우주의 엔트로피는 마치 우주의 시계나 다름없어. 우주의 엔트로피는 우주의 탄생과 더불어 꾸준하게 증가해왔으며, 그 엔트로피의 총량은 우주의 나이를 가늠케 해주지. 다시 우주의 엔트로피를 줄일 수 없듯이 우리는 시간을 거꾸로 돌릴 수 없어. 이것은 세상이 시간의 축을 따라 한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말해. (세상은 항상 있어오지 않았어. 어느 순간 대폭발이란 사건과 더불어 우주가 시작되었지. 세상은 그렇게 시작되어서 어디론가 미래를 향해 움직이고 있어. 목적도 의미도 없이 그냥 존재하는 게 아니야.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듯이 우주는 목적을 향해 의미있는 항해를 하고 있어. 우리네 짧은 삶이 그렇듯이, 우주도 나이를 먹으면서 지난 과거를 시공간의 벽장 속에 묻고, 새로운 별들의 탄생과 죽음을 예비하지.

둘째, 우주의 존재는 시작이 있었어. 우주가 어느 시점에 탄생했다는 것, 다시 말해 시작이 있었다는

심리적인 시간의 방향성.

우주의 항상성

우주의 태초. 우주는 시작이 있었어. 무신론자들의 경우, 우주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고 할 경우에는 우주의 기원을 굳이 설명하려고 하지 않아도 되지. 그런데 우주는 시작이 있었어. 고밀도의 진공상태였던 우주는 터널효과를 거쳐 고밀도의 불덩이같은 초미니 우주가 되었어. 상전이를 거쳐 팽창해오고, 입자를 만들며, 은하와 별들을 낳은 우주는 결국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같은 환경도 제공하게 되었지. 시간에 따라 비가역적인 현상을 양산하는 물리법칙은 우리에게 과거와 현재, 미래의 구분을 강제하지.

우주의 나이는 몇십억년이라고 물리학자들이 추정하지. 우주는 어느 순간 태어났고, 몇십억년간의 별들의 역사를 과거라는 시공간에 보존시키고

열역학 제 2법칙이 이것을 증거해주는 제일 대표적인 법칙이지. 고립된 시스템의 엔트로피는 시간이 흐르면 증가하게 되어 있어. 름에 따라 고립된 시스템의 열역학 제 2법칙 설명”. 엔트로피(entropy)의

우주배경복사. 빅뱅.

물리학에서 쓰이는 대부분의 공식들은 사실 시간에 대해 가역적이야.

우주가 만들어지고 시간에 따라 진행되는 과정은 무언가 이 모든 활동이 의미가 있음을, 또는 어떤 목적을 향해 이뤄지고 있어.

먼저, 인간의 역사는 의미가 있다는 것을 짚고 넘어가고 싶다. 그저 자연법칙에 순응하여 의미없이 태어나고 죽어가는 인생들이 아니란 말이지. 물리학자들이 이것을 깨닫게 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어. 첫째는 시간에 방향성이 있다는 거야.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흘러. 미래에서 과거로 흐르는 경우는 절대 없지. 지나버린 과거의 사건은 그렇게 시공간의 좌표에서 고정되어버려. 우리가 바꿀 수 없어.

우리가 학창시절에 배운 수많은 물리법칙들은

예수 부활의 구체적인 의미를 따져 묻기 전에, 우리는 근본적으로 신의 행위에 목적성이 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어. 신이 손수 기적을 일으켜가며 굳이 인간사에 간섭할만큼 세상을 향한 목적이 있는지, 관심이 있는지, 아니면 자연법칙에 따라 진행하며 될대로 되라고 내버려두는지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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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개 3: 부활 기적의 의미 탐구

전개 셋, 부활 기적의 의미 탐구

신이 존재한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기적에서 안전하지 못해. 기적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이천여 년 전 이스라엘의 역사를 연구하면,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해. 바로 예수는 부활했다는 사실이야. 이것 말고는 예수의 죽음 뒤에 일어난 무수한 사건들을 도무지 설명할 길이 없어. 저명한 신학자이자 역사가인 칼 브라텐(Carl Braaten)은 이렇게 말했어. “아무리 회의적인 역사가라 할지라도 다음과 같은 사실에 동의한다. 초기 기독교에 있어서 부활은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었고, 신앙의 근본이었으며, 신자들의 상상력에 의해서 만들어진 신화가 아니었다.”(1)

유대인에게 부활이란 육체의 살아남을 의미했어. 몸은 무덤에 있는 채로 영혼이 자유롭게 분리되어 천국으로 가는 그런 개념이 아니었어. 그들에게 부활이란 분명한 육체의 회복을 의미했어. 예수의 죽었던 몸을 기억해보자. 팔과 발의 신경이 끊기고 어깨뼈가 탈골되었으며 채찍질로 온 몸의 살점이 벗겨진데다가 심장과 폐에 창구멍이 뚫렸어. 호흡이 끊긴 이후로 그의 심장은 정지했고, 10분도 채 되지 않아 뇌세포는 죽었어. 몰약과 알로에가 발라졌다지만, 그의 시체는 무덤에 안치된 이틀 동안 얼마간 부패하기도 했을거야. 생물학적으로 도저히 회복 불가능한 몸이었어. 그런데 그가 살아났어. 유대인이 본 것은 회복되어 살아 돌아다니는 예수였어. 몸에 상처자국까지 지닌, 바로 그 예수였어. 이것은 자연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초자연적인 개입이 있었어. 즉, 신이 개입했어. 기적이야.

그렇다면 우리는 마땅히 이런 의문을 품게 돼.

“왜 신은 굳이 인간사에 기적을 일으켰을까? 그것은 의도가 담겨진 일이었을까? 그렇다면 신은 세상을 향해 어떤 목적을 갖고 있는 걸까?”

신의 마음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인간의 역사는 의미가 있다는 것을 짚고 넘어가고 싶다. 아니, 전 우주의 활동은 어느 목적을 향해 진행되고 있어. 물질들이란 그저 물리적인 자연법칙에 순응하여 의미없이 합쳐지고 분리되는 것들이 아니란 말이야.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그저 의미없이 태어나고 살다가 죽어가는 인생들이 아니야. 과학자들이 밝혀낸 자연법칙들은 물리현상들에 의미가 담겨있음을 깨닫도록 도움을 주었어.

첫째, 시간에는 방향성이 있다는 것이 밝혀졌어. 시간은 거꾸로 흐르지 않아. 언제나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흐르지. 이것을 나타내어 주는 물리법칙이 바로 열역학 제 2법칙이야.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이지. 고립된 계에서 추가 에너지의 유입이 없다면 엔트로피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증가하게 되어 있어. 우주의 엔트로피는 마치 우주의 시계나 다름없어. 우주의 엔트로피는 우주의 탄생과 더불어 꾸준하게 증가해왔으며, 그 엔트로피의 총량은 우주의 나이를 가늠케 해주지. 다시 우주의 엔트로피를 줄일 수 없듯이 우리는 시간을 거꾸로 돌릴 수 없어. 이것은 세상이 시간의 축을 따라 한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말해. (세상은 항상 있어오지 않았어. 어느 순간 대폭발이란 사건과 더불어 우주가 시작되었지. 세상은 그렇게 시작되어서 어디론가 미래를 향해 움직이고 있어. 목적도 의미도 없이 그냥 존재하는 게 아니야.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듯이 우주는 목적을 향해 의미있는 항해를 하고 있어. 우리네 짧은 삶이 그렇듯이, 우주도 나이를 먹으면서 지난 과거를 시공간의 벽장 속에 묻고, 새로운 별들의 탄생과 죽음을 예비하지.

둘째, 우주의 존재는 시작이 있었어. 우주가 어느 시점에 탄생했다는 것, 다시 말해 시작이 있었다는

심리적인 시간의 방향성.

우주의 항상성

우주의 태초. 우주는 시작이 있었어. 무신론자들의 경우, 우주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고 할 경우에는 우주의 기원을 굳이 설명하려고 하지 않아도 되지. 그런데 우주는 시작이 있었어. 고밀도의 진공상태였던 우주는 터널효과를 거쳐 고밀도의 불덩이같은 초미니 우주가 되었어. 상전이를 거쳐 팽창해오고, 입자를 만들며, 은하와 별들을 낳은 우주는 결국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같은 환경도 제공하게 되었지. 시간에 따라 비가역적인 현상을 양산하는 물리법칙은 우리에게 과거와 현재, 미래의 구분을 강제하지.

우주의 나이는 몇십억년이라고 물리학자들이 추정하지. 우주는 어느 순간 태어났고, 몇십억년간의 별들의 역사를 과거라는 시공간에 보존시키고

열역학 제 2법칙이 이것을 증거해주는 제일 대표적인 법칙이지. 고립된 시스템의 엔트로피는 시간이 흐르면 증가하게 되어 있어. 름에 따라 고립된 시스템의 열역학 제 2법칙 설명”. 엔트로피(entropy)의

우주배경복사. 빅뱅.

물리학에서 쓰이는 대부분의 공식들은 사실 시간에 대해 가역적이야.

우주가 만들어지고 시간에 따라 진행되는 과정은 무언가 이 모든 활동이 의미가 있음을, 또는 어떤 목적을 향해 이뤄지고 있어.

먼저, 인간의 역사는 의미가 있다는 것을 짚고 넘어가고 싶다. 그저 자연법칙에 순응하여 의미없이 태어나고 죽어가는 인생들이 아니란 말이지. 물리학자들이 이것을 깨닫게 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어. 첫째는 시간에 방향성이 있다는 거야.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흘러. 미래에서 과거로 흐르는 경우는 절대 없지. 지나버린 과거의 사건은 그렇게 시공간의 좌표에서 고정되어버려. 우리가 바꿀 수 없어.

우리가 학창시절에 배운 수많은 물리법칙들은

예수 부활의 구체적인 의미를 따져 묻기 전에, 우리는 근본적으로 신의 행위에 목적성이 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어. 신이 손수 기적을 일으켜가며 굳이 인간사에 간섭할만큼 세상을 향한 목적이 있는지, 관심이 있는지, 아니면 자연법칙에 따라 진행하며 될대로 되라고 내버려두는지 알아보자.

난 신은 선하다고 전제했지. 그리고 그 이타적이고 선한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주장했어. 그리고 그 창조된 세상에서 인간이란 존재는 절대적 타자성과 자유의지를 부여받아

신은 인간을 비롯한 자연을 붙들기 원해.

그리고 그는 인간에게 끊임없이 이성적 추론의 능력을 부여한다고 전제했어. 신이 끊임없이 인간을 붙들고 있는 셈이야. 물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는 인간의 절대적 타자성과 자유의지를 자신마저도 조종할 수 없는 영역으로 남겨두었다는 것이야.

전개 넷. 하나님의 메세지. 부활한 예수는 메시아의 표상. 그렇다면 메시아가 가리키는 것은 무엇이며 유대인과 더불어 인류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사망의 이김)

범신론과 이신론의 정리.

하나님이 인류에게 지속적인 관심을 쏟고 관계한다고 할 때, 우리의 역사와 삶을 재조명되지. 예수의 부활을 다시 한 번 살펴보자. (톰 라이트의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 나라’를 잘 활용하자)

유대인들은 부활에 관심이 많았어. 저 마지막 날에 부활이 있다고 그들의 신이 약속했고, 그들은 그것을 믿었어.

그런데 예수는 갑자기 세상 끝이 도래하기도 전에 부활했어. 이것이 유대인들에게는 충격이었어.

그렇다면 죽었다 살아난 예수는 누구이며, 부활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이야기를 꼭 해야할 것 같다. 성경에 기반한 것들이 많으니까, 잘 써보자.

예수가 유대인이었던 것을 기억하자.

신이 존재해서 기적을 베푼다면, 의미있는 기적을 베풀 것이다.

과거와 시간의 의미. 열역학 제 2법칙에 의한 시간의 방향성.

이스라엘의 인류 대표성. 예수의 대표성.

죽음을 이긴 예수. 다시 말해 구원을 줄 수 있는 것이다 이거야. 내가 원죄를 전제했지? 인간의 한계성을 뛰어넘어 구원을 줄 수 있는 것은 선한 신이야.

그 선한 신은 구원을 줄 수 있다고 이야기했어.

전개 셋, 부활의 의미와 예수 다시보기. 유대인들은 왜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했는지?

또는, 하나님은 기적을 재미로 일으키지는 않는다. 하나님 행위의 역사성.

부활한 예수는 하나님이다

전개 넷, 자존적이고 독자적인 그 초자연적인 존재는 바로 기독교의 하나님이다. (삼위일체 교리를 설명해야만 하나? 아니 그럴 필요없다. 추가적으로 예수가 가르친 문화를 살펴보자. 도저히 그 시대에서 상상할 수 없는 문화다. 아이 존중. 남녀평등. 겸손에 대한 가르침들. 예수는 부활했으니 그를 믿어라? 유대 역사에서 유대민중이 그를 메시아로 인정한 이유. 그리고 그의 말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유추)

전개 다섯, 그렇다면 기독교는 무엇을 말하는가? 기독교 세계관.

예수가 눈 앞에 딱 나타나도 믿게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예수의 본질은 예수의 몸 안에 숨어 있으며, 우리가 보는 것은 그 몸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같이 살면서, 같이 함께 하면서 몸을 통해 흘러나오는 그의 인격과 신격을 통해 우리를 그를 알아가는 재미를 맛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천천히 그를 알게 됩니다.

믿음이 영원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우리를 타자화하셨기 때문입니다. 그와 우리 사이에 에덴동산을 두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를 아는 것은 아버지로서 압니다. 믿음은 아는 것으로 승화될 것입니다. 지식으로 발전될 것입니다.

(1) 예수는 역사다, 리 스트로벨 지음, 3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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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예쁜 여자를 좋아하는 이유

어제 남녀 간 차이에 대해 설명하는 동영상을 보았다.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의 저자인 John Gray의 특강이었다.

여성은 자신의 남편이 얼마나 자신을 사랑해 주는 가를 자랑한다.

남성은 자신의 아내가 얼마나 사랑스러운가를 자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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