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에 대한 초고

0. 글을 쓰게 된 동기

프레시안은 제가 좋아하는 신문입니다. 독자가 원할 만한 여러 자세한 내용을 전문적으로 분석하여 글이 실립니다. 적잖은 글쓴이들이 글 속에 자신을 담습니다. 자신을 살피고 가다듬는 분들의 글이어서 그런지 글 속에 글쓴이가 숨어 있지 않습니다. 당당하게 자신의 노력을 나누고, 자신의 생각을 싣습니다. 열정어린 글쓴이의 생각, 의견, 때때로 감정까지도 고스란히 독자에게 전달됩니다. 편집되어 글쓴이의 얼굴이 가린 듯한 또는 포장된 듯한 글이 아닙니다. 저는 이 글들을 좋아합니다.

기독교 원론에 대한 글을 한번 기고해 보고 싶었습니다. 사회 정치면을 둘러보면, 한국 교회가 당면한 문제점들에 대한 지적이 다양합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기독교인이 이렇게 행동하는지에 대한 분석이 부족한 것 같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한국 교회에서 줄곧 생활해 온 저는 그 행태가 다소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모든 독자들에게 공감이 될 만한 배경 설명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더 나아가 교회 밖의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한 문제를 지적할 때, 기독교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부족한 것 같다는 느낌이 많이 들었습니다. 교인들이 믿는 성경 구절을 몇 가지 상기시키며 그들을 비판하지만 그 성경구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기독교 세계관에서 어느 위치와 어떤 의미를 의미하는지 이해하고 있는지 불분명했습니다. 올바른 성경에 대한 이해. 이것은 성경을 읽는 이에게는 매우 중요합니다. 4천여년에 걸쳐 씌여진 책이라 씌어질 당시 그 시대의 문화와 역사, 언어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진의를 파악하기 힘든 책입니다. 신학의 역사가 2천여년에 달합니다. 수많은 성경 연구가와 기독 실천가들이 깨달아 어느 정도 동의하는 기독교 밑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습니다. 현대인이라면 기본 틀 정도는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더구나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라 믿는 이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습니다. 종교인이란 대저 그가 믿는 신념에 의해 행동하기 마련입니다. 그 행동 너머에 있는 신념, 교리, 믿음. 이런 것들을 보편적 언어로 잘 설명하고 묘사한 글들을 별로 보지 못했습니다. ‘기독교란 무엇인가’ 란 명제에 대해 써보고 싶었습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은 기독교인들의 생각을 읽는 것이며, 그들이 실행에 옮기는 양식도 깊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는 제가 가진 생각들을 정리할 기회도 됩니다. 그리고 많은 독자들과의 소통으로 ‘기독교 사상’에 대한 저의 이해도 보완되고 발전하리라 기대합니다. 저는 일부 기독인들이 스스로의 종교를 왜곡하여 이해하고 있는 몰이해에 대해 설명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순전히 ‘기독교란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습니다. 그 이유는 저와 다른 시각을 가진 분들이 제 글을 읽고, 서로 배우고 보완하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제 이야기는 얕습니다. 소위 복음주의자들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이는 기독교에 대한 이야기를 적을 것입니다. 평신도이기 때문에 전문적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며, 그래서 용기를 내어 글을 적어봅니다. 오랜 시대에 걸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공통적으로 믿어온 복음주의 기독교 원론을 엄밀하게 정의되지 않은 평어로 묘사할 것입니다. 제 스스로도 지금까지 기독교 사상에 대한 이해가 여러 번 바뀌었습니다. 앞으로도 바뀔 것입니다. 지금 혹 저의 글을 읽는 신학자, 목회자, 철학자 분들이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로 훗날 스스로 저의 글을 읽고서 부족한 독서량과 몰이해를  부끄럽게 느낄 것입니다. 다만, 저보다 뛰어난 많은 분들이 이 영역에 헌신하는 게 적다고 느낀 바 자연스럽게 동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만약 선한 신이 존재하고, 그 신이 우리에게 이성을 주었다면 우리는 가진 만큼 그것을 최대한 활용하고 그 열매를 향유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권리일 것입니다. 악이 존재한다면, 우리의 행복과 번영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그 악을 분명히 인지하고 배제하며 포용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 의무에서도  이성이 큰 역할을 담당합니다. 부족하나마 할 수 있는 한 날카로운 이성의 메스를 들어 해부한 기독교 원론을 펼쳐보이고 나눠보고자 합니다.

1. 전제

인간 또는 인간들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신이 되지 못하는 내재적 한계성. 이것을 기독교에서는 ‘죄’라고 부릅니다. 예외없이 죽음을 맞이하는 모든 인간에 대한 유죄 선고. 원죄. 이것이 기독교의 출발이며 대전제입니다.

“(수정) 인간 또는 인간들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구원을 얻지 못하는 내재적 한계성. 이것을 기독교에서는 ‘죄’라고 부릅니다. 구원을 얻지 못하고 예외 없이 죽음을 맞이하는 모든 인간에 대한 유죄 선고. 원죄. 이것이 기독교의 출발이며 대전제입니다.

“모든 무신론자와 비기독교인들은 이 질문에 답해 주십시오. 현 천체물리학의 연구에 따르면, 태양의 수명은 한계가 있다고 합니다. 태양이 커져 금성 어귀에까지 이르도록 팽창하고 그 이후에는 급속히 수축하여 별의 종말에 다다르게 된답니다. 태양이 굳이 없어지기 전이라 하더라도, 태양광의 변화는 분명 지구의 생태계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그렇다면 우리 지구인과 지구는 어떻게 생명을 존속시킬 수 있을까요? 과학의 발달로 이를 모두 막고, 커버할 수 있나요? 그럼 너무 먼 미래를 상상하지 말고, 가까운 미래를 그려보지요. 소행성의 충돌. 빈번히 천체물리학자들에 의해 회자되고 경고되는 지구종말 원인 중 하나입니다. 그리 멀리 갈 것도 없이, 지구가 소행성과 충돌하여 인류 멸망을 초래할 확률이 그리 낮지 않다고 하는군요. 자, 하나 묻겠습니다. 지구가 멸망한다. 인류가 멸망한다. 그러면 우리 삶이 무슨 의미가 있나요? 우리가 이 땅에서 하는 일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요?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 그 이름 석자 기록해 둔 것도, 그 이름 알아줄 후세인 하나 남지 않아버릴 수 있는데, 이런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요? 묻습니다. 여러분은 유한한 삶에서 어떻게 의미를 찾으십니까? 다른 곳에서 답을 주실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도전인 동시, 여러분의 성찰을 촉구하는 바입니다. 개독교라 욕하는 분들. 제게 가르쳐 주십시오. 인간의 삶의 의미란 대체 무엇입니까? 바로 보여줄 수 없다면, 어디서 희망을 찾을 수 있는 겁니까?”

“구원의 의미. 무한성. 영원하고도 항상 새로운 행복”

구원이란 무엇인가. 온전하고 영원한 실체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에 악에 대한 징벌이 마무리되는 시점에서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를 연구하면, 구원을 얻은 인간의 실체와 그의 삶이 어떠한지를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로마서 3장 23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한편, 반대로 신에게 의존하지 않는 타종교에서는 인간 스스로 그 한계성을 극복하고 영원의 실체에 도달할 수 있다고 전제합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내재적 한계성 즉, ‘원죄’ 따위는 없다고 가정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신’이라는 것에 대해서 잘 정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제를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인간이 스스로 구원을 얻지 못해 신에게 의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 안에 구원이 없기 때문에 구원을 줄 수 있는 타존재, ‘신’에게 의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신’의 첫번째 요구조건이 있습니다. ‘신’은 인간에게 구원을 줄 수 있는 존재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모든 악과 고통이 사라지고 인간과 자연의 유한성이 극복된 상태. 즉, 완전하고 선하며 영원한 것을 의미합니다. 당연히 그런 구원을 줄 수 있는 신은 완전하고 선하며 영원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신의 특성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기서 ‘선’이란 무엇이고 완전함이란 무엇인지에 대해서 깊숙이 논의하지는 않겠습니다. 첫째는, CS 루이스가 그의 책 ‘순전한 기독교’에서 언급한 것처럼절대온도 3도의 춥고 어두운 저 심연의 우주 가운데서, 더구나 이기적인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 인간이 음울하고 악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지 않고, 오히려 따뜻하고 선하고 도덕적인 것을 상상하고 추구하는 것처럼 도덕과 선은 우리가 자연적으로 체득해 익히 알고 있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엄밀히 설명하지 않아도 우리 모두는 우리 양심에 근거하여 대강 선한 것이 어떤 것이며 그것이 좋은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둘째는, 그에 대해 엄밀히 철학적으로 논의하기에는 서론이 너무 길고 지루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제가 굳이 ‘신 또는 신들’이라고 표현하지 않은 이유는 신은 하나이냐 또는 여럿이냐를 밝히는 명제가 제 글의 전체적 흐름에 크게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애독하시는 분들은, 다신교에 반해 유일신교가 가지는 내재적 배타성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계실 수도 있을 겁니다. 내가 믿는 신만이 진짜다 해서 다신교를 배격한다는 겁니다만, 저는 인간이 신을 믿는 목적(구원)을 생각해봤을 때, 그것은 부차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구원을 준다는데 유일신이든 다신이든 그게 중요할까요. 다만 구원을 준다는 유일신이 기독교에서는 ‘예수 천국 불신 지옥’으로 대변되는 좁은 길, 매우 독선적으로 보이는 그 길만 따라와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니까 거기서 근본적 반발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제 글에서는 일단 ‘신’만으로 명시하겠고,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신, ‘여호와’에 대한 이야기로 좁혀질 때는 ‘하나님’으로 부르기로 하겠습니다.

기독교의 출발이 ‘죄’라면 기독교의 끝은 구원입니다. 신에 대한 것은 구원을 이야기할 때 다시 깊게 들어가기로 하겠고, 다시 ‘죄’에 대해 좀더 자세히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인간의 한계성을 왜 굳이 법률적 용어인 ‘죄’로 부르는 걸까요? 그것은 성경을 쓴 유대인들의 언어, 히브리어를 찾아보면 좀 더 이해가 쉽습니다. 히브리 원어로 ‘죄’는 ‘과녁에서 벗어남(miss the mark)’ ‘directed against God’이란 뜻입니다.  (참조: IVP NB Dictionary)

세상의 타락됨.

자연의 타락, 자연 재해, 연대성, 경쟁하며 자라는 식물들, 서로 잡아먹는 동물들, 계몽주의, 자유주의, 포스트 모더니즘,

결국 기독교에서는 사람 뿐 아니라 자연도 과녁에서 벗어나 있다고, 온전하지 않다고 전제합니다. 그것은 다음 성경구절에 비추어 보면 자명합니다. “양과 사자가 함께, 등등…”

적어도 자연과 인간이 공생하는 것이라면 쯔나미, 화산폭발, 태양광 중 해로운 UV,  등등이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것.

타락되지 않은 상태는 어떠해야 할까요?

잠시 기독교의 해답부터 먼저 보겠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사랑을 가장 큰 가치로 여깁니다. 사랑은 이렇게 정의해 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세계를 붙드는 질서 또는 원칙.

죄는 어디에서 왔나요? 악이 유혹했고, 사람이 선택했다고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신학적인 이야기입니다.

왠만하면 신학적으로 쓰지 말고, 철학적, 논리적으로 쓰자. 철학에서 이야기하는 타자의 개념. 자유의지. 독립된 개체.

(기독교의 끝은 구원입니다. 기독교를 믿는 모든 이들은 이 유한성 원죄를 극복하고 신적 구원을 얻고자 합니다.) 이 대전제에서 잘 정의해야 할 것은 ‘신’입니다. 대전제가 주장한 것은 결국 인간은 유한하다는 겁니다. 신은 그 유한성을 극복케 해 줄 유일한 해결사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이 어떤 유한성을 갖고 있고, 그 유한성을 왜 극복해야 하며, 왜 극복하길 원하며, 그 해답의 열쇠가 되리라 기대되는 신이란 대체 어떤 존재인지 설명해야만 합니다. (어떻게 회복되어지는 지는 ‘믿음과 구원’ 파트에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첫째, 유한성. 인간은 모두 죽습니다. 이것은 현재까지 귀납적으로 증명된 과학적 사실입니다. 아무리 부귀영화를 누리고 살았다 하더라도 기나긴 우주의 시간 속에 인간의 백년 남짓한 삶은 찰나에 지나지 않은 듯 보입니다. 유한한 생명. 결국 소멸해 버리고 말 인간들의 삶 속에서 그 삶의 의미를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의미란 영원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영원히 남을 무엇, 소멸되지 않아야 할 무엇을 갈구합니다. 결국 영원히 존재해야 의미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 그것은 공허합니다. 모든 이들이 갖는 공허감. 이것은 두 가지를 설명합니다. 인간은 유한하다는 것과, 인간은 그것을 극복하고 싶어한다는 겁니다.

<전도서 인용>

그 영원함을 가진 존재. 의미가 있는 실체. 그것을 신이라 명명해 보겠습니다. 그렇다면 인간 또는 인간들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신이 되지 못하는 내재적 한계성. 그것을 기독교에서는 죄라고 정의합니다. 반대로 신에게 의존하지 않는 타종교에서는 인간 스스로 그 한계성을 극복하고 영원의 실체에 도달할 수 있다고 전제합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내재적 한계성 즉, ‘원죄’ 따위는 없다고 가정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죄’. 성경에 쓰인 히브리 어원을 찾아보면 ‘멀어짐’이란 뜻입니다. 즉, 하나님과 인간의 멀어진 상태를 죄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인간과 다른 독립된 개체로서 신이 존재한다고 가정합니다. 그리고 그 신은 좋다, 혹은 선하다고 가정합니다. 그 신은 자신의 선한 성품이 반영된 법칙으로서 자연사회와 인간들을 다스리고자 합니다. 그 법칙을 한단어로 압축하면 ‘사랑’입니다. 이같은 관점에서 ‘사랑’은 하나님이 자신의 창조세계를 붙들고 있는 질서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인간 또는 인간들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신이 되지 못하는 내재적 한계성. 그것을 기독교에서 죄라 정의합니다.

여기서 신이라 함은, 죽음으로 대변되는 인간의 한계성. 인간이 절대선이 되지 못할 뿐더러, 이루고 만드는 창작물들도 절대 선하지 못하고, 인간과 더불어 인간의 창작물이 유한한데서 오는 한계성의 반대되는 것입니다.

한편 기독교에서 하나님이라 부르는 신은 다음과 같이 전제됩니다.

일단 좋은 분입니다.

좋다는 것은 발전하는 인간의 이성과 더불어 새롭게 정의되는 영역입니다. 지금까지 이해되고 발전된 것으로는 다음을 들 수 있겠습니다. 사랑, 자비..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이 할 수 있는 것. 하나님이 할 수 없는 것.

1. 하나님이 할 수 없는 것과 관련하여 ‘자유의지와 예정’ 상관관계 설명.

철학에서 이야기하는 ‘타자’란 개념. 기독교에서는 이를 원수라고 합니다.

서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원수들이 철저하게 신에게 자신의 자아를 굴복시킴으로서 신의 성품을 받아, 원수들과 사랑하고 공생할 수 있는 것이 기독세계의 작동원리입니다.

1. 고통에 대해서

고통은 그 자체로 좋은 것이 아닙니다. 아프고, 괴롭고, 싫은 것이 고통입니다. 좋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악의 범주에 집어넣습니다. 그렇습니다. 고통은 그 자체로는 악입니다. 그런데 고통은 다른 악과는 다르게 긍정적인 결과를 양산할 때가 많습니다. 동정, 연민… 등등

고통도 범주에 따라 나눌 수 있습니다. 좋은 일을 하지만, 악인의 박해로 받는 고통이 있을 수 있고, 자신이 죄를 지어서 그에 대한 정당한 대가로 받는 고통이 있습니다. 허나, 죄에 대해 지나친 고통을 받을 때도 있기 때문에, 그 초과의 고통은 정당한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한편, 선한 의도로 무엇을 했으나 결과는 악을 초래했을 때, 이 사람은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 악한 의도로 했는데, 좋은 일이 된 경우..

뭐, 행위의 정죄함에 대해 여러가지 분류를 해 볼 수도 있지만 각각의 경우를 모두 능숙하게 다룰만큼 저는 신학과 윤리학이 깊지 못합니다.

1. 고통의 의미

결론부터 이야기하겠습니다. 인류가 겪는 긍정적인 고통과 어려움은 모두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유용한 원료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 원료들을 사용해 어떻게 새로운 하늘과 땅에서 의미있는 건축작업을 하실지는 잘 모릅니다. 그것은 추후 신학자들과 기독교 작가들의 노력을 통해 아름답게 설명되고, 그려질 수 있는 부분입니다.

고통은 하나님의 더 나은 동역자라는 권위의 상징이 됩니다. 실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을 주장할 때, 하나님의 인치심 뿐 아니라 자신의 겪은 고통을 권위의 근거로 들었습니다.

1. 고통과 악에 대한 승리 – 십자가

어려운 부분. 함께 성경을 공부하는 사람들과 더 깊게 공부하고 토론하는 중입니다. 어떻게 인류의 죄와 고통, 악이 모두 십자가에 달린 예수에 집중되어 단 한번에 예수의 대속으로 사라질 수 있는지, 그 악의 전이과정, 십자가가 그것을 없애는 과정, 없앴다는 증거 등등에 대해 더 깊은 이해가 필요합니다만 저는 잘 모릅니다.

1. 하나님의 나라는 천국이 아니다

톰 라이트의 인용. 철저하게 surprised by hope의 내용을 배워 적은 것에 불과합니다.

1. 복음이란?

1. 하나님의 가족이 된다는 것. 그리고 그 의미.

1. 부록: 악의 기원에 대해서 – 어떻게 추론할 수 있을까?

1. 창조, 타락, 구속

1. 과학 vs. 종교?

1. 천국과 지옥에 대한 설명

1. 하캉의 이야기. 우리는 허상에 건물을 지었다. 기독교 목사라서 안심하십니까. 여기서 선과 악의 경계는 우리 모두를 지난다는 이야기를 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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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epsky3에 대하여

Stanford Grad Stud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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