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intro

한국 기독교. 우리 시대의 뜨거운 감자가 되어버렸습니다. 필요악이랄까요. 사회봉사와 다양한 공동체의 구성. 현재까지도 대한민국에서 이뤄지는 90% 이상의 사회봉사는 이 종교인들의 헌금과 봉사로 이뤄지고 있습니다. 사회 양극화로 인한 많은 이의 정신적 박탈감을, ‘한’으로 대변되는 우리 민족의 많은 아픔을 이 종교는 ‘사랑’과 ‘용서’라는 기치 아래 달래주는 데 적잖은 역할을 했습니다. 인적 네트워크의 장으로서, 여러 선남선녀들의 중매역할도 톡톡히 수행했습니다. 수많은 교육기관과 병원을 지었으며, 이민사회에서 교민들을 묶어주는 구심점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습니다. 역사적으로도 무시못합니다. 1919년 3월 1일, 민족 독립 선언을 기초한 민족대표 33인은 16명의 기독교인, 15명의 천주교인, 1명의 천도교, 1명의 불교인으로 이뤄졌습니다. 물론 한용운 스님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추후 안타깝게 변절의 길을 걸었습니다만, 이 한 실례만 보아도 한국 기독교가 한국 사회에 미친 순영향은 무시못할 수준입니다.

그렇게 커져버린 교회는 현재 어떠합니까. 인구 오천만도 채 안 되는 동방의 이 나라에 세계 최대 대형교회 10개 중 5개가 있답니다.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번 째로 많은 선교사들을 파송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일본제국주의에 굴복하고, 군부독재와 타협하면서 진리를 ‘조금’ 포기하는 대신 핍박 없이 자란 교회는 덩치만 부쩍 커져버렸습니다. 정치와 사회에 대한 고민을 더 이상 교회가 담당하지 못하면서, 성경에 대한 이해도 편협해져 버렸습니다.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에 전혀 새로운 해결책을 제시해 주지 못한채 자신의 연약한 이성적 뿌리가 흔들리지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 과거의 어떤 사상을 꼭 붙잡게 해주는 구태만 보여주고 있습니다.

개독교. 그것이 현재 기독교의 별명입니다. 그들이 내건 ‘사랑과 용서’의 기치도 이젠 외부인들에게는 집단 최면같아만 보입니다. 사랑과 용서가 뭔지 깊은 이해가 부족하고, 그런 몰이해는 어리석은 행동으로 이어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은 주는 이요 저들은 받는 이라고 생각하나 봅니다. 사랑과 용서가 처절한 겸손에 바탕하지 못합니다. 난 의인이요 저들은 죄인이요 하나 봅니다. 성경에 대한 몰이해로 인하여, 자기 성찰의 부족함으로 인하여, 그들에게는 선과 악의 경계가 교회 밖에 존재하는 줄 아나 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캉이 이야기한 대로 우리 모두는 허상 위에 지어진 집들입니다. 우리의 타락된 껍질이 모두 부서지고 벗겨질 때까지 우리는 신 앞에 바로 서지 못합니다. 한 점 부끄럼 없이 깨끗하지 못하면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선악의 경계는 교회 안으로, 모든 기독교인의 심장 한 가운데로 지납니다. 그 누구도 자신은 의롭노라 할 수 없습니다. 시인 바이런이 노래했듯이 ‘슬픔은 지식’입니다. 고통을 함께 나누고, 슬픔에서 지식을 얻기를 거부한 그들의 교만과 몰이해는 이제 전국민의 증오와 분노를 사기에 충분해져 버렸습니다. 성경은 고통과 슬픔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책입니다. 다양한 악의 모습을, 그 행태를 그대로 드러내 주는 책입니다. 그리고 신이 고통과 슬픔을 야기한 악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어떻게 인간과 자연의 구원을 이루는 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입니다.

그래서 글을 써봅니다. 저는 성경에 대한 공부도 체계적으로 받지 못한 평신도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과학을 공부하는 학생입니다. 나름 세계 최고의 과학자들을 선생으로 두고 있는 운좋은 학생입니다. 그 과학과 날카로운 이성의 잣대로 기독교를 해부해 보려 할 때마다 째진 틈 사이로 새어나오는 진리의 광채에 도리어 경악하고만 하는 경험을 수차례 했습니다.

저는 우습게도 이 기독교에 대한 소개글을 써보려고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개독교’가 아니라 ‘기독교’에 대한 글을 써보려고 합니다. 신학의 역사는 무려 2천여년에 달합니다. 다양한 사상과 과학적 논증을 통한 공격으로도 기독교는 타격을 별로 입지 않은 듯, 현재 21세기 가장 많은 이들이 귀의한 종교가 되었습니다. 저는 과학을 공부하는 사람입니다. 신과 인간의 재회를 이야기하는 초월의 종교를 저의 좁은 이성에 가두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이성으로만 기독교를 따지고 물어 뜯어도 저는 오히려 거기서 발견하게 되는 새로운 기독교의 진리의 힘에 경악하게 됩니다.

이 글을 쓰는 효과로서 다음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첫째, 조금이라도 성경을 가르치는 역할을 맡은 이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하는 바램에서입니다. 아울러, 이 글을 읽고 받게 될 조언을 통해 제가 더 나은 배움을 얻고 싶습니다.

둘째, 기독교에 대해서 비판하는 많은 분들에게 더 나은 비판을 드릴 수 있는 여지를 주기 위함입니다. 신문과 뉴스에서 교회와 성직자, 혹은 교인들의 비도덕적, 비상식적 행태를 많이 비판하는 것을 듣고 봅니다. 그런 행태는 대부분 하나님과 성경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양자 모두 성경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도달하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고, 결국 행동을 야기하는 원론에 대한 토론으로 그 비판이 발전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의 죽음 이후 이천여년간 예수를 직접 보고 경험한 사도들의 권위와 그들이 인정한 정경 66권에 의해 그 줄기는 이어져 왔습니다.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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