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을 받는 이는 왜 그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에게 화가 날까?

루이스는 그의 책에서 이런 내용을 썼다.

복수라는 감정. 내가 받은 고통을 그에게도 똑같이 경험시켜 주고 싶다는 욕망입니다. 그 생각에는 긍정적인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도 합니다. 네가 내게 행한 일들이 얼마나 악한 일인지 너로 하여금 깨닫게 하여주겠다 하는 정의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물론 순전히 증오로 뭉친 복수심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순수한 분노의 감정에 우리 인간이 갈구하는 정의감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내가 우울증을 겪고, 남들 모르는 그 진한 어둠 속에서 숨막히는 고문을 받으며 살아갈 때, 나의 우울증을 가볍게 여기는 이들에게 적잖이 화가 났었다. 중보기도해 준다는 사람에게, 저 정도 사람이면 우울증을 확 경험해버려도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면서도 그런 생각을 하는 내 자신에게 소스라치게 놀라곤 했다. 왜 이런 생각이 들까? 좋은 생각이 아닌데 하면서 마음을 다잡았지만, 이런 생각은 그치지 않았다. 날 도와주겠다면서 특히나 내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화가 났었다. 미웠다. 그리고 그렇게 화가 나는 내 자신 역시 매우 미웠다.

여기에도 정의감이 섞여 있는 것 같다. 내가 겪는 고통은 그 자체로 악이다. 하나님께서 선하게 쓰시리라 믿지만, 고통 자체는 악이다. 그러나 적잖은 좋은 결과를 양산하는 악답지 않은 악. ‘소독된 악’이다. 그 악을 인식하지 못하는 타인에게 화가 나는 것이다. 특히나 관심을 쏟고, 나를 사랑한다는 이들이 그것을 인식하지 못할 때 큰 화가 난다. 다시 말해 얼마나 악한 일들이 내게 자행되고 있는 지, 현재 네가 특히나 위한다는 내가 얼마나 악에 사로잡혀 있는지, 네가 모른다는 그 사실. 악을 인식하지 못하는 그 무감함. 정의에 대한 둔감함에 화가 나는 것 같다.

복수에 대상자에 대한 분노감도, 상당수는 그 정의에 대한 둔감함에 기인하는 것이다. “내가 당한 만큼 너도 당해봐라.” 이것은 “그리고 깨달아라. 네가 행한 짓이 얼마나 악하고 어리석은 짓이었는지.” 라는 결과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동시에 용서로 메꾸어지지 않는 내 감정의 상한 부분을 복수로 인해서 달래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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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epsky3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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