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과 지옥, 종말에 대한 편린 모음

천국에 대한 상상 (source)

우리가 현재 계발한 물리 법칙들.

열역학 제 1법칙. 소스텀만 추가되면 될 듯하다.

사랑이라는 유선만 좇아가면 더더욱 source의 영향이 강해지는 법칙.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는 확실히 시공간을 지배하는 물질계 법칙까지 바뀌나, 현재 우리 시대에는 영적인 것만 영향을 받는다. 물적인 것은 큰 영향이 없다. 행복하고, 긍정적이면 건강해지고 가끔 의학계의 기적이라 불리는 극적인 회복이 가능해진다.

지옥에 대한 상상 (sink – black hole)

슈바르츠실트(Schwarzschild) 반지름. 태양의 반지름이 3km 이내가 될 정도로 수축하면 블랙홀이 된다.

천국의 법칙은 이 땅의 법칙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소스’ term이 추가될 뿐이다.

열역학 제 1법칙에는 source term이 추가된다. 에너지원이 있고, 그 에너지원은 엄청난 열과 빛을 내뿜는 태양과 같이 거대한 질량이 압축되어 있으며, 그 질량은 우리 사람을 ‘사랑’이라는 만유인력으로 끌어당긴다. ‘믿음’과 ‘소망’도 집어넣어야.. (왜 믿음은 영원한 것일까? 예수님을 보면 분명해지는 것이 아닐까?)

시간과 공간축에 대해서는? 과거와 현재, 미래를 모두 한 곳에 담는 그릇이 마련되어야 할 것 같다. 어떤 곳일까?

결론: 왜 우리 삶에서 바쁘게 살 필요가 없는가? 진보에 대한 신화를 깨고 싶다.

NT Wright가 깔아준 밑그림 덕분에 우리는 한시름 놓았다. 신학자들의 진부한 세계관 논쟁을 정리한 뒤(전쟁과 평화 참조), NT Wright가 정리한 것. 우리는 예수가 마련한 터 위에 집을 짓기만 하면 된다는 것.

내가 과학자라고 해서 지금까지 계발한 수학, 물리 공식들이 하나님 나라에서 무의미하게 되지 않을 것이다. 소스텀만 추가되는 정도랄까? 우리가 일한 아름다운 결과물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재료가 될 것이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우리 일한 게 쓸모없는 건 아닌가?

진보에 대한 허상을 버리라. 여전히 우리 일하는 것은 가치가 있다. 왜냐? 우린 일하는 것을 일단 좋아한다. 예수는 이 땅을 온통 쾌락으로 채워놓았다. 일하는 즐거움. 에덴에서도 아담과 이브는 동산지기 일을 했다. 피조물들 이름을 붙였다. 온갖 동식물들 이름 짓는 작업도 현재에도 진행되는 일이며 (심지어 멸종된 생물까지도 무덤을 파헤쳐 분석한 뒤 이름을 붙이고 있다), 온갖 자연법칙을 발견해 내 기술하고 명명하는 것은 이와 무엇이 다른가?

그리고 이렇게 발견된 법칙은 우리 삶에 유용하다.

우리 삶의 목적 중 하나. 거룩함. 노아의 홍수를 기억하자. 인간은 악을 선택할 수도 선을 선택할 수도 있다. 그리고 너무 악해져 어느 임계점을 넘어버린 이는 아무도 구할 수 없다. 스스로 돌이켜 악을 버릴 수 밖에 없다. 악을 발전시켜 선으로 만들 수는 없다. 그리스도인의 역할은 빛과 소금. 세상의 부패를 막는 일이다. 세상을 악으로부터 구하는 일이다. 소극적으로는 세상의 악이 커져 임계점을 넘어, 하나님의 처절한 심판을 받지 않게끔 심판으로부터 우리 스스로를 지키는 역할이 있다. 다행히 성경에는 하나님이 노아의 홍수 이후, 무지개를 통해 그러한 심판이 인류에게 임하지 않으리라고 약속을 하셨고, 그 약속은 묘하게도 당신이 예비하신 빛과 소금같은 사람들에 의해 지켜져 왔고, 지켜질 것이다.

윤리의 발전. 역사의 진보. 이것은 의미가 있는가?

역사의 진보가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 진보에 대한 허상을 버리자. 그것은 찰나의 미래다. 무궁한 역사의 진보를 이룬 신인류가 과학의 발전에 힘입어 영원히 늙지 않고 행복한 시스템과 문화 속에서 산다고 상상해 보자. 과연, 자유의지를 가진 개인 하나 하나 모두의 행복을, 보장해 줄 수 있을까?

자, 솔직해지자. 너무 급하게 생각말자. 우리가 열심히 평생동안 죽으라고 운동하고 데모하고, 공부한다고 해서 세상이 갑자기 선해지지 않는다. 일을 사랑하자. 그리고 일을 즐기자. 먹고 살아야 하는 생존수단. 그 소극적 의미에서 일은 의무이고, 우리 인간의 기본 욕구이기에 일은 우리 행복을 위한, 존재이유를 위한 적극적 의미를 갖는다.

누구에게 들었더라? 생각해보라. 우리는 자는 시간을 빼놓고는 항상 일을 하고 있다. 무언가를 생각하고, 무언가를 하고 있다. 끊임없이 일을 하고 있다. 쉬는 것도 다시 즐겁게 일을 하게끔 하기 위한 재충전의 시간이라 할 수 있고, 균형잡힌 삶을 위한 필수적 시간이다. 동시에 그 쉬는 시간에도 책을 읽거나, 스포츠를 즐기거나, 한가롭게 자유로운 사색을 하면서 색다른 일을 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현 자본주의에서는 안타깝게도 이 휴가의 시간이 연간 몇 일 정도로 제한됨으로써, 노동자가 일을 오랜기간동안 할 수 있게끔 어쩔 수 없이 제공되는 시간 정도로 바뀌어져 버렸다. 자본론에 따르면 노동력 재생산 비용에 포함되는 시간이랄까? 사탄이 뒤틀어버려 부패된 쾌락의 아픈 단면이다.

보다 나은 사회, 보다 나은 정부를 건설하는 사람을 생각해보자. 진보가 결국 의미가 없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바울이 얘기한 대로 우리가 하는 일은 헛되지 않다. 일단 소금 역할을 하는 데서 의미가 있다. 세상에 이뤄지는 악이 철저하게 개인에게만 죄값을 물을 악이 있던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개인은 그 짧은 생애 동안 진보한다. 예수님도 윤리학이 없었나? 그렇지 않다. 희년제도의 회복을 설파하셨고, 안식일 제도의 불합리, 빈부의 불평등에 대해서 역설하셨다. 개인의 윤리에 비해 사회의 윤리는 천천히 회복된다. 일단 개인 몇몇에게 사회윤리 발전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씨앗을 뿌리셨다고 보면 될까?

악에서의 구함. 하나님 뜻의 구현. 사랑을 통해 미리 맛보는 하나님 나라. 복음의 전파. 흠…. 아직도 뭔가 더 명료한 답을 가졌으면 좋겠다.

내가 글을 쓴다면.. 이런 순서가 좋겠지.

‘진보에 대한 환상을 버려라. 더 나은 미래는 없다. 더 나은 현재, 그리고 영원이 우리에게 있을 뿐이다’ – 진보는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 진보의 한계에 대해 고민하고, 그러나 아름다운 진보가 우리에게 주는 궁극적 의미에 대해 논해보자.

‘우리의 희망은…’ – 고린도전서 15:58. 예수의 부활. 하나님 나라의 도래. 현재 나라와 미래의 연속성.

‘하루 7시간 이상의 노동은 죄다’ – 현재는 미래를 위한 한낱 장작감이 아니다. 현재를 살아라. 진보에 대한 환상을 버리고 미련없이 결과를 하나님께 맡겨라.

‘전쟁과 평화’ – 전쟁이라는 악을 없애기 위한 진보의 노력은 필요하다. 사실 악마 입장에서 전쟁은 인간을 타락시키기 위한 훌륭한 도구는 아니다. 우리 인류는 적어도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학문은 매일의 삶에서 우리를 악에서 구출하는 데 도움을 주는 훌륭한 도구가 된다’ – 질병의 정복. 자연의 아름다움. 인간 삶의 풍족함. 곳곳에 숨겨진 쾌락.


고통의 의미 –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저주받은 땅을 갈고, 일을 해야 먹을 것을 얻을 수 있다. 질병과 기아, 증오 등 그 고통의 의미는 어디서 찾을 수 있단 말인가. 고통의 의미는 여러 가지가 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주님을 믿고, 빛과 소금의 삶을 살아라.

그래, 하루 8시간 이상 일하는 건 나에겐 죄다. 일하는 그 자체에서 쾌락을 찾는다면 좀 더 일할 수 있겠지.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내 여러 의무를 소홀히 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서.

악마에 의해 비틀린 쾌락을 좋는 이들을 구하라. 중요한 일이다. 비틀린 세상. 승리한 예수를 알리는 사명.

나는 무슨 봉사를 할까?

어디에 내가 도울 수 있는 예수가 계실까?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으면 될 것 같다. 나눔의 쾌락.

: 저는 부활이 개인의 부활을 담보한다는 차원보다는 온 세상이 부활을 위해서 진행해 나가고 있다는 사실이 더 감동적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지금 온 세상이 궁극적인 재탄생을 향해서 나가고 있다. 이게 역사의 의미다. 이런 말이 좀더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내가 생각했던 복음은 사람들을 포함하여 세상의 상당 부분이 소멸하거나 파괴되거나 망가지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니 천국에 가는 건 좋은데 너무 많이 망가진 상태로 가니까 뭐 크게 소망스럽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이 모든 피조물의 궁극적인 회복의 비전, 고통과 고난 자체가 온전히 극복되는 그런 비전을 품게 만든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 책에 나오는 말 중에, 과거에 일어났던 슬픈 일과 고통들의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채로 마지막만 좋으면 뭐하냐 그런 말이 있잖아요. 부활과 재창조의 복음은 일부분만 좋아지는 그런 세상이 아니라 우주 전체가 변혁되는 그 운동을 하나님이 지금 계획하시고 진행하고 계시다는 것이죠.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으로 인해 천장에 구멍이 하나 뚫린 겁니다. 그리고 그 구멍으로 새어 나오는 또 다른 빛이 우리로 하여금 완전히 다른 세계를 보게 하는 것이죠.

: 그 비유가 아주 적절한 것 같습니다. 저는 최근에 기독교 세계관에 관해 다시 책을 읽으면서, 기독교 세계관이 현대의 다른 세계관과는 달리 존재론적 기초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다시 생각해볼 기회가 있었는데, 바닥에까지 내려가면 그 존재론적 기초의 기둥이 되는 사건이 부활사건이라는 것을 다시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부활 사건은 단순한 선언적 명제가 아니라 역사적 사건이며 그 사건 때문에 우주관 자체가 전혀 새롭게 형성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부활을 복음의 중심에 두는 것이 상당히 중요한데, 지금까지는 상대적으로 속죄 쪽에 너무 집중하다가 보니 부활이 복음에서 부차적인 요소가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또한 속죄마저 개인 구원의 문제와 죽어서 천국 가자는 식의 메시지로만 해석이 되어 버리니까 복음의 어떤 전복하는 힘이 사라져 버린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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