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 편지: 기독교가 전제하는 것들 1 – 원죄

이론을 전개, 논증해나가기 위해서는 전제가 있어야겠지? 내가 공부하는 과학도 ‘보이진 않지만 자연법칙은 존재하며 그 법칙을 따라서 움직이는 물체가 존재한다’라는 전제에서 시작하니까 말이야. 기독교가 전제하는 것들은 무엇일까?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우리 인간에 대한 것부터 찾아보자. 참, 경고 하나. 내 전제는 자연과학적이지 않아. 그럴수가 없어.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아직 과학으로 다 설명하지 못하거든. 영혼이나 의식, 무의식, 그리고 자유의지 등은 우리 오감으로 측정할 수 없는 과학 외의 영역에 들어가. 법칙을 발견할 수가 없으니까. 뭔가 법칙이 있는 것 같더라도 그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측정가능한 물체들이 없기 때문에, 좀체 증명이 불가능하지. 게다가 반복적이지도 않다면… 휴, 과학이라는 도구가 이렇게 무력한 영역이 또 있을까. 뇌과학의 발전으로 인간의 사고에 대한 더 큰 이해가 있기를 기원하며, 이제 전제를 골라보자. 인문과학적인 걸루 말이야.

전제 첫번째, 우리 기독교는 ‘인간 혹 인간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고 전제해. 내가 심오한 철학적 전제들을 다 건너뛰고, 인간의 한계성을 바로 전제해 버린 이유는 이게 제일 가슴에 와 닿을 것 같아서야. 우리 삶을 한번 돌아보자. 세상을 바꿔버릴 것 같은 자신감으로 가득차서 의욕적으로 힘차게 살다가도 또 어쩔 때는 축 늘어져 슬퍼하고 절망할 때 있지 않아? 낙담하고 말이야.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고 외치지만 난 그 자리에 앉지 못한 열등감, 패배감. 건강이 나빠져 업무를 전폐하고 집에서 쉬기만 할 때의 무력감. 내 잘못은 전혀 없는데도 교통사고 때문에, 자연재해 때문에 사랑하는 이들을 잃거나 자신의 건강을 잃은 이들의 깊은 슬픔. 우리 내면은 또 어떻구? 우리 마음 속을 살펴봐도 우리 안의 추악한 이기심, 허영심, 교만함은 좀체 사라지질 않지. 심지어 선행을 가득히 한 날도 남과 나 스스로의 칭찬에 어깨가 으쓱해지며, 자고하는 마음과 남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허영이 슬그머니 마음 속에 들어오지. 그뿐이야? 우리는 결국 모두 죽어. 겨우 백년 남짓 살고 흙에 묻히지. 영원히 살지 못하고, 영원히 행복하지 못할 바에야 대체 우리 삶과 우리 업적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심지어 인류 모두가 백여년 이내 소행성 충돌 등으로 아예 멸망해버릴 수도 있다는데, 대체 인류의 삶이란 그럴 때 어떤 의미가 있는걸까? 성경 전도서에는 인간의 궁극적 한계와 우리 삶의 허무함에 대한 탄식이 가득하지. 지혜의 왕이라는 솔로몬은 노래했어.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과연 그 누가 모든 한계를 넘어서서 선을 이루고 구원을 획득할 수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난 그런 사람은 없다고 봐. 자, 난 지금 내 전제가 옳다는 것을 인문과학적으로 논증하는 중이야. 전제가 옳아야 논증이 의미가 있으니까. 참, 참고로 방금 얘기한 인간의 죽음은 과학적인 증거야. 자연과학은 분자생물학부터 기원해서 이걸 증명해주지. 모든 인간은 죽는다구. 모든 인간은 유한해. 모든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절대선에 다다를 수 없어.

구원은 무엇일까? 구원은 우리가 바라는 무엇이야. 항상 마음 편하고 행복할 수 있는 거라고 할까? 그러기 위해서는 구원이 이뤄진 사회는 공의로워야 할거야. 즐거워야 할거야. 사랑이 가득한 곳이어야 할거야. 그리고 그 사랑이 식지 않는 곳이어야 할거야. 영원해야 할 거야. 그래서 우리 존재 의미에 대한 물음이 주어질 때 “너무 좋으니까 영원히 살지요!”란 쾌활한 답을 항상 줄 수 있는 곳이어야 할거야.

이런 건 이상향에 불과하다고? 한낱 몽상에 불과하다고? 엄연한 자연법칙이 지배하는 적자생존의 세계에서 무슨 과욕을 부리냐고 묻는다면… 친구야, 잠시 그 몽상을 거부하지 말고 마음에 담아두라고 하고 싶다. 적어도 내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는 말이야. 부탁할게. 잠시만이라도 꿈을 가져보자구.

자, 요약하면 인간은 행복을 추구, 갈망하고 그것을 영원히 갖기를 소망한다. 그런데 신체적 정신적 한계로 인하여 인간은 그것을 스스로의 힘으로 얻을 수가 없다고 전제했어.

이 내재적 한계성을 기독교에서 뭐라고 하는지 알아? ‘원죄’라고 불러. 거부감이 팍 드는 익숙한 단어지? 뭐, 신학적으로 엄밀히 따지면 ‘원죄로 인해 우리가 깨닫게 된 창조물의 특성’ 또는 ‘원죄로 인해 창조물에 부과된 공의의 저주’쯤 되겠지만, 그냥 원죄라고 기억해 주어도 좋겠어. ‘죄’란 히브리 단어는 종류도 다양하고 뜻도 하나만 있는 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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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편지: 기독교가 전제하는 것들 1 – 원죄에 1개의 응답

  1. Yeon댓글:

    재미있습니다!!

  2. jinwooim댓글:

    옆에서 차근차근 설명해주는 것 같아요. 참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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