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기독교인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서론)

나의 죽마고우에게,

각하야! 야, 일단 힘차게 별명 한 번 불러보자. 조만간 얼굴 맞대고 원없이 보겠지만, 막상 편지 형식으로 글을 시작하고 나니까 그리운 마음이 불쑥 솟는구나. 일찍부터 정치와 사회참여에 관심이 많았던 널, 난 저 어린시절 ‘각하’라고 불렀지. 가끔 손끝을 눈썹 가장자리에 착 갖다 붙이면서 말이야. 내가 네게 붙여준 그 별명은, 너의 괴짜다 싶을 만큼 조숙한 진지함을 살짝 비꼬는 동시, 역사의식과 사회의식이 투철한 너를 존경하는 내 마음이 담긴 것이라고 할까.

우린 함께 같은 대학에 입학했어. 난 교회를 한번 제대로 다녀보기로 했지. 깊게 기독교를 공부해 보고 싶었어. 그래서 기독교가 진리면 헌신, 거짓이면 다시는 교회 문턱에 발을 들여놓지 않겠다고 결심했어. 각오를 다지고 교회생활을 시작했고, 성경에 매료된 난 얼마 지나지 않아 소위 ‘예수님을 영접’한 기독교인이 되었지. 그렇지만 미성숙한 얼치기 신앙인답게 방황도 많이 하고 남에게 무례한 짓도 많이 했던 것 같아. 한 때는 성경이 이해도 안가고 받아들여지지도 않아서 벽에다 냅다 던져버린 적도 있었지. 넌 남들과는 좀 다른 대학생활을 보냈지. 비종교인으로, 그렇지만 다양한 사회서적을 섭렵하며 네가 고민하고 공부한 바를 실천에 옮겼어. 그러다보니 남들에 비해 대학을 좀 오래 다녔던 넌, 학부전공과는 조금 다른 인문학 분야에서 네가 가졌던 이상을 좀 더 구체적으로 구현해보자고 박사과정에 입학했지. 그렇게 대학 졸업하고 각자 다른 분야에서 일을 하고, 각자의 삶의 철학을 길러나갔던 것 같아. 우린 종종 만나서 서로의 생각도 나누고, 정치에 대한 담론도 가져보았지. 그런데 종교 부분은 그다지 깊게 얘기하지는 못했던 것 같아. 아무래도 ‘신앙’의 영역인지라 네가 나에게 상처를 줄까봐 질문도 아끼며 신중히 날 대해주었지. 무리도 아닌 것이, 신앙인들이 자기 생각으로 따져도 답이 나오지 않는 어려운 문제들은 ‘난 전능한 신께서 다 해결해 주실 거라고 믿어’ 하고 신앙으로 무질러 버리곤 하니까.

친구야, 종교 이야기를 다시 한번 해보자. 사실 우리 모두는 종교생활을 하는 거나 마찬가지야. 우린 모두 이성으로써 우리 스스로를 제어하면서 살거든. 각자 삶의 철학이 있고, 그것을 지키려고 노력하지. 늦잠 자려는 본능을 억제하고 일찍 일어나, 우리는 하루 몇 시간씩 일을 해. 설령 마음은 게임방에서 카트라이더를 실컷 하고 싶더라도 말이야. 남에게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화를 참고 인내하며 행복한 하루를 보내려고 노력하지. 그렇게 삶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삶을 이끌어나가는 방식도 달라질테고, 이 관점의 차이는 종교와 관련된 문제지. 종교를 가진 이는 그 종교에서 가르치는 세계관을 중심으로, 종교를 신봉하지 않는 이는 각자의 철학과 양심을 중심으로 삶을 대하지. 이것은 오랜 친구 사이에 나눠봄직한 주제인 것 같아.

친구야, 난 기독교 이야기를 다시 한 번 해보고 싶다. 카톨릭이나 개신교가 아닌 기독교 이야기. 그리스도교 이야기 말이야. 하지만 어려운 문제에 봉착했을 때 신께 문제를 툭 맡겨 버리는 무책임한 짓은 가능한 한 하지 않을게. 철저히 논리적이고 논증적으로 대화를 해보고 싶다. 너도 기독교에 대해서 궁금해 했잖아? 2005년 Adherents 통계로 21억명에 달하는 기독교인들. 그 중심에 세계 4대 성인 중 하나로도 추앙받는 예수. 창기와 세리와 함께 했다는, 그래서 혹자는 혁명가로 혹자는 humanist로 해석하는 그 분. 그렇지만 너도 성경을 읽어봐서 알잖아? 그 분 언행이 다른 성인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자고로 진리를 좇는 이라면 티끌보다 겸손해야 한다고 간디께서 말씀하셨고, 간디를 비롯한 많은 성인들은 자신들의 한계와 부족함을 겸손하게 드러내며 겸허하게 진리를 좇았지. 예컨대, 공자는 제자들의 질문에 모르는 건 항상 모른다고 답변하고 함께 고민했다고 해. 그런데 예수는 좀 특이해. 예수의 언행을 보면 나이 서른밖에 안된 젊은이 주제에 자기가 모르는 게 없잖아? 진짜 하나님의 아들인 양 행동했고, 타인의 죄를 감히 자신이 용서한다고 하질 않나(재판관도 아니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야기와 생각으로 가득찬 그는 심지어 자신이 죽다가 살아날 것이요 재림할 때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구름을 타고 내려온다고 했지. 자신만이 길이요 생명이라는 오만한 말도 했어. 천지는 없어져도 자기의 말은 없어지지 않는다고 못박기까지 했지. 게다가 로마의 압제에서 유대동족들을 구원하지도 못했고, 바리새인들의 부정과 부패를 말소하지도 못했으며, 유대민족 영광의 상징인 성전을 재건하지도 못한 그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면서 “다 이루었다” 라고 외쳤지. 그런데 과대망상가요 영웅주의에 가득 물들어 있는 그로 말미암아 기독교는 탄생했고 무서운 속도로 부흥했어. 유대민족의 메시아 요건-유대민족의 회복과 성전의 재건-을 하나도 만족시키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적잖은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 즉 메시아로 추앙받았어. 그는 그를 따르는 유대인들에게 메시아로 추앙받은 것도 모자라 지금은 그를 ‘주’로 부르는 세계인들의 메시아가 되었지. 그의 종교는 이천 년이 지난 지금도 세계 최대의 종교가 되어 중동인들 뿐 아니라 거의 모든 대륙에 광범위하게 퍼져버렸어.

온갖 사람들이 예수를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지. 자신이 원하는 인물상을 그려놓고 마음에 드는 언행만 골라서 예수를 자신이 원하는대로 짜맞추어 조형하곤 하지. 혁명가 예수, CEO 예수 식으로 말이야. 그렇지만 우리는 제대로 이야기해 보자. 대체 예수란 누구였고, 이스라엘 역사의 한 조각에 불과한 듯한 이 한 사람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된 기독교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우주의 창조로부터 인류를 포함한 자연의 구속(redemption)까지 아우르는 이 종교는 대체 무엇을 전제하고,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다음 사진을 봐 다오.

반기독시민운동연합이 게재한 버스 광고. '나는 자신의 창조물을 심판한다는 신을 상상할 수가 없다' 라는 아인슈타인의 말이 적혀있다.

반기독시민운동연합(이하 반기련)이 반기독교 광고문을 2010년 2월 5일부터 서울 시내버스에 게재했어. 기독교가 끼치는 해악이 궁극적으로는 기독교의 존재 그 자체에 있다고 여기는 분들이야. 일명 ‘개독 박멸’이라는 과업을 향한 활동의 일환이라 할 수 있지. 광고문을 보면,

나는 자신의 창조물을 심판한다는 신을 상상할 수가 없다 (아인슈타인)

(관련 기사: 반기독교 버스 광고 ‘4일 천하’로 끝났다)

와, 난 멋지다는 생각이 들더라. 한국기독교에 화가 날 대로 나신 분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저렇게 절제된 언어로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는지. 아인슈타인이 실제 이야기한 원문 “I cannot conceive of a God who rewards and punishes his creatures (나는 자신의 창조물들을 보상하고 처벌하는 신을 상상할 수 없다)”과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충분히 자신들이 따지고자 하는 바를 간결히 표현했다고 생각해.

그런데 이 광고에 대한 기독인들의 대응이 좀 실망스럽더라. 어떤 분들은 항의 전화를 하고, 해당 버스 회사 앞에서는 목회자들과 신도들이 항의 집회까지 했다고 하더라구. 게다가 위 기사에 따르면, 한국기독교총연합회 김운태 총무란 분은 “기독교 역사에서 반기독교 세력은 항상 있어왔지만 최근 들어 더욱 치밀하고 강도 높게 교회를 공격하는 경향이 있다”며 “이번 일과 관련해 명예훼손 소송 등 법적 조치까지 포함된 대응 방안을 마련할 계획”이라고 하셨다는군.

이것은 현재 민주주의 사회에 사는 우리 시대의 사회적 합의에도 어긋나는 것일 뿐더러 종교인으로서도 바람직한 행동이 아니지. 다시 말해,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는 우리 사회에서 당연히 허용되어야 할 행동을 실력행사로 억압했다는 것이 잘못되었고, 진리를 좇는 종교인으로서 열린 마음으로 언제든지 참진리 앞에 자신의 오류를 수정할 겸허한 태도가 없었다는 점, 그리고 타인에 대한 존중과 사랑이 엿보이지 않는 점은 비판받아 마땅하지. 존 밀턴의 사상과 표현의 자유에 관한 연구서 <아레오파기티카>(박상익 옮김, 소나무 펴냄, 1999)를 보면 이런 글귀가 있어.

진리와 거짓으로 하여금 서로 맞붙어 싸우게 하십시오. 자유롭고 공개적인 경쟁에서 진리가 패배하는 일은 결단코 없습니다. 진리의 논박이야말로 최선의 억압이며 가장 확실한 억압입니다.

자, 그렇다면 어떤 것이 옳은 대응이었을까? 반기련이 제기한 비판에 반론을 제공하면 되지 않았을까? 공개적으로, 기독교가 갖고 있는 교리를 최대한 보편적 언어로 묘사해서 말이야. 예컨대, 위의 반기련 비판에 대한 간단한 답을 해보자. 아인슈타인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어. 그는 인격적인 신을 믿지 않으나 조화로운 자연 법칙을 믿는 사람이었지. 저 인용문에서 아인슈타인이 따지려는 건 아마도 하나님의 속좁은 성품이 조화로운 자연법칙에 감히 끼어들 데가 없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었던 걸 거야. 창조주가 있다면, 어떻게 자기가 손수 만든 조화로운 창조물에 감정을 개입시키고 선악의 잣대를 들이대느냐는 거지. 엄연히 감정과 무관한, 그리고 선악과 동떨어진 완벽한 자연법칙이 존재하는데 말이지. 설령 신이 만들었다고 한들 자연법칙에 의해 완벽하게 운용되는 자연에 그가 간섭할 데는 어디며 또한 자신이 직접 초래한 것을 무책임하게 심판하여 벌 주는 권리는 어디 있냐는 물음이기도 할거야. 음, 정말 좋은 비판이야. 그럼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짧게 해볼게. 심판을 해야만 하는 신을 한번 변호해 보자구. 반기련이 이 인용문을 통해서 제기하려는 비판을 내가 잘 해석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변론에 앞서 인용문을 다시 한 번 적어볼게.

‘나는 자신의 창조물심판한다는 신을 상상할 수가 없다’.

자, 그럼 저 인용문에서 먼저 ‘창조물’이란 무엇인지 살펴보자. 창조물이 어떠한 것인지 파악해야 왜 신이 굳이 자신이 직접 손수 만든 것을 재판에 회부해야 하는 지 알 수 있거든. 게다가 창조물은 우리를 포함한 우리 주변의 것들이라 특성을 파악하기가 용이해. 형이상학적인게 아니야. 보고 만질 수 있는 형이하학적인 것들이라구. 그럼 우리가 무생물이라고 부르는 창조물부터 살펴볼까? 글을 쓰는 내 책상 위의 노트북, 컵, 펜, 책들이 먼저 눈에 들어오는구나. 눈을 돌려 창 밖을 보니 햇살이 나무와 건물들을 비추고 있고, 바람이 불고 있어. 바람을 바라보니 유체역학을 전공한 나로서는 나비에-스톡스(Navier-Stokes) 방정식이 머리에 먼저 떠오르는구나. 연속체(Continuum) 가정만 성립한다면야 흐르는 공기는 위 방정식에 의거한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매우 정밀하게 움직임을 묘사, 예측할 수 있어. 그리고 주변의 물체들은 전부 중력을 받네. 만유인력의 법칙이란 물체들이 왜 아래로 힘을 받는지 설명하는 매우 훌륭한 공식임이 분명해. 노트북을 볼까? 전력을 공급받은 회로의 복잡한 입출력 작동으로 인해 훌륭하게 내가 쓰는 글을 화면에 보여줘. 우리 보기에 무생물들은 분명 자연법칙에 완벽하게 복종해. 우리 인간이 이성적 추론으로 논증한 정리들, 즉 자연법칙들에게 말이야.

자, 그럼 이번에는 이성적 추론을 활용하여 훌륭한 자연법칙을 발견한 동물인 사람을 한번 살펴보자. 기독교에 따르면 역시 창조물이야. 그런데 이 창조물은 무언가 독특해. 자연체계에 속해 있으면서 마치 자신은 자연과 독립된 개체인 마냥 자연을 관찰하고 자연을 판단하며 자연을 지배하거든. 자연을 보고 풍경화를 그리고, 사진과 동영상을 찍으며 무엇이 좋다 아름답다 평가를 내리기까지 하지. 게다가 자연을 조작하고 통제하기까지 해. 댐이나 저수지를 만들어 자연적이지 않은 무엇을 창조하기도 하고 그 안에서 양식업을 해서 생선을 길러먹지. 자연상태에 있으면 경쟁적이고 공격적일 동물들을 사로잡아 동물원에서 길들이기도 하고 심지어 애완동물로 거듭나게 하기도 하지. 위키피디아에서 ‘사람(human)’으로 검색을 해 보면, 사람은 다른 생물들에 비해 월등하게 발달되었다고 여러 번 강조가 돼. 두 발로 걷는 탓에 두 손이 자유로운데다가 지적능력이 매우 뛰어나서 여느 동물에 비해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도구를 만들어 사용할 수 있어. 특히, 사람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이해하고 그에 대해 영향을 끼치려는 욕망이 있어서 각종 자연 현상을 설명하고 다루려고 해. 과학, 철학, 신화, 종교 등을 활용해서 말이야. 이러한 본성은 도구와 기술의 발전을 이끌었어. 인간은 유일하게 불을 다루고 음식을 요리하며 옷을 입고 그 밖의 수많은 기술들을 사용하는 종으로 알려져 있지.

자연주의자라 불리는 철학자들은 이렇게 주장해. 세상은 자연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말이야. 신적인 존재는 없다고 생각하지. ‘우주=자연’이야. 따라서 인간도 다른 생물과 별로 다를 게 없는 자연의 일부이며 진화의 산물이라고 주장해.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 역시 자연법칙을 따르는 원자들의 조합에 의해 탄생된 물질 덩어리야. 그리고 인간의 감정을 비롯하여 이성적 추론 능력, 의지 등은 모두 자연스럽게 진화에 의해 발생한 것이라고 설명하지. 어때? 우리가 암암리에 상상했던 익숙한 주장이지 않아? 우리의 조상은 원숭이라고 생각하는 것 말이야. 진화에 진화를 거듭해서 두뇌가 발달하고 두 발로 서서 걷기 시작했던 원숭이는 결국 유인원을 거쳐 인간이 될 수 있었어. 그래, 좋아. 우리 인류는 원숭이로부터 진화해 왔을 수 있어. 진화론에는 별로 토를 달지 않을게. 진화론을 수용하는 그리스도인도 무수히 많거든. 지금까지 발전된 신학에 따르면 진화론이 기독교와 상충되지도 않고 말이야. (참, 진화론이 생명의 기원을 설명할 수 있다는 부분은 예외야. 생명의 기원만큼은 어떤 자연주의적 이론도 뾰족한 설명을 내놓지 못하고 있지)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순전히 자연적인 결과, 물질적인 결과에 의해 비롯된 것이라는 관점은 난점이 있어. 독특하게도 우리 인간은 자연스럽지 않은 특징들이 있거든. 자연스럽게 진화했고,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스럽기 그지없어야 할 인간인데 이상하게 자연스럽지 않아. 인간적이야.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인간은 바로 선악을 판별하고 이성적으로 생각, 행동하기 때문이야.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우리는 자연스러운 것임에 마땅한 일들에 대해 선악적 기준을 들이대고, 자연스러운 우리의 본능을 이성으로 통제해. 살의가 들어서 사람을 죽였을 뿐인데 우리는 살인자를 매우 악하다고 판단해. 게으름과 이기심을 이겨내며 살고, 때때로 친구를 위해, 대의를 위해 소중한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기도 하지. 대체 이러한 인간의 특질들을 자연주의가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 한 번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인간만이 수행할 수 있는 능력 중 하나인 이성적 추론부터 살펴보자. 이성적 추론이란 간단히 말해 결과에 대한 원인을 찾아내는 능력이야. “왜?”란 질문에 “왜냐하면…”으로 시작하는 답을 마련해주는 능력이지. 우리는 바로 이 능력에 기대어 ‘지식’ 혹은 ‘앎’이란 것을 얻을 수 있어. 불을 사용할 줄 알았던 우리의 조상님들을 상상해 보자. 산불이 되었든 번갯불이 되었든 우리 조상님들은 불이 생기는 과정을 관찰하셨어. 불이 생기는 것을 보시고 “왜?”라는 질문을 수없이 던지시며 그 이유를 조금씩 깨달아가셨지. 결국 불이란 나무 같이 불이 잘 붙는 물질이 높은 온도에서 공기와 만날 때 발생한다는 것을 깨달으셨어. 득도하신 거였지. 그분들은 그 과정을 이해한 뒤 모방하기 시작하셨어. 일단 바람을 막기 위해 옹기종기 여럿 모여 앉으셨지. 그 후 나무판 위에 짚을 얹고 뾰족한 나무막대를 그 위에서 손으로 비비며 빠르게 돌렸어. 나무판과 나무막대 끝 사이에 발생한 마찰열은 발화점 이상으로 온도를 올릴 수 있었고, 결국 불은 우리 인간이 활용 가능한 것이 되었지. 그렇게 불이 생기는 원리, 불을 발생시키는 기술은 조상님들의 ‘지식’이 되어 후손에게 전수되었어.

자연주의자들의 주장대로라면 인간의 모든 능력이란 진화의 산물이야. 이성적 추론을 수행하는 능력도 예외가 아니지. 그리고 인간의 생각과 행동 모든 것은 자연법칙에 순복하는 인과의 산물이 되어버려. 순차적으로 벌어진 자연현상에 불과하다구. 임의성이 있다고 한들, 모든 것은 자연법칙에 의해 처음부터 정해진 결과물에 불과해. 그들에 따르면 지금 내가 네게 편지를 쓰는 행동도 모두 우주 태초부터 미리 정해진 것이야. 내가 지금 점심으로 설렁탕을 먹을까 초밥을 먹을까 고민하는 것도 우주 태초부터 정해져 있던 거라구.

그들에 따르면, 우리 조상님들이 깨달으신 것 역시 순차적으로 일어난 자연스러운 현상에 불과해. 그리고 우리가 경험하고 반응하는 것이 자연현상에 따른 것이라면, 우리가 느끼는 모든 것은 ‘옳은’ 것이 되어버려. 자연법칙에 어긋난 게 없잖아? 우리는 보고 듣고 만지고 느꼈을 뿐이거든. 불을 오감으로 느끼신 여러 조상님들을 상상해보자. 어떤 조상님들은 면밀한 관찰 끝에 불이란 것이 일종의 화학작용이고, 재생산 가능한 것이라고 느끼셨지만, 어떤 분들은 그렇지 못했어. 어떤 조상님들은 불이 신이라고 느끼셨어. 모든 것을 태워버리고, 죽일 수 있는 강렬한 존재, 두렵고 초월적인 존재라고 말이야. 어떤 분들은 불을 영적인 것으로 보셨어. 이리저리 나무들에 옮겨 붙으면서 이동하고 퍼져가는 불을 보며 어떤 영적인 실체로 여기셨지. 어떤 조상님들은 불이 화학적인 현상이란 것을 알았지만, 공기 따위는 필요없고 나무와 온도에만 의한 것이라고 느꼈어.

자,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해. 자연주의자에 따르면 모든 조상님들의 생각은 하나같이 옳아. 자연법칙에 철저하게 순복한 결과가 되거든. 느낀 대로 표현하셨을 뿐이야. 그런데, 정말 모든 조상님들의 생각이 옳은 걸까? 아니야,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걸 뚜렷이 알고 있어. 우리는 어떤 주장은 옳고 어떤 주장은 그르다는 것을 알고 있지. 불에 대한 지식을 전수해주셨던 조상님들 역시 어떤 주장은 옳고 어떤 주장은 그르다는 것을 알고 계셨어. 불은 신이 아니고, 영적인 실체도 아니며, 불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타는 물질과 온도 뿐 아니라 공기도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계셨어. 그래서 그 옳다고 논증된 ‘지식’을 우리 후손들에게 가르쳐 주실 수 있었어.

자연주의자들의 주장은 여기에 큰 난점이 있어. 그들의 주장을 따르면, 우리가 ‘지식’이란 것을 도무지 얻을 길이 없게 된다는 것이야. 모두들 그렇게 ‘느낄’ 뿐이라면, 모든 느낌은 정당한 것일 뿐더러 어떤 느낌이 옳은지 도무지 판단할 수가 없어. 모두 A→B→C 의 과정을 거쳐 얻은 것이 되는 거지. 자극에 대한 반응에 불과한 것이야. 그러나 지식은 그렇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야. ‘지식’이란 순서에 맞춰 진행되는 인과관계에서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며 “왜?”란 질문을 던졌을 때 비로소 얻어질 수 있는 것이야. 논리학에서 이를 ‘귀결’이라고 부르지. 다시 말해 C←B←A 의 과정을 설명해내었을 때에만 우리는 옳은 ‘지식’을 얻을 수 있는거야. 왜 C가 A와 B 과정을 순차적으로 거쳐야만 했는지, B가 아닌 다른 것으로는 왜 C가 귀결될 수 없는지를 설명해내야만 우리는 비로소 ‘지식’을 얻었다고 할 수 있어. 충분한 이유가 없으면 어떠한 사실도 생겨나지 않으며, 어떤 판단도 참된 것이 못된다는 것. 어려운 말로 충족이유율(Principle of Sufficient Reason)이라고 하지.

그러나 그 C←B←A 과정을 설명해내기 위해서는 외부의 관찰자가 필요해. A→B→C로 진행되는 대상의 과정을 살필 수 있는, 그리고 왜 A가 B를, B가 C를 초래할 수 있는지 설명할 수 있는 옳음과 그름의 기준을 가진 관찰자 말이야. 그런데 자연주의자들에 따르면, 우리 인간 모두 자연의 일부로서 모든 생각과 행동이 A→B→C 로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는 소위 귀결의 논증과정을 수행할 수 없어. 다시 말하면, 우리에 의해 자연법칙이 옳다는 것은 절대 증명될 수 없어. 우리 생각과 행동 모두는 자연법칙에 종속된 것이 되기 때문에, 자연법칙이 옳다 그르다 판별할 수가 없지. 일찍이 영국의 진화생물학자인 J. B. S. Haldane 교수(ㄱ)는 이것을 간파했어. 그는, 우리의 뇌가 원자들로 구성되었고 우리의 정신 활동은 모두 뇌 속 원자의 운동에 의해 결정된 것이라면 우리가 갖는 소신, 혹은 이성적 추론이 옳은 것이라는 어떠한 이유도 우리는 갖지 못하다고 이야기했어(ㄴ).

만일 A→B→C를 보면서 C←B←A를 추론해 낼 수 있는 관찰자가 자연의 바깥에 존재한다면, 그 관찰자는 비로소 지식을 얻을 수 있어. 그런데 어때? 우리가 익히 하고 있는 것들 아니야? 맞아, 우리 인간은 자연의 일부임에도 불구하고 그 관찰자 역할을 해낼 수 있어! 바로 우리의 신비한 정신세계에 의존해서 말이야. ‘이성’ 말이지. 만일 우리 정신이 자연의 바깥에 존재하여 자연의 필연적 귀결을 인식한다면 인간의 이성적 추론은 비로소 타당성을 가질 수 있어. 정신을 심판자로 둔 상태에서 우리는 진정한 통찰을 가질 수 있고 지식을 축적할 수 있는거야. 그러나 이러한 통찰이 단순히 우리 정신 안의 느낌에 불과할 뿐, 우리 너머의 실재들에 대한 객관적 인식이 아니라면 우리는 지식이라는 것을 가질 수 없게 돼. 자연주의자들 관점에 의하면 우리가 축적한 과학 지식도 우리의 사고활동이 타당한 것이라는 것을 믿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뤄진 것이 되거든. 다시 말해, 자연주의 관점에 의하면 우리가 밝혀낸 자연법칙이란 건 전혀 타당성을 보장받지 못하는 것이 돼. 그뿐이야? 삶의 의미 따위는 더더욱 찾기 어렵게 돼. 인간의 사유와 행동이 모두 프로그램된 로봇의 그것과 같다면, 그저 자극에 따른 인과적 반응에 불과하다면 어떻게 인간의 삶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겠어?

이런 난점 때문에, 우리는 자연 너머에 있는 무언가가 자연과 연동하여 작동하며 이성적 추론을 일으킨다는 관점을 선호해. 자연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야. 그래서 자연 너머에 실재하는, 그래서 자연을 자연 바깥에서 통찰하고 자연에 의미를 부여하는 초자연적인 존재가 있다는 거야. 그럴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갖는 ‘느낌’이 옳은지 그른지 여부를 심판할 수 있고, 따라서 ‘지식’을 축적하며, 삶의 의미까지 적극적으로 찾을 수 있게 돼. 그 능력은 전적으로 인간이 갖고 있어. 인간의 마음 안에 있는 능력이야. 그렇다면 우리 인간은 자연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결합된 창조물이란 결론에 이르게 돼. 자연과 초자연이 결합된 창조물. 몸과 영혼이 결합된 창조물. 자연과 이성이 결합된 창조물이 되는 거야.

이성이란 자연법칙에 인과관계로 복종되지 않아. 그리고 오히려 자연에 영향을 끼쳐. 그러나이것은 인간의 이성이 자연과 절대적으로 독립하여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야. 이성은 두뇌가 있기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지. 그리고 이성의 동작은 자연법칙 너머의 초자연적 실체의 조명을 받아 일어나는 것이야. 자연스럽게 자연법칙과 섞이되 필요한만큼 자연법칙에서 해방되어 초자연적 실체와 교감한다는 말이야. 그렇게 이성은 자연 위에 군림할 수 있어. 이성을 가진 두뇌는 두뇌 이상이 무엇이 되지. 우리는 이성을 사용하여 자연을 지배해. 우리는 노트북을 정교하게 만들어서 테이블에 올려놓았어. 자연적인 현상만 있었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야. 인공적인 일이야. 맥도널드에서 감자튀김을 한 봉지 더 시켜 먹으려는 자신의 식탐을 통제해. 역시 자연스럽지 않은 일이야.

자, 이렇게 이성이 존재한다고 했을 때, 모든 인간은 서로 다른 각각의 이성을 소유한다고 가정할 수 있어. 실제 모든 사람은 다 제각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잖아? 자, 여기서 ‘자유의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모든 인간은 자신만의 ‘자발적인 의지’에 의해 행동해. 그 개인의 이성과 의지는 자연과 어느 정도 독립되어 있어. 그뿐 아니라 이성을 불 붙여버린 어떠한 초자연적인 실체로부터도 독립되어 있어. 개인의 의지란 고유한 것이며 타인이 침범할 수 없는 곳이야. 그러나 의지의 사용이 잘못 되었을 때 타인 또는 환경에게 해를 가할 수도 있어. 그럴 때 그 악행은 타인의 이성에 의해 판단을 받아. 그리고 그것은 모든 이성을 초월한 탁월한 신적 존재에게서 절대적으로 공평한 판단을 받게 돼. 기독교에서는 이런 신이 존재한다고 믿으며 그를 ‘하나님’이라고 부르지. 공의로우며 그름의 여지가 전혀 없는 정확한 이성의 소유자. 하나님. 그리고 그에 의해 이뤄지는 심판. 이것이 곧 기독교에서 말하는 ‘심판’이야. 현대사회에서 죄인들은 재판에 회부되어 형벌을 받잖아? 우리는 그만큼 이성적 판단에 타당성을 부여하고, 그에 따라 선악을 분별하며 정의를 세우기 위해 노력해. 만일 자연 너머에 있는 초자연적 존재자가 창조주라면, 자신이 창조한 자연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항상 노력하지 않겠어? 만일 우리에게 부여된 특권, 자유의지에 의해서 악이 발생한다면 그것은 심판을 받고 선으로 탈바꿈되어야 마땅해. 따라서 이성 위의 이성, 자연 위의 자연이라 할 수 있는 ‘신’은 그만이 가질 수 있는 공의를 바탕으로 심판을 수행하며 약자를 악에서 구원하고 선을 회복시킬 거야. 신은 무턱대고 자연의 모든 것을 심판하지 않아. 그가 자유의지를 부과했기 때문에 악으로 부패될 수 있는 독립된 창조물에 대한 심판을 수행해.

심판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해볼게. 우리는 심판이란 단어를 들으면 법원에서 판사가 피고에게 내리는 판결을 떠올려. 아울러 피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죄의 중량에 비례하여 그에게 부과되는 형벌을 떠올리지. “징역 3년, 집행유예 2년!” 등의 선고 말이야. 죄인은 죄값을 돈으로 치르거나, 참회의 기회를 얻기 위해 사회봉사를 강제로 떠맡게 되거나, 혹은 감옥에 갇혀 살게 돼. 그런데,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심판이 과연 이런 모습일까? 구약성서에 보면 여호와의 심판이 속히 임하길 바라는 탄원의 글을 여럿 찾을 수 있어.

“하나님이여 일어나사 세상을 심판하소서.” (ㄷ)

“세계를 심판하시는 주여 일어나사 교만한 자들에게 마땅한 벌을 주소서.” (ㄹ)

유대인들은 왜 만인이 두려워하는 심판을 그토록 갈구했던 것일까? 그것은 그들이 꿈꿨던 재판은 민사재판이었기 때문이야. 지주에게 수탈당했던 농민으로서, 피지배계급으로서 또는 주변강국으로부터 핍박받은 약소국의 국민으로서 그들은 억울함을 풀어주고 피해를 보상해달라고 신에게 탄원했어. 약자가 당한 설움을 누구에게 호소해야 하지? 정의는 어디서 회복될 수 있는거지? 힘이 없고 지식이 없어 당하기만 했던 그들은 절대적 힘과 지혜를 소유한 심판관을 애타게 불러. 우리 사회의 약자들, 현대사회에서도 공평한 취급을 받지 못했던 모든 일들은 심판받아 바로잡혀야만 해. 우리 현대인에게도 공평한 민사재판은 필수적인 것이야. 혹 이 글을 읽는 이들 중에서도 기독교인들이 자행한 죄악 때문에 상처받은 이들이 있다면, 바로 그 기독교의 신이 올바른 심판으로 원고의 억울함을 풀어줄 거야.

그리고 기독교에서 그려내는 심판은 현대사회의 심판과 사뭇 달라. 현대 재판에서 선고가 내려지면 피고에게는 그의 의지에 무관한 강제가 행해져. 그러나 신의 심판은 그렇지 않아.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경우, 죄인을 지옥에 ‘집어넣지’ 않아. 죄인이 지옥에 거하도록 ‘허락’하지. 창조주는 자신이 만든 창조물에 부과한 자유의지를 자신마저 침범할 수 없는 불가침의 영역으로 만들어 두었어. 피조물의 선택은 두가지야. 천국 아니면 지옥이지. 천국은 피조물이 의지를 스스로 포기하고 창조주와 관계를 회복하는 장소야. 창조주와의 관계 회복은 곧 사랑이라는 질서에 순응한다는 뜻이야. 모든 피조물의 생명의 근원 되는 초자연적인 존재, 사랑 그 자체인 창조주와의 관계 회복을 통해 피조물은 구체적이고도 실재적인 영원의 무엇으로 거듭나. 지옥은 그것을 거부하는 곳이야. 피조물이 창조주를 거부하는 이상, 창조주는 그의 의지에 아무런 강제를 가할 수가 없어. 그가 내리는 심판은 간단해. “네 원하는 대로 하거라.”

CS 루이스는 그의 책 ‘천국과 지옥의 이혼(김선형 옮김, 홍성사 펴냄, 2009)’에서 신의 심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어.

세상에는 결국 두 종류의 인간밖에 없어. 하나님께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라고 말하는 인간들과, 하나님의 입에서 끝내 ‘그래, 네 뜻대로 되게 해 주마’ 라는 말을 듣고야 마는 인간들. 지옥에 있는 자들은 전부 자기가 선택해서 거기 있게 된 걸세. 자발적인 선택이라는 게 없다면 지옥도 없을 게야. 진지하고도 끈질기게 기쁨을 갈망하는 영혼은 반드시 기쁨을 얻게 되어 있네.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95쪽)

답변은 여기까지야. 답변이 좀 길었지? 질문이 워낙 좋지만서두 대답하기 난해한 ‘심판’에 대한 것이다보니 간결하게 좋은 대답을 하기가 참 힘들구나. 요약하면, 신은 무턱대고 아무 창조물이나 심판하지 않아. 창조물 중에는 자연의 일부임에도 불구하고 자연을 초월하는 능력, 즉 이성적 능력을 지닌 인간이 있어. 인간은 독립된 이성을 바탕으로 자유의지라는 특권을 누리기 때문에 악으로 부패할 수도 있어. 신은 이 인간에 대한 것만 심판을 수행해. 특히 이 재판은 형사재판과 더불어 민사재판이기도 해. 불의에 의해 고통을 받은 창조물들의 억울함을 풀어줘야만 하지. 잘못된 것은 바로잡혀야만 해. 공의를 위해서라면 반드시 수행되어야만 하는 심판인 것이야.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창조물을 심판하는 신을 이해할 수 있을 뿐더러, 그 심판을 바라기까지 하지.

반기련이 제기한 물음에 대한 답이 얼마간 되었는지 모르겠구나. 그렇지만 내가 바라는 것은 이렇게 문답이 오가는 것이야. 공개적인 토론을 통해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서로에게 배울 수 있으며, 그렇게 함께 진리에 다가갈 수 있을거야.

실은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부분도 이거야. 우리는 종종 신문에서 교회 내외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기사들을 보게 돼. 그런데 아쉽게도 현상에 대한 보도와 비판이 주를 이룰 뿐, 그 현상의 근본적인 원인에 대한 깊은 고찰과 토론이 거의 없더라구. 많은 경우, 그 사태의 발단을 거슬러 올라가면 기독교인들 스스로 기독교를 잘못 이해해서 벌어진 일인데 말이야. 종교인들의 행태는 그들이 믿는 교리와 신앙에 기반하기 마련이야. 특히 열심이 가득한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더욱 그러하지. 행동지침에 따라 움직이는 병사와 같다고 할까? 그렇다면 그 행동지침의 잘잘못을 따져야지, 그를 믿고 수행할 따름인 사람들을 쥐고 흔든다구 뭐가 바뀌겠어? 만일 그 행동지침을 이해한다면, 모 행동경제학서적 제목처럼 ‘Predictable irrational’이 될거야. 대응책까지 마련할 수 있다는 이야기지.

행동지침에 해당하는 기독교의 교리. 그 교리에 대한 진솔한 소통을 했으면 하는 바램이 있어. 신학자, 종교학자, 목사들이 더 나서서 대중의 눈높이에 맞추어 깊고 넓게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해. 그런데 인터넷에서 그런 글들을 거의 보질 못한 것 같아. 물론 복음과 상황 같은 잡지, 기독교 전문웹사이트, 종교서적들에는 풍성한 자료가 있지. 그런데 그 자료들이 많은 기독교인들에게도 미치지 못함은 물론, 일반인들에게도 전달이 충분히 안되는 것 같아. 그래서 그냥 답답한 마음에, 내 개인 필요도 있으므로 글을 써보기로 했어. 그리고 난 터놓고 ‘기독교란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 내가 이해한 기독교의 교리, 즉 기독교인들이 갖는 삶의 철학과 그에 따른 행동지침을 나누어 볼거야. 이걸 나누는 것이 너와 나, 그리고 또우리 이야기를 함께 보는 다른 이웃들에게 조그마한 도움이라도 되기를 기대해 본다. 또한 너와 함께 삶에 대해서 고민하고 토론하는 좋은 기회가 되리라 기대해. 모쪼록 마음을 담은 비판과 조언, 부탁할게.

그럼, 이만 줄일게. 다음 편지에 보자.

(ㄱ) 1892-1964. 영국의 유전학자, 진화생물학자

(ㄴ) «가능한 세상들 Possible Worlds», 209쪽

(ㄷ) 시편 82:8

(ㄹ) 시편 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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