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번째 편지: 기독교가 전제하는 것들 2 – 절대적 타자성과 자유의지

전제 두번째, 나와 다른 타인은 절대적 타자성을 지니고, 우리 모두는 독립된 자유의지를 가진다.

“날 있는 그대로 사랑해 줄래?”

“남을 사랑한다는 건, 있는 그대로의 상대방을 받아주는 거야”

우리 젊은 날 사랑에 대해 토론할 때 많이 나누었던 이야기지? 사랑은 이런 거야 하고 드라마에서 듣고, 그걸 우린 술상에서 반복하고 말이야.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것이 사랑이다’란 생각. 이 생각이 근래에 유행한 이유는 아마도 20세기 초 철학자 레비나스의 ‘타자’ 개념 덕이 클 거야.

그는 1906년생의 유태계 프랑스 철학자였어. 그는 후설과 하이데거의 제자였지만, 나치에 협력한 스승에 대해 크게 실망하게 되었고, 당시 2차 세계 대전의 경험은 그의 철학을 크게 변화시켰어. 그의 가족들은 유태인 학살과정에서 희생되었어. 레비나스 본인은 프랑스군 장교로서 참전, 독일군 포로가 되어 강제노동을 했을 뿐 아니라, 무수한 동족 유태인의 죽음을 경험했지. 그는 묻기 시작했어. “1500여년이나 기독교 복음의 영향 하에 놓인 유럽이 어떻게 그처럼 엄청난 폭력과 살상을 자행할 수 있었는가? 전쟁의 폭력은 어디로부터 비롯되었는가?” 레비나스는 당시 서양의 전체주의적 철학과 전쟁이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어. 전체에 복종하는 것이 곧 전쟁의 철학이지. 전체를 거부하는 사람은 무참하게 제거되기 마련이야. 그런 의미에서 전쟁은 전체주의적이야. 그런데 당시 서양철학은 모든 것을 통일하고 포괄하여 한 이념에 묶는 노력이 대부분이었어. 그의 스승이었던 하이데거의 철학도 ‘존재의 진리’에 인간을 종속시키고자 했던 면에서 전체주의적 성격을 벗어났다고 하기 어렵지. 레비나스는 이에 반기를 들었어. 그는 평화의 철학, 즉 어떤 무엇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개인의 인격적 가치와 타자에 대한 책임을 강조하는 사상을 구축했어. 전체를 강조하다 보면 사회로 하여금 한 방향을 향해 바라보게 만들어. 아침 조회 때 훈화하는 교장을 향해 열을 지어 서 있는 초등학생들처럼 말이야. 사람과 사람끼리 똑바로 마주보지 않고 있지. 그리고 사람 사이도 어떤 공감대를 통해서 교감하게 되어있고, 결국 공통의 이념과 예절이란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채 마주하게 돼. 레비나스는 가면을 벗고 ‘나’와 ‘너’가 마주보는 관계에 시선을 두기 시작했어. 그러면 우리의 정신 뿐 아니라 몸도 보이게 돼. 우리 정신이 존재하는 것은 몸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그래서 우리 모두는 한편 물질적이야. 우리가 상대방을 인지, 인식할 때는 나 중심에서 상대방을 이해하지. 일종의 도구로서 상대방을 바라보는 측면이 항상 있거든. 그렇지만, 상대방은 나의 도구이기 전에 그저 존재하는 또 하나의 존재자이지. 물질적으로 같은 시공간에 함께 존재하기 때문에 내가 활개칠 수 있는 세계의 범위를 제한하며, 그래서 나로 하여금 나 중심적인 세계에서 벗어나게끔 인식하게 도와주고, 결국 타인과의 공생을 꿈꾸는 이타성을 갖게 도와주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타자의 타자성. 바로 절대적 타자성이야.

레비나스는 타인을 이렇게 정의했어. ‘타인은 내가 조종할 수 없는 존재다’ 라구. 타인은, 완벽하게 독립된 자유의지(주체성)를 지니고 있어서 내가 억압할 수는 있어도 내 것으로 만들 수는 없는, 절대적 타성을 지녔다고 했지. 심지어 남을 살해하더라도 그는 영원히 타인으로 남는다고 주장했어. 동시에 타인이란 우리가 절대로 완벽하게 알 수 없는 존재이기도 해. 만일, 타인이 내가 알 수도 없고 조종할 수도 없는 존재라면 이것을 일단 인정하는 것이 타인과 나 사이 관계의 출발점이 될거야. 타자의 절대적 타자성을 인정하는 것. 이것이 사랑의 시작이야. 반면에 타자를 자아에 환원시키고자 하는 것은 폭력이지. “사랑은 사랑의 대상이 되는 사람을 그가 있는 그대로 있게 하는 것이다.” 바로 하이데거가 표현한 사랑의 정의야.

난 극심한 고통을 겪은 어느 날, 절대적 타자성의 존재를 깨달았어. 세상에 도움으로 해결될 수 없는 고통의 수준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그 날, 그 어느 누구도 구출해 낼 수 없는 고통의 심연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은 그 날… 난 좌절했어. 왜냐하면, 어딘가 모르게 내 이상이 깨져버린 것만 같았거든. 치기어린 생각이었지만, 난 내 인생의 모습은 ‘남을 돕는 것’이어야 한다고 늘 생각해 왔어. 유토피아를 꿈꾸기도 하고, 역사의 진보를 믿기도 했지. 난 내가 남에게 무언가를 줄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었고, 내가 줄 수 있는 그 도움은 실제 남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믿었어. 그런데 그 날, 난 내 꿈이 허황된 거라는 걸 비로소 깨달았어. 남을 돕는다는 게 얼마나 오만하고, 자기 중심적인 생각이었는지를 깨닫게 됐어. 고통의 심연에서 타인의 동아줄이 미칠 수 없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 왜 천국에서 음부로 거지 나사로가 건너가지 못하는지 이해했어. 결국 고통을 벗어나는 것은 자신의 몫이라는 것을, 구원의 동아줄을 찾아서 붙잡아 올라오는 것은 그 어느 누구도 강제하지 못하는 본인의 몫이라는 것을 알게 됐어.

자유의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볼게. 자유의지(free will)는 자신의 행동과 결정을 스스로 조절·통제할 수 있는 힘이야. 실제 이것을 인간이 전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가지는지 아니면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학계에서 논란이 계속되고 있어. 난 인간이 전적으로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그 자유의지는 자연법칙과 양립 가능하다고 전제해. 서론에서 이성의 초자연성에 대해 언급했지. 자유의지 역시 이성의 영역에 속한 것으로서 그것이 신체에 미치는 작동은 자연법칙을 따르되(즉, 뇌의 동작은 철저히 자연법칙에 따라 수행되되) 자유롭게 자연을 넘나들며 뇌의 동작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무엇이라고 주장했어. 그 이유는 이것이 우월한 철학으로 여겨지기 때문이었어.

스피노자는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대표적인 철학자야. 그는 자유행동으로 보이는 것은 실제 자유롭지 못하다고 주장했어. 왜냐하면 내적 믿음이라는 것은 이전의 사건들에 의해 필수적으로 영향받기 때문이라는 거지. 사람에게 의지가 있어보이는 것은 결국 원인이 되는 사건들을 무시함으로 말미암은 착각이라는 거야. 따라서 자유의지란 없고, 우리가 갖는 의지라는 것은 결국 결정된 모종의 결과물이라고 주장해. 더불어 현대 유물론자들은 임의성(randomness)이란 개념을 추가시켜 자유의지같아 보이는 것은 사실 자연의 임의성에 의해 돌출된 또다른 인과적 결과물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지.

어떻게 생각해? 우리의 행동과 사유가 전적으로 물질적이며, 법칙에 철저하게 귀속된다는 것. 어딘가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아? 인간의 존엄이 무시받은 것 같지 않아? 우리가 과연 물질에 불과하다면, 왜 우리는 이런 모욕을 느낄까? 왜 자연에 불과한 우리는 자연을 거스르며, 더 나아가 자연을 지배하고 정복하려 드는걸까? 왜 본능대로 살지 않고 이성적으로 살려고 하는걸까? 자극에 대한 반응만 잘 수행하면 될 것을 그 반응을 굳이 선악으로 판별하려 하는 건 왜일까? 이성 역시 자극에 대한 반응에 불과하다면, 우리의 모든 이성적 추론은 그저 감각적 환영에 불과해. 결국 유물론자들의 주장도 믿을 수 있는 근거가 하나도 없게 된다구. 게다가 이게 사실이라면 우리는 사회에서 죄인들을 제재할 강력한 윤리적 동기를 갖기가 힘들어. 그래, 백 번 양보해서 모든 게 자연으로 설명된다고 해자. 그렇다면 과연 우리 삶의 의미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우리는 왜 살고 왜 존재하는 것일까? 영원이 없는 그 삶 속에 우리 삶에 동기를 부여해 주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자연주의, 혹 철저한 유물론은 이런 질문에 대해 전혀 좋은 답을 제공해주지 못해. 게다가 우리가 경험하는 4차원 시공간의 자연이 자연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만일지도 몰라. 저 밖에 색다른 시공간에 터를 잡은 자연이 또 있을지 어떻게 알아? 그리고 그 새로운 자연과 우리 자연이 어떤 방식으로든 서로 교통하고 있을지도 몰라. 그렇다면 그 교통이 어떤 초자연적인 존재의 중재로 인하여 이루어지고 있을지도 모르고. 세상에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듯이 우리의 지식과 지혜는 분명 제한적이야. 우리는 인생에서 수없이 경험하는 스승과의 만남에서도 우리의 부족함을 깨닫지. 모든 것을 인간의 이성으로 파악하려는 것은 교만이라고 생각해.

철학적으로 따져도 자유의지를 부정하기 어렵지만, 경험적으로도 그래. 깊은 고통 속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발견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나치 시절에 수많은 유대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악명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감되었던 사람의 이야기야. 정신요법 제 3학파라 불리는 로고테라피(logotherapy)의 창시자 빅터 프랭클(Victor Frankl)박사는 젊은 시절 나치에게 잡혀가 바로 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감되었어. 영양실조와 동상, 발진티푸스를 비롯한 각종 질병, 온갖 멸시와 고난을 겪었지. 그는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에서 그의 체험과 깨달음을 기록했어. 그는 그 지독스런 환경 속에서 ‘선택’이란 것을 영위하는 동료들을 보았어. 그는 가혹스런 환경에 압도되어 정신이 무감각해지지 않도록 자신의 마음을 지키는 사람들을 보았어. 불안감을 제압하고 정신적 독립과 영적 자유를 지켜내는 소수의 영웅들을 보았어. 반면에,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자신의 삶을 지탱하기를 포기하기로 선택한 사람들도 보았어. 그들은 삶을 포기했기 때문에, 희망을 붙잡기를 관두었기 때문에 급속하게 스러져갔지. 옳든 그르든 간에 자신의 의지를 최대한 활용하여 선택하는 동료들을 보며 프랭클 박사는 이렇게 말했어.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 갈 수 있어도 단 한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갈 수 없다고 말이야. (ㄱ) 즉, 인간이 벼랑 끝에 몰려 서 있는 순간까지도 자유의지를 간직한다는 말이야.

심리학자들 역시 자유의지에 관심이 있어. 어떤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의지가 강하고 어떤 사람들은 약하대. 재미있는 것은 두뇌가 상해를 입은 환자나 혹은 정신병에 걸린 환자들의 경우 의지가 거의 작동하지 않다시피 하기도 한다는 거야. 뇌상이 생긴 이후로는 의지적으로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일들을 하지 않더라는 것이지. 난 이들의 문제에 이렇게 답을 할수 있어. 이성은 몸에 의존하는 것이라고. 이성 역시 초자연적인 영역에 속한다고 하나 여전히 자연을 딛고 작동하는 것이지. 따라서 이성이 작동할 수 있는 특정한 뇌의 부위가 파괴되었거나 손상을 입었으면 이성 역시 제대로 활약할 수 없게 되는 거야. 인간은 물질만이 아니요, 영과 혼과 육의 결합체라고 플라톤 선생부터 그렇게 주장해왔잖아?

자, 그렇다면 이 모든 난제들을 해결해줄 수 있는 초자연적 성질을 인간에게 부여함과 동시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질 수 있게 돼. 그 초자연적 성질이 주체성을 갖고 있기만 하다면 말이야. 난 인간이 주체적인 자유의지를 갖고 있다고 전제해. 그것이 기독교에서 전제하는 바야. 다시 말하지만 난 여기서 개인의 독립적인 자유의지의 존재와 타자간의 절대적 타자성에 대한 전제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중이야. 형이상학의 영역이기 때문에, 과학적 논증의 방법을 통해 증명할 수는 없지만 너와 내가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을 들어 전제를 뒷받침하고 있어. 두 번째 전제에 대한 설명은 이 정도로 마칠게. 다음 편지에서 보자.

(ㄱ) 죽음의 수용소에서, 빅터 프랭클 지음, 청아출판사, 1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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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째 편지: 기독교가 전제하는 것들 2 – 절대적 타자성과 자유의지에 1개의 응답

  1. jinwooim댓글:

    오랜동안 고민하고 결론을 가져왔던 내용들에 대해 이론적 근거들을 이렇게 쉽게 접할 수 있다니 놀랍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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