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 편지: 기독교에서 전제하는 것들 3 – 신이 존재한다

전제 세 번째, 신이 존재한다.

나는 창조물을 심판한다는 신을 상상할 수가 없다 (아인슈타인)

서론에서 이 인용문에 대한 답을 간략하게 했었지. 창조물 중에는 자연법칙에 그저 순응하여 자극에 따른 반응같은 행동만 하지 않고, ‘왜?’라는 물음을 던지며 자연법칙을 파악하는 ‘이성’이라는 것을 갖춘 인간이 있다고 말이야. 그 이성이라는 것은 자연에 속하지 않아야 한다고 했어. 아니, 이성이라는 것은 필요한 만큼 자연에서 해방되어 있는 것이야. 이성은 자연을 바라보는 관계를 가질 수 있어. 마치 우리가 손목시계가 어떻게 째깍째깍 돌아가며 시간을 정확히 가르쳐주는지 그 작동원리를 이해하는 것처럼 말이야. “아하, …그래서 시계가 정확히 몇 시 몇 분 몇 초인지를 가르쳐주는 거구나.”하고 깨닫지.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성을 통해 자연을 바라봐. “중력 때문에 사과가 아래로 떨어지는 거구나.” 하고 깨닫지. 우리가 자연과 맺은 관계는 독특해. 분명 자연부품 중에 하나인데 자연과 분리되어서 자연을 관찰하고 이해할 수 있어. 이성이 자연과 관련된 것은, 시계 안의 내부부품들이 서로 관련을 맺는 것과는 다른 방식이야. 우리가 이성을 통해 얻게 된 지식은, 자연이라는 시계의 부속품 중의 하나가 되어서 알게 된 것이 아니라 시계 부품들 동작 위에 서서 작동원리에 대해 캐물었을 때 깨닫게 된 거야. 따라서 이성은 자연의 일부일 수 없어. 그렇지만 이성과 자연이 독립적인 것으로 완전히 분리된 것은 아니야. 우리 인간 스스로를 보자구. 초자연적인 이성이 자연과 어찌나 잘 결합되어 있는지, 우리는 그 혼합체를 총칭해 ‘나’라고 부르지.

지난 번에는 돌아보지 못했던 자연주의자들의 반박들을 살펴보자. 자연주의자들은 우리의 정신적 행위를 완전히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해. 육체 뿐 아니라 정신 역시 진화해 왔다고 생각하거든. 그들의 주장을 한번 들어보자. 그들은 우리가 모두 태초의 원시생물로부터 진화해 온 동물이라고 가정해. 그들에 따르면 원시생물은 전혀 이성적이지 못했어. 다시 말하면 우리 인류의 조상은 비이성적이었어. 생물의 성장과 발전이란 그저 거듭된 분자들의 결합과 분리에 의지할 뿐이라는 것이지. 다시 말하면, 우리가 가진 사고란 모두 외부에 원인을 두었었고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란 자극에 따른 반응에 불과한 것이었지. 그러나 그 반응은 의미가 있었다고 주장해. 자연선택이라는 본능과도 같은 법칙을 통해서 우리는 그 반응 중 이로운 것과 해로운 것을 가려내어 이로운 것을 선택할 수 있었다는 거야. 그러다 보니 이로운 것만 남겨지고 해로운 것은 계속 제거되어 왔다는 거야. 그래서 이로운 것은 옳은 것, 즉 참이 되었고 해로운 것은 거짓이 되었다는 이야기지. 진화를 통해 비이성적인 인간이 이성적인 인간으로 진화해 왔다는 거야.

글쎄, 과연 그럴까? 결론부터 얘기하면 그들의 이런 주장은 허무해. 그들이 맞다면 우리가 무수히 고민하고 생각해서 얻었다는 지식들이 도무지 ‘진리’ 혹은 ‘앎’이 될 수 없거든. 끈처럼 길게 이어진 인과관계의 자연현상에서 앎을 얻으려면 그 인과관계에서 벗어난 관찰자가 꼭 있어야만 해. 관찰자는 현상을 관찰하고 원인에 따른 결과가 왜 그렇게 귀결될 수 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를 파악할 수 있지. 그 이유를 파악하면서 관찰자는 “왜?”라는 질문을 던져. 왜냐하면 ‘앎’이란 “왜?”라는 질문을 던져야만 얻어지는 것이거든. 우리가 손목시계의 기어처럼 자연법칙의 앞뒤에 맞물려 돌아갈 뿐이라면 내가 왜 이렇게 돌아가는 것일까 하는 질문은 던질 수가 없어. “대체 우리는 왜 이렇게 동작하는 걸까?” 하는 따위의 질문 없이 이치에 맞게 최적의 시계부품이 되어 작동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 입장에서는 우연일 뿐, 우리가 옳다는 아무런 근거도 우리의 이성에 기대어 찾을 수가 없어. C.S. 루이스가 그의 책 ‘기적 (홍성사 펴냄, 2008)’에서 비유했듯이, 우리가 아무리 시력이 좋아진다고 한들 빛이 잘 보일 뿐이지 빛에 대해서 더 잘 알게 되는 것은 아니야. ‘왜’라는 질문, 빛과 독립된 개체로서 빛의 외부에서 던질 수 있는 그 질문을 던져서야 비로소 빛의 성질을 깨달아갈 수 있게 돼.

어떤 이들은 자연선택이 아닌 경험을 내세우기도 해. 무수한 세월 동안 쌓여진 경험의 학습을 통해 본래는 이성적이지 않았던 정신적 행위가 결국 지금의 이성으로 발전했다는 이론이야. 날카로운 도구를 쓸 때 고기를 더 쉽게 자를 수 있다는 반복 경험을 통해 고기를 자를 때면 날카로운 도구를 기대하거나 연상하게끔 인간을 조건화했다는 거야. ‘기대=추론’ 혹은 ‘연상=추론’이 된 셈이지. 그런데 기대나 연상은 감정에 속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감정은 자극에 대한 반응으로 볼 수도 있는 영역인데 이것이 과연 이성적 추론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을까? 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 이성적 추론이란 “왜?”라는 질문을 던져야만 되거든. 그리고 어떤 명제에 대해 ‘왜냐하면’으로 시작된 답이 마련되어야만 해. 영화 매트릭스를 기억해 보자. 그 영화에서 사람들은 매트릭스라는 철저하게 프로그램된 가상현실 속에서 살아가. 그렇게 착각 속에 사는 이들 중, 프로그램의 오작동으로 인한 자연스럽지 못한 현상을 발견하는 이들이 있어. 그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하지. 왜냐하면 자신들이 익숙했던 그 법칙과 어긋나는 듯한 일들이 일어나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상하다는 생각만 가지고 그냥 지나쳐버리지. 설령 의문을 품었다손 치더라도 매트릭스의 교묘한 세뇌로 인하여 기억이 상실되어 버려. 그런데 그 현상이 잘못되었음을 보고 “왜?”란 질문을 끊임없이 던진 이들이 있었어. 주인공 네오같은 이들이야. 결국 이들은 매트릭스의 실상을 깨닫게 되지. 매트릭스가 가상현실이란 걸, 자신의 삶이 철저하게 프로그램된 영상이란 걸 이들은 깨달았어. 그래서 그들은 매트릭스에서 벗어나고야 말지. 그들의 이성을 따라서 말이야. 매트릭스의 오작동을 보고 그저 이상하게 느낄 뿐이면 매트릭스가 가상현실이란 걸 절대 알 수 없어. “왜?”라고 끊임없이 묻고, 어떤 원인과 과정으로 말미암아 그 오작동이 귀결되었는지 파악해야만 매트릭스에 대해 ‘알’ 수 있어. 마찬가지로 고기를 보고 날카로운 도구를 기대하거나 연상할 뿐이면, 왜 날카로운 도구가 고기를 잘 자르는지 그 이유는 영원히 알 수 없어. 그 원리에 대한 이성적 질문을 던지지 않으면 말이야. 이것은 우리가 자연이라는 기계 안에서 돌아가는 부품에 불과하다면 할 수 없는 일이야. 이것은 결국 우리 내면에 자연 너머로 한 발자국 성큼 내딛을 수 있는 무언가가 존재하기에 가능한 일이지.

재미있는 것은 자연주의자들도 이성적 추론을 사용해서 자신들이 진리에 도달한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점이야. 그들의 이론에 따르면, 이성적 추론에 따른 것들은 결국 믿을 게 못되는 것인데두 말이지. 인간성을 배제하는 철학을 견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역시 인간인 셈이야. 이성으로 자연을 총괄하는 습성에 너무 익숙한 탓에 자연주의자들 역시 자신들 생각 이상으로 자신들이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을 잠시 잊은 셈이지.

자, 아직까지는 이성에 대한 이야기만 했어. 신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이것은 ‘존재’의 근원에 대한 것을 고민해 봐야돼.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존재자. 다른 존재를 파생시키는 근원이 되는 존재. 그리고 그 존재의 주체가 되는 존재자 말이야. 바로 모든 존재의 근원이 되는 특별한 존재자 말이야. 자연 위에 군림하는 우리 이성을 살펴보자. 우리의 이성은 독자적일까? 그런 것 같아. 적어도 나는 그것이 이성의 자유의지라는 특성에 의해 예증된다고 주장했고, 각 개인의 이성은 독자적이고 자발적이라고 전제했어. 그렇다면, 그 이성적 사고가 절대적으로 독자하는 것일까? 인간의 이성은 과연 태초로부터 주어진 것, 자생한 것, 절대적인 것일까? 그렇지 않아. 이것은 우리의 이성의 불완전함을 보면 답이 나오지. 우리 이성은 우리 몸이 죽었을 때 더 이상 활동하지 못해. 죽음으로 인한 유한성이 있지. 그리고 각 사람의 이성은 다른 사람의 이성의 도움을 받아 무언가를 깨달아 왔어. 다른 사람의 이성은 또 제 3의 다른 이성에게서 배웠을 테고 그 3의 이성은 또 다른 제 4의 이성에게서 배웠을 거야. 우리는 이렇게 계속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거야. 지지부진한 이런 생각을 멈추고 돌이키면, 우리는 독자적인 존재, 영원부터 존재하는 무엇을 생각할 수 밖에 없어. 스스로 존재하는 자. 따라서 존재하기를 멈출 수 없는, 죽음이 없는 존재. 우리는 그 존재를 신이라 부르지. 이런 이성의 연관 속에서 우리는 신의 특성을 하나 배울 수 있어. 우리 인간의 이성은 신이라 불리는 그 이성적 존재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 말이야. 루이스는 ‘기적’에서 이런 은유를 사용했지. ‘각각의 인간 정신은, 말하자면 그 초자연적 실재가 자연 속으로 뻗은 가지이자 창끝이고 지류입니다’라고.

여담이지만, 갑자기 성경구절 하나가 생각나는구나.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란 것이 각 개인의 이성에 창끝을 꽂듯 작용하는 묘사가 말이야.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영혼과 정신을 갈라놓고 관절과 골수를 쪼개어 그 마음속에 품은 생각과 속셈을 드러냅니다. (성서 공동번역, 히브리서 4장 12절)

여전히 자연주의를 견지하는 다른 신관도 살펴보자. 자연 그 내부는 기계에 불과하더라도 자연 그 전체 체계가 스스로 존속하고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존재일 수가 있어. 자연 그 전체가 주체성을 갖는 셈이지. 그래서 자연 그 전체가 무언가 우주적인 의식을 형성하며, 이것을 우리는 ‘신’으로 인식한다고 주장하기도 해. 그렇다면 우주는 신의 몸이 되는 셈이야. 그런데 말이야. 이것 역시 자연주의를 견지하려면, 똑같은 난점을 갖고 있어. 자연에 존재하는 우주적 의식이란 게 역시 원자활동으로만 구성된 원인과 따른 결과가 되는 한 절대 이성이 될 수 없어. 자연이 태초부터 이성적이었던 게 아닌 이상, 누군가가 이성적인 자연을 만들었던 게 아닌 이상 불가능한 일이야. 비이성적인 것이 이성적인 무엇으로 스스로 진화할 수는 없어. 지금까지 설명한 것과 같은 이유지. 게다가 자연의 부속품에 불과할 인간이 이성을 지니는 이유를 설명할 수가 없어. 이 이론에 따르면 주체적인 이성의 소유자는 자연 그 전체일 수 밖에 없거든.  따라서 이것은 또한 수많은 우리 개개인들 이성의 근원이 될 수 없어. 자연의 주체되는 그 무엇이 자연 스스로를 바라보고 스스로에게 의지를 부여할 수 있다고 하여도, 이 관점 역시 신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게 돼. 이 경우 자존적이고 근본적인 그 전체 의식은 결국 신이 되는 것이거든.

이성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다 보면, 신의 존재를 긍정하는 것이 훨씬 자유롭고 풍성한 철학이라는 것을 깨닫게 돼. 자연주의로 이성을 설명하려다 보면, 그래서 신의 존재까지 부정하게 되면 수많은 난제가 떠오르게 되지. 자연주의로 설명하기 어려운 이성의 특질 하나만 더 이야기해볼게. 바로 ‘공리’라는 것이야. 우리 이성이 추론을 시작하기 위해 출발점으로 삼는 명제들이지. 따라서 증명이 불가능해. 논리학에서는 무증명명제라고도 일컫지. 우리는 이것들이 옳다는 것을 ‘그냥 알아’. ‘그저’ 깨달을 뿐이라구. 공리의 예를 몇 개 살펴볼까?

  • 명제 P가 성립한다면 명제 ‘P 또는 Q’도 성립한다.
  • 두 점이 주어졌을 때, 그 두 점을 통과하는 직선을 그을 수 있다. (유클리드 기하학)
  • a=b 이면, a+c = b+c 이다.
  • 공집합이 존재한다.

위에서 예로 들었던 고기 자르는 날카로운 도구도 생각해보자. 고대인들의 사고를 추정해보면 다음과 같을거야.

  1. 난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좋다.
  2. 난 살기 위해 먹어야 한다.
  3. 난 소화가 잘 되는 것을 먹어야 한다. 그것이 내게 이롭기 때문이다.
  4. 고기가 작은 것이 소화도 잘 되고 먹기에 좋다.
  5. 날카로운 도구를 쓰면, 뭉툭한 도구보다 적은 힘으로 빠르게 고기를 자를 수 있다.
  6. 앞으로 고기를 자를 때면 날카로운 도구를 이용하자.

고대인들은 분명 반복된 경험으로 날카로운 도구가 자신에게 이롭다는 것을 깨달았어. 날카로운 도구가 콜라겐 분자 결합을 끊기에 수월하다는 것을 당시에는 굳이 몰랐더라도 말이야. 그런데 고대인들은 이미 몇 가지를 알고 있었어. 날카로운 도구를 사용해서 고기가 수월하게 잘리는 것이 ‘좋다’라는 것을 말이야. 결국 그것이 자신에게 ‘이롭다’는 것을 말이야. 그리고 남들과 다른 ‘자신’이라는 것을 말이야. 우리 ‘자신’이란 결국 매 7년마다 심장과 두뇌의 일부를 제외하곤 모든 분자가 교체되는 물질 덩어리에 불과한 데 말이지. 사실 우리 몸이 주변환경과 구별될 수 있는 것은 우리 몸의 분자들끼리 보다 더 가까이 위치하고 있을 뿐이지, 수없는 물과 공기분자가 우리 몸을 쉴 새없이 들락날락거리며 너와 나의 경계를 무색하게 만들고 있거든. 그런데 우리는 우리 ‘자신’을 명확하게 인식해. 두뇌에서 연결된 신경의 감각들이 ‘나’라는 경계를 파악하게 도와주지. 그렇지만 우리는 어떻게 우리 ‘자신’을 인식할 수 있는 걸까? 그리고 사는 게 죽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대체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그 이기심은 어디서 비롯된 걸까?

어디서 배웠는지 모를 이 ‘앎’들. 우리는 대체 어떻게 이것들을 알고 있는 걸까? 그리고 어떻게 모두가 공감하고 있는 것일까? 자연주의가 인간의 정신활동은 자연발생된 것이라고 주장하려면, 이 공리들에 대한 것부터 설명해내야 해. 우리가 대체 이것들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 말이야. 그리고 여기서 어떻게 추론과정을 인간이 수행할 수 있는지 역시 설명해내야 하지. 공리들은 비이성적인 게 아니야. 자명한(self-evident) 것이지. 따라서 우리의 이성은 이 내재적으로 합리적인 명제들에 의존해. 난 말이야. 이 공리들은 신이 자연에게 부과해 준 원리라고 생각해. 어쩌면 신 그 자체의 성품이 담긴 것인지도 모르지. 신의 일부일지도 몰라. 분명한 건, 이 공리들은 우리가 가진 이성의 뿌리가 된다는 것. 독자적으로 사유하는 우리의 이성들이 추론을 해대며 활개칠 수 있는 터전이 된다는 것이야. 그런 의존성을 살펴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에도 근원의 실체가 있음을 알 수 있게 되지. 바로 ‘신’이라는 존재를 말이야.

자, 재미있지 않아? 난 초자연적인 신이 존재한다는 전제의 근거를 바로 인간에게서 찾았어. 우리가 자연의 일부라고 여겨서 ‘동물’로 구별하기도 하는 인간에게서 말이야. 그것은 인간이 다른 자연의 구성원들과는 다르게 이성적 추론과 도덕적 판단을 할 수 있기 때문이야. 대지 위를 흐르는 강물은 ‘난 왜 이렇게 하릴없이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려가야만 할까?’ 하고 캐묻지 않아. 노을을 바라보는 나무늘보는 ‘햐~ 아름답다’ 하며 미학적 판단을 하지 않지. 사자가 노루를 사냥해 잡아먹는 모습을 보면서, 독수리는 ‘사악한 사자녀석들’ 하고 도덕적 비판을 가하지 않아. 자연은 자연법칙에 순응하며, 자연스럽게 살아갈 뿐이야.

인간은 달라. 굽이치며 도도히 흘러가는 강물을 보며 ‘삶이 어찌 이리도 휘몰아치며 흘러갈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시상을 토해내는 것이 인간이야. (각주는 나중에 미국에 도착해서 달자) 이성적 판단을 수행하고 끊임없이 삶의 의미를 좇기 때문에, 사고하는 인간의 눈 앞에 신의 존재는 지평선 너머로 희미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지. 왜냐하면, 내가 전제했듯이 인간은 구원을 스스로 얻지 못하는 한계성이 있고 인간의 이성은 신적 이성에 의존하고 있으며 인간의 도덕적 기준은 신에게 그 기원을 두고 있기 때문이야.

물리학자들의 뛰어난 이성적 탐구 능력은 신이 존재해야만 문제가 풀리는 한 가지 난제를 발견하게 해 주었어. 바로 우주의 기원에 대한 문제야. 무신론자들은 우주가 현재 상태로 영원토록 지속되어 왔다는 견해를 편하게 고수해 왔어. 그러면 신이 어느 시점에 우주를 창조했다는 견해를 반박하려 애쓰지 않아도 될 뿐더러 따라서 굳이 우주의 기원에 대해 설명하지 않아도 되거든. 그러나 우주가 대폭발(Big Bang)로부터 비롯되었다는 물리 이론 때문에 더 이상 그 입장을 고수하기 힘들게 되었어. 빅뱅 이론은 현재까지도 우주 배경 복사(Cosmic Microwave Background Radiation)의 존재와 여러 특성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이론으로서 거의 모든 천체물리학자들에게 지지를 받아. 우주 배경 복사는 우주 모든 방향에서 검출되는 160.2GHz의 마이크로파로서 뜨거운 가스 형태의 무엇이 현재의 우주 크기로 팽창했을 때 방출될 것으로 예상되는 복사야. 150억 년전 우주가 대폭발을 통해 생성되어 팽창하고 그래서 점점 식어갔을 때 우주 전체에 걸쳐 남겨진 복사라는 거지. 중요한 것은 우주의 시작이 있었다는 거야. 자, 존재하기 시작하는 모든 것에는 원인이 있어. 예컨대 내가 존재할 수 있던 것은 내 나이만큼의 햇수 전에 우리 부모님께서 나를 낳아주셨기 때문이야. 그리고 우주는 어느 시점부터 존재하기 시작했어. 그 시점 전에는 우주가 존재하지 않았어. 따라서 우주를 존재하게 한 원인이 반드시 존재해. 어떤 사건이던 그 사건을 발생하게 한 원인이 존재하기 마련이지. 갑자기 우리 귀에 쾅 하는 소리가 들렸다고 하자. 우리는 그 소리가 비롯된 원인이 당연히 있다고 생각할거야. 그렇다면, 우주가 탄생하면서 발생한 큰 굉음(Big Bang)에 원인이 있는 것 또한 당연하지 않겠어? 물리학자들은 우주의 탄생과 더불어 시공간이 생기고, 물질들이 만들어졌다고 생각해. 우주 탄생 전의 시간과 물질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의미없다고 여기지. 그렇다면, 우주를 생기게 한 원인은 시공을 초월하는 존재요 초물질적(transphysical)인 존재여야 해. 더불어 원인 없이 존재하는 존재여야 하고 그러므로 변함없는 존재여야 해. 그렇지 않다면, 우주의 원인 그 이전 원인을 또 찾아야 하는데 이것은 의미없는 물음의 반복에 지나지 않지. 무에서 아무런 원인 없이 유가 나올 수는 없어. 어느 시점부터 존재하기 시작한 우주는 우리에게 초자연적인 존재가 있음을 가르쳐 주지. 바로 ‘신’이라는 존재를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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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epsky3에 대하여

Stanford Grad Stud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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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편지: 기독교에서 전제하는 것들 3 – 신이 존재한다에 1개의 응답

  1. deepsky3댓글:

    세 번째 전제부터는 글을 쓰기가 좀 힘들다. 전제들: 신은 존재한다, 그 신은 선하다, 신은 자연을 창조했다. 왜냐하면 이것은 신이 존재한다는 철학이 그렇지 않다는 철학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인데, 나로서는 당연하게 느껴지는 무엇을 남들에게 ‘느낌’이 아닌 ‘논리’로서 설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김태희는 이쁘다. 적어도 한국 남자라면 누가 봐도 이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라면? 골치 아플 것이다. ‘이목구비가 뚜렷한데 여기서 이목구비가 뚜렷하다는 것은 눈이 크고 선명하며, 코가 오똑하고… 그 조합이 예뻐 보이는 이유는 다음과 같으며…’ 등등 쉽지 않은 일이다. 신이 존재한다는 철학을 이미 머리로 받아들이고 가슴으로 예배하는 나로서는 기독신학의 좋음이 김태희가 예쁜 것마냥 당연하게 여겨지는 지금에서, 왜 나은 철학인지 설명하라는 것은 힘든 일이다. 어찌보면, 좀 지지부진한 작업이다. 그러나 나보다 더 진지하게 종교를 대하는 이들에게는 더더욱 중요한 대목일 것이다. 게으른 마음을 다잡고 글쓰기에 임해야 하리라.

  2. jinwooim댓글:

    남자 친구들에게 설득력있는 덧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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