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경동 목사의 발언 “스님들 빨리 예수를 믿어야 한다”에 대한 비판

‘웃기는 목사’ 장경동 목사를 들어보셨는지요? 특히 부부관계 등을 이야기할 때 뛰어난 언변으로 청중들의 공감과 재미를 이끌어내 많은 이들에게 웃음을 선사하곤 했던 장경동 목사. 그 분이 비기독교인들에게도 유명해졌습니다. 바로 ‘불교 비하’ 발언으로 말입니다. 인터넷 기독교신문 ‘뉴스앤조이’에 따르면, 장 목사는 2008년 뉴욕순복음교회에서 열린 집회에서 이렇게 얘기했다고 합니다.

“내가 경동교(장경동교)를 만들면 안 되듯이 석가모니도 불교를 만들면 안 되는 것이었다. 원불교나 통일교도 만들면 안 되는 것이었다.” 또, “스님들은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빨리 예수를 믿어야 한다”며 “불교가 들어간 나라는 다 못산다. (내가 이런 말 하면) 불교 비하한다고 하는데, 나는 바른 말을 한 것이다”라며 불교를 폄하했습니다.

관련기사 링크 (뉴스앤조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기독교가 진리라고 생각하지 않는 분들은, 저런 오만한 발언이 있나 하고 생각하실 거구요. 불교를 믿으시는 분들은 심한 모욕감까지 느끼셨을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기독교가 참진리라고 믿는 당신들은 “스님들도 예수를 믿어야 하는 건 맞는 이야기이긴 한데, 면전에 대고 이야기하기엔 무례한 이야기이지 않을까?” 라고 생각을 하지는 않으셨는지요?

저는 위와 같이 생각했더랬습니다. 왠지 옳은 이야기를 싸가지 없이 한 것만 같은 그런 불편한 생각이 들어, 저 태도가 과연 옳은 것일까 또는 옳지 않다면 어떤 태도가 옳은 것일까 하고 적잖은 고민을 했습니다. 일단, 저의 이런 태도에 대해서도 모욕감이나 불쾌감을 느끼실 분들에게는 죄송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과거의 저와 같이 고민하실 많은 기독교인들을 위해서, 또한 종교의 화합을 꿈꾸는 독자들을 위해서 장경동 목사의 발언에 대한 비판과 곁들여 타종교에 대한 올바른 태도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기독교는 독선적인 종교입니다. 선과 악이 있다고 주장하며, 절대선이 있고 그 절대선은 유일한 신이라고 믿는 종교입니다. 진리로 가는 길도 하나요, 진리 역시 하나라고 주장하는 종교입니다. 타종교와 갈등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그 종교의 으뜸이 되는 예수는 만인의 존경을 받습니다. 그의 가르침과 행위는 분명 그 시대의 빛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귀족과 평민, 천민이 구분이 엄격했던 저 옛날에 하나님의 가르침을 좇는 모든 이가 서로 부모요, 형제요, 자매라고 했습니다. 남녀유별이 분명했던 시대에 남녀의 평등과 상호존중을 이야기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율법에 대한 몰이해를 비판했으며, 항상 낮은 자리에서 가난한 자들과 삶을 함께 하였습니다. 이러한 예수의 행위와 가르침은 많은 부분에서 타종교가 추구하는 바와 일치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것이 비롯되었고 다시 하나님으로 돌아간다는 근원적 세계관은 타종교와 다르나 실천적 측면에서 타종교와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깊은 삶에 대한 고찰을 통해 우리가 진리라고 깨닫는 부분은 기독교나 타종교나 별반 다를 바가 없어 보입니다. 심지어 이와 같은 점들 때문에 다원주의에 진리가 있다고, 진리는 모든 종교로 통할 수 있다고 믿는 이들도 있습니다.

다행입니다. 이 진리에 대해 공통의 언어로 우리는 토론하고 대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슷한 점, 다른 점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비교하고 서로를 통해 장점을 배워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것이 참 진리냐 하는 것 또한 토론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영역, 개인의 취향에 의해 결정될 것들만 개인의 호불호를 따라 결정하면 될 일입니다.

진리와 거짓으로 하여금 서로 맞붙어 싸우게 하십시오. 자유롭고 공개적인 경쟁에서 진리가 패배하는 일은 결단코 없습니다. 진리의 논박이야말로 최선의 억압이며 가장 확실한 억압입니다.

존 밀턴의 사상과 표현의 자유에 관한 연구서 <아레오파기티카>(박상익 옮김, 소나무 펴냄, 1999)에 나오는 글귀입니다.이천여 년 전 이스라엘에서 바울과 사도들이 예수는 부활했다고 주장하며 그리스도교를 전파할 때, 유대인들은 그들을 잡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그 때 존경받는 율법교사 가말리엘은 그들을 말렸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동포 여러분, 여러분은 이 사람들을 어떻게 다룰지 조심하시오. 이전에 드다가 일어나서, 자기를 위대한 인물이라고 선전하니, 약 사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를 따랐소. 그러나 그가 죽임을 당하니,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모두 다 흩어져 없어지고 말았소. 그 뒤에 인구조사를 할 때에, 갈릴리 사람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서, 자기를 뒤따라 반란을 일으키게 한 일이 있소. 그가 죽으니, 그를 따르던 사람들도 다 흩어지고 말았소. 그래서 지금 내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 바는 이것이오. 이 사람들에게서 손을 떼고, 그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시오. 이 사람들의 이 계획과 활동이 사람에게서 난 것이면 망할 것이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면 여러분은 그것을 없애 버릴 수 없소. 도리어 여러분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봐 두렵소.” (사도행전 5장 35~39절, 표준새번역 성경)

유대인들은 그의 말을 옳게 여겼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사도들을 불러다가 때린 뒤에,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명령하고서 놓아 주었습니다. 저는 가말리엘의 태도가 옳았다고 생각합니다. 진리는 억압되지 않습니다. 모든 이들의 올바른 이성적 활동 저 편에 놓인 갈망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그렇게 이천여 년이 넘은 지금도 살아남아 있습니다. 핵심교리는 하나도 바뀌지 않은 상태로 말입니다. 오히려 수많은 타종교들과의 갈등 속에서 더더욱 섬세해지고 정교해져 왔습니다. 이전보다 더 진리에 가까운 모습이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아쉬운 점은 많은 이들이 기독교의 이성적 강점을 모른다는 것이지요.

장 목사의 발언은 억압에 가깝습니다. 폭력이 없었다 뿐이지 남에게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명령에 가까운 발언입니다. 불교는 열등하다, 불교는 믿는 이들은 잘못되었다라는 이야기는 특히나 불교를 숭상하는 이들에게 큰 모욕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최고 가치가 폄하된 것에 대해 분노를 느낄 것입니다. 특히 진리의 참빛을 찾겠다고 세속을 등진 채 입산하여 온갖 고행을 굳은 의지로 견뎌내는 스님과 비구니들께 모욕입니다. 모욕을 느낄 만한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충분한 이성적 추론에 입각하여 불교에 대한 비판을 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이 납득할 만큼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 상황에서 강압적으로 기독교 입문을 권유했으니 상대방은 그것을 언어폭력으로 받아들입니다. 각 개인은 종교를 선택할 엄연한 자유의지가 있고, 불교신자는 자신의 삶을 걸고 그 자유의지를 활용하여 선택한 길입니다. 그 자유의지를 존중받지 못할 때 개인은 분노를 느낍니다. 자신과 충분한 토론을 거쳐 기독교가 우월하다고 납득시킨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결론은 자기 마음대로 내려버렸기 때문에 이 역시 자신의 의사를 무시한 행동으로 모욕감을 유발합니다. 둘째 이유는, 바로 자신의 고유한 자유의지가 침범당한 기분이 들며 그것을 지금까지 열심히 활용해 온 노력이 무시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장목사의 발언은 어때야 했을까요? 나아가 타종교에 대한 태도는 어때야 할까요? 기독교인들의 비기독교인들에 대한 태도는 어떤 모습이어야 좋을까요?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1. 모든 종교는 최대한으로 발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규모가 커져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질적으로 발전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모든 종교는 이성적으로 깊게 발전하고, 보편적으로 나눌 수 있게끔 되어 토론의 장 위에 올려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되면 다원주의자들의 꿈도 얼마간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어느 종교인이든 자신의 신앙에서 출발합니다. 올바른 이성적 추론 방법을 배우며, 진리를 스스로 찾아가다 보면 공개적인 논박의 장에서 비로소 참진리, 최고의 선을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무신론자들도, 비종교인들도 진리에 대한 관심이 있을 시 무신론자로서, 무교인으로서 이 토론의 장에 참가할 수 있게 됩니다. 상대방이 인간과 우주를 바라보는 관점을 멋진 지도로 그려내어 서로의 지도에 나온 길들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이 확실한 지도를 가지고 나눈다면, 적어도 상대방을 미치광이로 몰거나 악인으로 오해하여 벌어지는 다툼은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2. 이를 위하여 타종교에 대한 억압이란 이성적 토론 그 이상이 되어선 안됩니다. 오히려 타종교에 대한 존중과 후원이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가 많은 후원을 받아 수많은 신학교와 더불어 기독신학의 발전이 있었듯이, 다른 종교 또한 열성적인 후원에 힘입어 깊고 넓은 발전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렇게 충분한 발전을 통해 토론의 장에 오를 수 있도록 보편적 언어로 그 종교 최선의 모습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당신이 기독교인이라면, 오히려 불교를 후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불교인들을 사랑한다면 말입니다. 불교를 믿는 친구에게 그의 바르고 깊은 이해를 위해서 좋은 불교 강해 서적을 사줄 수도 있습니다. 당신이 정부의 관리라면, 종교편향 없이 모든 종교기관에 성숙과 발전을 위한 경제적·제도적 지원을 합니다.

3. 한 종교가 참진리이고 다른 종교는 참진리에 미치지 못한다고 가정합시다. 그렇다 하더라도 다른 종교를 믿는 이의 삶을 존중해야 합니다. 천하보다 소중한 한 사람의 삶을 존중해야합니다. 당신이 기독교인이라면 예수께서 말씀하신 탕자와 아버지 이야기를 상기하고 둘째 아들 대하듯 하십시오. 요구하는 것을 한도 내에서 들어주고, 참고 기다리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그렇게 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 기독교인은 한 때 모두 둘째 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를 만나게 된 지금, 첫째 아들의 우를 범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기의에 빠져 둘째아들을 판단하며, 아버지의 사랑을 오해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예수는 그 우화를 당시 자기의에 깊게 물든 바리새인들 앞에서 들려주었습니다. 예수께서 잘못했다고 꾸짖는 이는 둘째 아들이 아닙니다. 바로 첫째 아들입니다. 기독교가 진리라고 깨닫는 사람은 기독교로 돌아오게 마련입니다. 나이 일흔이 넘어 예수쟁이가 된 이어령 선생님 같은 분도 계십니다.

4. 저는 인간이 겪어가는 모든 경험은 선하면 선한 대로, 악하면 악한 대로 다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악한 일이 좋다거나 괜찮다는 것이 아닙니다. 끔찍한 악의 경험조차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을 뿐입니다. 저는 인간이 만든 모든 종교 역시 하나님과 함께 임하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훌륭한 자원으로 쓰일 것이라고 믿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8절에서 바울 사도는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주님의 일을 더욱 많이 하십시오. 여러분이 아는 대로, 여러분의 수고가 주님 안에서 헛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수고는 헛되지 않습니다.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의 소중한 건축 재료가 될 것입니다. 타락한 부분은 고쳐지고, 우리들의 아름다운 경험으로 탈바꿈될 것입니다. 진리를 찾아 순례의 여정을 떠나는 우리 모두의 노력은 분명 헛되게 쓰이지 않을 것입니다. 스캇 펙 박사가 묘사했듯이 우리의 정신적 성숙에 이르는 길이란, “작은 우주에서 출발하여 보다 더 큰 우주로 들어가는 여행”입니다. (‘아직도 가야할 길’, 열음사 펴냄, 2004)

요약하건대, 타종교에 대한 비판은 상호존중 하에 이뤄져야 합니다. 종교인이란 대저 진리를 찾아 여행을 떠난 순례자들이기 때문에, 각각의 노력을 비웃어 모욕을 주는 행위는 삼가야 합니다. 서로의 길을 존중하고, 서로가 배운 것을 나누며, 어느 것이 진리인지 우열을 가리고 싶을 때는 보편적 언어로 이성적인 토론을 가져야 합니다. 언어폭력은 좋지 않습니다. 상대방을 사랑하고 존중하십시오. 스스로 찾아가는 그 노력에 박수를 보내십시오. 인간에게 부여된 소중한 도구, 이성적 능력을 잘 발휘할 수 있도록 도우십시오. 악은 우리의 왜곡되지 않은 이성에 패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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