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 편지: 기독교가 전제하는 것들 4 – 신은 선하다

전제 네 번째, 신은 선하다(God is good).

이전 편지에서 우리의 이성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신의 존재를 발견할 수 있음을 역설했어. 자연주의자들이 ‘이성은 자연발생적이다’라고 주장하는 것들을 하나하나 반박하면서 말이야. 그러면서 공리에 대한 이야기를 했지. 어디서 온 건지 모른채 우리가 ‘그냥’ 아는 명제들을 말이야. 어떤 독자적이고 근원적인 존재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면, 그의 유래를 도무지 설명할 길이 없는 그 공리들. 그 공리들로부터 신의 성품을 유도해 낼 수 있을거야. 그뿐이야?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이성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을거야. 왜냐하면 공리가 신이 추구하는 원리라면, 그가 우리에게 부여한 이성 추론의 방식 역시 그의 방식일 것이야. 게다가 신 역시 그 이성적 추론 방식에 의해 선악을 구별하게끔 했다고 가정하는 것이 마땅하지. 신의 선함은 우리의 선함과 결국 크게 다르지 않을거거든. 그렇지 않다면, 기독교의 신이 우리의 도덕적 판단에 호소하며 이렇게 일갈하셨을리가 없지.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치 아니하느냐? (누가복음 12장 57절)

그런데 아쉽게도 난점이 있어. 공리들은 대부분 수학적 공리들이고, 선악과 관련된 정리들을 그 공리들로부터 끌어내려면 매우 힘들어. 가정도 많이 필요해. 이 가정들은 또한 철학자들이 자기 입맛대로 고르기 나름이고 말이야. 그럼 선택의 여지가 많은 만큼 너와 내가 동의하기 힘들 가능성도 커져. 논쟁의 여지가 너무 많아진다구. 게다가 우리는 선악을 아는 것이 근본적으로 이성에서 비롯될 수 있는 것인지 잘 몰라. 선악의 구분이 우리가 ‘그냥’ 아는 공리 중의 하나일지도 모른다구. 따라서 나는 공리들을 역추적해보려고 해. 우리의 성품을 살피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도덕률들을 활용해서 말이야.

그럼 우리 인간의 독특한 성품들 먼저 살펴보자. 인간은 감각(sensation)도 꽤 발달한 동시에, 그 감각의 정도를 판단하는 감정(feeling)도 매우 예민해. 뜨거운 온천역을 즐기는 사람을 생각해볼까? 김이 무럭무럭 피어나는 온천물에 발을 집어넣으며 그 사람은 물의 온도가 적당한지 파악하지. ‘차갑다-시원하다-미지근하다-따뜻하다-뜨겁다’의 범위 중 따뜻하다는 감정의 판단을 내리게 된 그는 이내 몸 전체를 온천 속에 담그지(아, 따뜻해). 따뜻하다는 감정은 이성과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얼마간 지속이 돼(아, 좋다). 주변의 풍광도 너무 보기 좋아서 감탄사를 연발해(아름답도다!). 그러다가도 너무 오래 있으면 안 되겠다는 도덕적 판단을 감행(이만 나가야겠다), 결국 탕 속에서 나오게 되지.

사람의 정신활동을 관찰하면, 어딘가 물질에서 비롯하여 자연선택으로 진화만 한 동물이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도약(upgrade) 내지는 향상된 듯한 특성이 있어. 대체 사람은 아름답다는 감정을 어떻게 가진 걸까? 그게 순전히 이 사람의 생존과 건강에 좋기 때문일까? 아름다움을 느낀다는 것은 추함을 알기 때문인데, 추하다는 감정은 어디서 배운걸까? 좋다는 감정, 기쁘다라는 감정은 어디서 계발된 것일까? 혹시 어디선가 큰 만족을 경험하다가 만족으로부터 벗어나게 된 것은 아닐까? 아름다움 속에서만 지내다가 그것을 뛰쳐나와 추함을 경험해보게 된 것은 아닐까? 냉엄한 자연선택의 법칙이 존재하는 진화의 역사 속에서는 아름다움을 즐길 틈이 없었을 텐데 말이야. ‘좋다, 나쁘다, 기쁘다, 슬프다’가 따로 없었을 수도 있는데 말이야. 먹으면 먹는대로 만족하고, 못 먹으면 못 먹는대로 새로운 먹을 거리를 찾아다녔을 게 동물인데 말이지. 기쁨과 슬픔, 좋음과 나쁨에는 무감각해져도 사는 데는 문제 없었을 텐데 말이지. 게다가 슬퍼버리면 먹이를 찾으러 나갈 힘도 잃어버리잖아? 우리는 왜 이렇게 슬픔이라는 감정이 발달한 거지?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행복이라는 감정은 왜 이렇게 느끼는 순간이 짧은거야? 인간의 역사를 보자니 온통 전쟁과 범죄와 재해와 질병의 연속이고, 그 사이사이에 끼어드는 행복이라는 감정도 찾아오기가 바쁘게 무섭게 사라지니 말이야. 행복을 가진 순간, 그것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마음을 채우고, 행복을 잃은 순간 과거의 추억을 그리워하는 수준의 감정으로 치환되어 버리니 말이야.

우리는 아직 감각과 감정, 이성의 작용도 과학적으로 밝혀내지 못했으니, 논쟁이 심화될 수 있는 이 이야기는 그만하자. 과학적으로 감정과 이성의 정의가 보다 명확히 밝혀질 때까지 미뤄두자구. 다만, 인간이 여느 다른 동물과 다르게 어딘가 삶의 결핍된 점을 많이 느끼는 동물이라는 것만 기억해 두자. 그럼 이번에는 인간의 감정 중 좀 특이한 ‘누미노제(Numinose)’란 것을 살펴보자. 지금부터는 C.S. Lewis의 ‘고통의 문제’에 나온 이야기야. 그의 논증 전개가 무척 훌륭하기 때문에, 잘 요약해볼게.

그에 따르면 모든 고등종교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대. 그리고 기독교에는 성육신이라는 역사적 사건 하나가 첨가되구.

  1. 누미노제(Numinose)의 경험
  2. 도덕의 경험
  3.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신령한 힘(Numinous Power)과 의무감을 불러 일으키는 도덕의 수호자의 동일시
  4. 성육신이라는 역사적 사건

누미노제라는 것은 으스스한 감정을 말해. 죽음이나 유령 따위에 대한 공포감을 뜻하지. 방구석에 호랑이가 앉아 있다고 하면 우리는 위험을 직감하고 두려움을 느끼지만, 방구석에 유령이 서 있다고 할 경우 우리는 묘한 공포심을 느껴. 단 한번도 유령에 의해 피해를 입어본 적이 없고, 피해가 있을 것이라 그닥 믿지도 않는 우리가 말이야. 이 감정은 전혀 물질적인 것, 물리적인 것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야. 위험을 인식하는 따위의 두려움이 아니란 거지. 죽은 자들이 불러 일으킨 공포심은 어떨까? 죽은 자들은 인간 중에서도 가장 위험하지 않은 부류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공포심을 유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공포감 혹은 경외감은 본질적으로 인간이 우주에서 받는 인상과 관련된 것이라고 Lewis는 주장해. 자연에서 발생원인을 찾을 수 없는, 무언가 자연의 본질이 되는 초자연적인 것에서 인간이 느끼게 된 감정이라는 거지. 그는 이 감정이 단순히 인간 정신의 비꼬인 부분에 불과한 게 아니라면,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 즉 ‘계시’라고 불러야 마땅한 것이라고 했어.

그러나 누미노제는 도덕적 선악과 관련한 두려움과는 상관이 없어. 인간이기에 갖는 특이한 성품, 도덕을 살펴보자. 인간은 어디서 유래됐는지 모를 도덕적 판단을 수행해. 어떤 행위에 대해서 “해야 한다” 또는 “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느끼는 거야. 도움이 필요한 이웃이 있을 때, 우리는 고민해. “귀찮은데 가만히 있을까……? 아니야, 그래도 도와드려야지.” 인간이 자연법칙에 순종하여 반응하는 동물이라면, 두 가지 본능 사이에서 고민하는 일은 없었을 거야. 설령, 고민하더라도 강한 본능에 순응해야 할 텐데, 이상하게 우리는 세미한 양심의 음성에 죄책감을 느끼며 적잖은 경우 작은 본능에 순종하게 되지.

위에 말한 두 가지 경험. 도덕적 경험과 누미노제 경험은 서로 동떨어진 것이야. 그래서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아무 접촉없이 존재할 수 있었어. 고대 종교에서는 신들에 대한 숭배와 철학자들의 윤리적 논의가 분리된 형태가 대부분이었지. 유대교와 기독교가 등장하기 전까지 말이야. 인간이 이 두가지를 동일시할 때 비로소 고등종교는 탄생하지. 즉,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신령한 힘(Numinous Power)과 의무감을 불러일으키는 도덕의 수호자가 합쳐져 ‘정의로운 신’으로 재탄생할 때 말이야.

Lewis는 이 종교의 세번째 발달단계가 인간으로서 엄청난 도약이라고 말했어. 경외감과 의무감을 합치는 것은 생각만 해도 부담스런 일로서,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반대방향으로 진행된 일이기 때문이거든. 그러나 이것이 건전한 방향이었던 것만은 분명하지. 수많은 성인들은 비록 종교 없이도 이 길을 걸었으니까. 경외감으로 겸손을 배우고, 의무감으로 도덕을 단련했지.

루이스의 주장에 힘입어 내가 주장하는 것은 이거야. 유래를 알 수 없는 인간의 성품을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가 이전에 알았던 어떤 초자연적인 우주의 본질이 있었음을 알게 돼. 그리고 바로 이 본질은 경외롭고 정의롭다는 것을 알게 되지. 절대선을 꿈꾸는 우리의 본성은 바로 이 초자연적인 것과의 옛적 관계를 기억하는데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지. 우리의 성품은 또한 그 초자연적인 것을 닮았기 때문에 그 본질을 좇으려 하거든. 신에 대한 경외감과 죽음에 대한 공포감을 느끼고, 아름다움과 기쁨을 추구하며, 선을 위해 악한 행위를 통제하려 해. 이후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우리는 무언가 초자연적인 존재와의 올바른 질서로 인해 만족과 절대선을 경험했던 적이 있었어. 그는 선한 신이었어. 그래서 우리는 기뻐했었고, 항상 행복했었어. 신과의 관계를 잃은 인간은 자연계에서 가장 고등한 생물임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결핍을 경험하지.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모든 생물 중 신과 제일 가까웠던 존재여서 그랬을거야.

Lewis는 그의 책 ‘순전한 기독교’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어.

우주 전체에 정말 아무 의미가 없다면 우주에 의미가 없다는 그 생각 자체를 아예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주에 빛이 없고 따라서 눈을 가진 생물도 없다면 우주가 어둡다는 사실 자체를 알 수 없는 것처럼 말이지요. 그 경우에 어둡다는 말은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할 것입니다.

빛을 알고, 그것을 볼 수 있는 자만이 자신이 어두운 곳에 있다는 것을 알아. 아름답고, 좋은 것, 선한 것을 모르고 그것을 판단할 줄 모르는 자에게는 이런 단어들조차 아무 의미가 없게 되어 버리지.

여기까지 요약해볼게. 즉, 우리의 이성을 거슬러 올라가고, 우리 모두가 느끼는 모종의 감정들과 도덕성을 따라 올라가면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닌, 어쩌면 우리를 만든 선한 신의 존재가 있음을 알 수 있다고 주장했어.

혹자는 반문할지도 몰라. “선한 신이 존재한다구? 무한히 차갑고 공허한 이 우주를 봐. 그리고 생명력이 없는 그 광막한 우주 안에서 기껏 생명체가 편만하다는 조그만 행성 지구를 보자구. 그 쬐그만 행성에서 하루가 멀다하고 무수한 악이 자행되고 고통이 가득해. 선한 신이 우주를 창조했다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하고 말이야. 좋은 질문이야. 고통과 악을 허락할 수 밖에 없는 선한 신을 변호해 보자구. 다음 이야기 역시 Lewis의 ‘고통의 문제’에 나온 이야기야. 훌륭한 글이니까 그 논조를 잘 표현해보도록 할게.

자, 우리가 신에게 온갖 불만을 털어놓고 따지는 이유가 있어. 왜냐하면 신은 전능하다고 믿기 때문이야.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당신께서 왜 이토록 불의와 불편을 야기하냐는 것이지. 자연 속의 수많은 고통과 악을 왜 제거해 주지 않냐는 것이지. 그런데 그 전능함이 정녕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것일까? 비둘기 한 마리만 손에 쥐어주고 두 집에 동시에 거하게 하라고 했을 때, 비둘기를 갑자기 두 마리로 증가시켜도 안되고, 시공간을 변화시켜도 안 된다는 등 조건을 마구마구 달았을 때, 신일지언정 그 모순된 일을 수행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을거야. 전능함이라 할지언정 자신 스스로의 원리에 모순된 것은 할 수 없어. 전능함이란 내재적으로 불가능한 일도 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야. 물론 내재적으로 불가능한 것도 못한다고 신의 능력에 한계가 있는 것 또한 아니야. 모순되는 일이란 결국 무의미한 일이거나 불합리한 일이거든. 가령 “하나님은 자유의지를 주시는 동시에 안 주실 수 있다”는 말은 하나님에 관해 어떤 의미도 전달해 주지 못하지. 만일, 하나님이 모순된 일조차 하게 된다면 의미 없는 분인 동시에 신뢰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리지.

그러면 이제 ‘자연법칙’을 한번 살펴보자. 모두에게 공평하게 작용하는 그 엄격한 자연법칙을 말이야. 너무도 공평하고 엄격해서 신이 끼어들 데가 없어보이는 그 자연법칙. 전지전능하다는 신마저 무력하게 보이게끔 만들어버리는 그 엄연한 자연법칙 말이야. 그런데 말야. 우리 자연을 한번 잘 살펴보자구. 너와 나는 물질로 이루어져 있어. 그리고 너와 나 사이에는 너와 내가 아닌 다른 물질로 가득 채워져 있지. 그 중간 물질을 매개로 하여 우리는 서로 볼 수 있고, 냄새도 맡으며, 말하고 들을 수 있어. 공기를 매개로 음파가 전달되고, 태양이 공급해 준 광자 덕분에 우리는 서로를 볼 수 있어. 서로를 인식한다는 이야기지. 그 뿐이야? 내가 있다는 것도 너와 주위 물질 덕분에 알 수 있는 거야. 자의식이란 환경의 도움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지. 남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나의 존재 또한 아는 거거든. 또한 네가 같은 시공간에서 또다른 의지적인 존재자로서 존재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난 너의 자유를 확보해 주기 위해 나의 자유를 제한해. 자유 역시 환경이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야. 선택의 여지를 제공해주지. 만남이란 만나지 않음이 가능할 때 인식할 수 있는 것이야. 절대자인 신께서 성육신되어 우리 앞에 나타났을 때, 같은 시공간의 환경에서 타자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은 우리와 만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실 수 밖에 없었던 것이야. 그것도 우리가 익숙한 ‘얼굴’을 가진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지.

그 중립적인 장의 역할을 하는 ‘환경’은 본질에 변함이 없어야만 해. 만일 물질이 남이 아닌 내 요구에만 복종하게 되어 있다면, 타인의 자유나 의지는 존재할 수 없게 되지. 그런 세상에서는 우리가 서로의 존재를 서로에게 알릴 수도 없을거야. 왜냐하면 신호를 보낼 수 있는 물질이 모두 그의 지배 아래 있는 탓에, 우리가 그 물질을 조종할 수가 없거든.

그러나 물질이 변함없는 성질을 가지고 있고 일관된 자연법칙을 따르고 있다면, 물질의 모든 상태가 어느 한 존재에게만 유리하게 작용하는 일은 일어날 수 없어. 그렇다면, 고통이라는 악을 살펴보자. 고통은 무조건 악한 것일까? 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 고통이라는 악은 타자와의 관계의 질서가 깨졌을 경우,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으로서 일정 수준을 넘기지 않는 이상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 속에서는 유익한 것이야. 불을 쬘 때 얼마나 거리를 두어야 하는지 알려주는 고통, 즉 ‘따뜻하다-기분 좋을 만큼 뜨겁다-너무 뜨겁다-화상입을만치 뜨겁다’ 로 이어지는 과정은 당연하며 유익한 것이지. 한편, 병으로 인한 고통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병이 생겼음을 스스로 알 수 있어. 고통이 있기 때문에 또한 사람의 내면은 성숙하기 마련이야. 그리고 운동으로 인한 가벼운 통증 따위는 오히려 유쾌하기까지 해. 연인과 키스할 때 입술이나 혀를 깨무는 행동 따위는 오히려 고통을 만들어 즐기는 수준이지.

피조물들의 잘못된 행동 하나하나마다 매번 신이 개입해서 바로잡아 주는 세상을 상상해보자. 각목을 무기로 쓰려 집어든 순간 풀잎처럼 부드러워지고, 거짓말이나 욕을 담은 음파를 공기에 실으려는 순간 성대가 그것을 거부하는 세상 말이야. 그러나 잘못이라는 것을 저지를 수 없는 그런 세상에서 의지를 자유롭게 행사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빈말이 될거야. 아니, 더 나아가 물질이 거부할 것이기 때문에 악한 생각 자체가 불가능해질 거야. 우리를 너무 잘 알고 있을 신은 말이야. 우리 삶에 너무 과하게 끼어들지 않을 거야.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자연의 법칙을 이해하고 이용하는 것이 불가능해질 정도로 우리 삶에 간섭하지 않을거야. 자연질서는 어떻게 보면 필요악이야. 우리 삶을 가능케 해 주는 유일한 조건인 동시에 그 삶을 제한하는 한계이기도 하지.

전능한 신은 자신의 존재를 지울 수 없어. 다시금 존재하지 못하도록 지워버리고 다시 존재할 수도 있게 한다는 것은 자기 모순이지. 내재적으로 모순되는 것, 자신의 성품에 어긋나는 것을 하지 못할(동시에 않을) 그 전능한 신은 영원히 살아있고, 또한 선해야만 할거야. 우리의 기억에 그렇게 각인되어 있거든. 완전한 선이 이루는 행동은 아름답고 의미가 있어. 냉엄한 자연법칙의 현실 속에서 우리는 ‘사랑’을 찾아냈잖아? 막상 우리 주변에 말로 다 못할 고통과 고난이 있음을 목도하지만, 신은 선하다고 마음 한 구석 믿어보기로 하자. 그렇지도 않다면, 아픔과 고통 속의 저들을 구원할 마지막 하나의 희망마저 포기하는 것이 되지 않겠니? ‘소망’이란 현재에 연결된다는 점에서 영원과 닮았어. 빛과 힘을 주거든. 기독교의 신이 주는 소망에 대해서는 나중에 꼭 다루도록 할게.

다음 편지에 보자. 이만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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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epsky3에 대하여

Stanford Grad Stud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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