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번째 편지: 전개 1 – 기적은 일어난다

전개 하나, 기적은 일어난다.

지난 번 편지에서 우리의 성품을 거슬러 따라 올라갈 때 만나는 선한 신에 대한 이야기를 했어. 우리로 하여금 누미노제의 경외감과 선악의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신. 두렵고, 정의로운 신 말이야. 그 신은 아름답고, 기쁘고, 좋은 분일 거라는 이야기도 했어. 왜냐하면 우리가 그런 신을 바라기 때문이야. 우리 인간의 성품 스스로가 나침반이 되어 우리가 기대하는 무엇을 가리키고 있지. 만일 우리가 적자생존의 진화를 거쳐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존재들이라면, 슬프다던지, 아름다운 것과 정의로운 것을 추구한다던지 하는 도통 생존에 도움되지 않는 감정과 성품들을 잔뜩 갖고 태어났을 이유가 없어. 게다가 대부분의 시간 동안 그런 성품이 갈구하는 행복한 열매들을 움켜쥐지 못하는 결핍된 인생으로 점철되었을리도 없고 말이야.

난 그 선한 신이 자연에 일으키는 불협화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 기적 말이야. 어딘가 모르게 우리 삶을 더 생동감있게, 그러나 두렵게도 만드는 기적. 기적이 가능하다는 것은 곧 초자연을 배제하지 않는 역사적 탐구가 가능하다는 말이야. 이것은 기독교에서는 필수적인 전제야. 기독교가 성장한 역사 뒤에는 수많은 기적들이 뒤섞여 있거든. 아니, 기독교는 기적의 종교야. 기적이 불가능하다고 미리 단정해버리면, 예수의 부활을 증거한 신약성경은 모두 거짓말이 되어버리지.

이 편지에서 신이 왜 기적을 일으키는가에 대한 물음에는 답을 하지 않을거야. (ㄱ) 다만 기적이 자연현상과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 다시 말해, 귀납적으로 증명된 자연법칙이 틀렸다는 것을 보여주는 반례가 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기적이 또한 신의 본질이나 성품을 위배하는 무엇이 아니라는 것에 대한 논증을 하고 싶어.

자, 난 지금까지의 편지글에서 자연이 이성이라는 영역을 통해 초자연적인 무엇으로부터 침범당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어. 그래서 우리 인간이 갖는 두뇌는 두뇌 이상의 무엇이 될 수 있다고 했지. 그런데 말야. 초자연적인 존재, 즉 신이 굳이 이성을 통하지 않고 자연을 직접 건드릴 수는 없을까? 신이 자연의 특정한 시공간을 살짝 꼬집어 비틀 수는 없는 것일까? 그 경우, 자연은 움츠려진 용수철마냥 다시 튀어늘어나며 그 변화에 적응하며 자연스럽게 회복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신은 잔잔한 호수의 수면 위로 조약돌을 던질 수는 없는 것일까? 한번 우리가 호수에 던진 조약돌을 상상해보자. 호수의 바깥에서 날아온 그 조약돌의 운동량과 부력에 의해 호수는 물결을 일으키며 파르르 떨지만, 이내 잠잠해지지. 만일 조약돌을 만들어 내어 호수 위에 던진 것이 신이라고 생각해보자. 그렇다면 호수를 지배하는 자연법칙은 신의 간섭에 놀랍도록 금세 적응하여 원인에 따른 결과를 만들어내지. 만일 시간이 정지했다고 치자. 그래서 파르르 떨고 있는 물결이 잠시 멈추었다고 상상해보자구. 자연법칙이 깨졌을까? 아니, 그렇지 않아. 자연법칙 역시 시간의 멈춤과 함께 작용이 멈추었을 뿐이야. 엔트로피의 불가역적 방향으로 흐르는 시간. 시간이 멈추고, 물체의 움직임도 멈추고 자연법칙도 멈추었어. 다시 시간이 흐르자 물결이 출렁이고 자연법칙도 작용해. 물결 모양도 자연스럽고 자연법칙에 어긋난 건 아무것도 없게 되었어. 시간이 정지하는 동안은 자연법칙도 정지하고, 시간이 흐르며 자연법칙도 다시 작용하지. 시공간의 얼어버림에 자연 역시 얼어버리며, 족쇄가 풀리는 즉시 자연은 놀랍게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우주에서 운석이 날아와 지구에 떨어졌어. 지금은 누구도 이것을 기적이라 하지 않아. 신의 강림 따위로 생각하지 않는다구. 외부에서 날아온 운석의 간섭에 지구는 놀랍도록 자연스럽게 적응해. 운석이 주는 충격을 운동량의 법칙에 따라 땅이 흡수하지. 자연법칙은 바뀐 게 없어. 지구계 내에서 에너지-질량 보존의 법칙에 어긋났다구? 아니야, 우주 전체로 보면 질량보존의 법칙은 성립했어. 그렇다면 여기서 초자연주의를 기억해보자. 이미 우리는 자연이 실재의 전부라고 믿는 자연주의의 난점을 파헤쳤잖아. 그래서 자연 외의 또다른 자연, 아니 초자연마저 존재할 수 있다는 풍성한 초자연주의 철학을 견지하기로 했잖아. 그렇기 때문에 초자연적인 무엇이 우리의 시공간과 접해서 정자 하나를 어느 이스라엘 여인의 자궁 속에 하나 삽입한 것이 어찌 자연법칙을 어기는 일일까? 자연은 그 정자를 받아들여서 예수라 이름 지어진 아기를 우리 인류에게 선사해 주었지. 자연은 그 스스로의 규칙에 어긋나지 않도록 수정란을 가꾸고, 태를 열어 한 아기의 출산까지 인도해 주었지. 기적은 이렇게 가능할 수 있어.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이란 반복적인 자연법칙에 반하는 것이 아니냐구? 기적의 정의를 다시 한번 살펴보자. 기적은 특성상 하나의 예외적 사건이야. 우리가 기적을 말할 때는, 다시 반복될 수 있는 무엇을 말하는 게 아니라구. 다시 반복될 수 없는 일시적인 일이기 때문에 기적이라고 부르는 것이야. 자연 법칙에 대한 예외적 사건이 아니라면 우리가 어떻게 기적을 놀라운 사건이라고 부를 수 있겠어? 자연법칙은 반복적인 경험으로 증명된 모델이야. 반복적인 경험이 갖춰져야지만 과학은 성립한다구. 만일 모든 조건이 똑같은데 반복적으로 이루어지기만 했던 경험 외의 무엇이 일어났다면, 그 과학은 깨지게 되지. 이것이 과학의 취약점이야. 수천년간 똑같이 수행되어 왔던 것이 당장 내일 단 한번이라도 똑같이 수행되지 않는다면, 그 법칙은 무로 돌아가게 되지. 그런데 기적은 그 과학을 굳이 깨지도 않아. 아예 초자연적인 무엇에서 개입하기 때문에, 같은 조건의 경험이 아니게 되지. 단지, 이전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경험일 뿐. 예외적인 것. 그리고 흔하지 않은 것. 그래서 신기한 것. 그것이 기적이야.

요컨대 기적은 역시 신의 존재와 같은 초자연적 현상이야. 자연법칙을 깨뜨리거나 하는 것이 아닌 자연법칙 이외의 영역이야. 우리 과학자들이 수차례 같은 조건에서 실험과 이성적 추론을 통해 만든 것이 자연법칙이라면, 기적은 다른 조건에서 만들어진 실험결과라 할 수 있지. 초자연이 끼어드는 바람에 전혀 다른 실험 조건이 되어버렸다구. 기적은 자연법칙과 양립 가능해. 신이 존재한다면, 자연은 결코 기적에서 안전한 곳이 될 수 없어.

그렇다면 신은 왜 굳이 자연에 기적을 일으키려 하는걸까? 대위법으로 완성된 아름다운 화음같은 자연에 왜 굳이 불협화음을 일으키려 하는지… 글쎄, 신은 대위법 그 이상의 자연을 원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창의와 조화가 잘 버무려진, 완성될 때까지 끊임없는 진화와 발전을 거듭하는 그런 자연 말이야. 우리에게 불협화음을 허락했듯이 신 또한 그를 사용해서 다양한 색채를 자연에 입히고 있는 거라고 말이야. 그의 천부적인 재능으로 불협화음을 일반화음 사이사이에 섞어넣는 거라고 말이야. 시구에 변칙적인 운율을 섞어넣듯이 말이야.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신이 자기 마음대로 자연에 간섭한다는 뜻은 아니야. 절대선인 그는 태초에 계획해 놓은 악보대로 자신이 원하는 그 목적에 맞추어 최고의 음악을 연주하는 중일거야. 철저히 계획해 놓은 그대로 말이지. 역사의 중요한 시점에 다양한 기법으로 자신의 창조를 아름답게 이루어 가면서 말이야.

ㄱ. 이 대목이 궁금하다면, Lewis의 ‘기적’이라는 책의 12장 이후를 읽어봐. 인간의 복합체적 성질, 하강과 재상승 유형, 선택, 대리 등의 모델을 사용해 신이 기적을 활용하는 저자 나름의 이유를 적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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