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번째 편지: 전개 2 – 예수는 부활했다 (4/4)

4. 예수는 부활했는가?

예수는 죽은 뒤에 무덤에 장사되었어.  그 날은 안식일 전날이었지. 날이 저물자 산헤드린 공회원이자 남몰래 예수의 제자이기도 했던 아리마대 요셉이란 사람이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요청했어. 빌라도는 백부장에게 예수가 죽었는지를 확인받은 뒤에 요셉에게 시체를 내주었지. 요셉은 세마포를 사서 예수의 몸을 묶어 내리고, 니고데모가 가져온 몰약과 알로에를 시체에 바른 뒤, 세마포로 예수의 몸을 싸서 무덤에 집어 넣었어. 무덤은 그가 자신을 위해 준비했던 곳이었어. 부자였던 그는 자신의 집 근처 동산에 있는 새 무덤에 예수의 시체를 안치했지.

그가 무덤에 안치된 후에 그를 모함해 잡아죽였던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빌라도와 함께 한자리에 모였어. 예수가 살아생전에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고 공언하던 것을 기억하고, 그의 무덤에 파숫꾼을 세워 무덤을 지키자고 결정해. 왜냐하면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훔쳐간 뒤 사람들에게 예수는 부활했다고 퍼뜨리고 다닐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야. 그래서 그들은 경비병을 데려가 무덤입구를 돌로 막은 뒤 굳게 지켰지.

안식일이 지났어. 다음 날 새벽에 예수를 사랑했던 여인들이 향품을 들고 무덤을 찾아왔어. 예수의 시체에 발라주려고 말이지. 그런데 그들은 무덤의 큰 돌이 굴려져 있고, 시체가 사라진 것을 발견해. 마태복음에는 이렇게 기록되어있어. 큰 지진이 나며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그 형상이 번개같고 그 옷은 눈같이 희다고 기록되어있어. 파숫꾼들은 천사를 무서워해 떨며 납작하게 엎드렸대. 그리고 천사는 여인들에게 예수가 부활했다고 이야기하며 갈릴리로 가라고 말하지. 두려움과 무서움, 동시에 기쁨에 휩싸인 그녀들은 동산을 내려가는 길에 예수를 만나지. 그리고 그들은 다른 제자들에게 이 소식을 전해.

자, 이것이 복음서가 전하는 예수의 죽음 후 사흘 간 벌어진 일의 모습이야. 그 후에는 예수가 여인들과 제자들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 앞에 자신의 부활한 모습을 나타내는 이야기를 전하지.

예수가 부활했다는 것은 우리 눈으로 확인할 수 없어. 왜냐하면 예수는 더이상 우리와 함께 지구상에 거하지 않거든. 성경에 따르면, 그는 승천했어. 성령이 각 사람에게 임할 것이기 때문에 자신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유익하다고 설명하면서 말이야. 그의 부활을 확인하는 방법은 역사적 기록을 살펴볼 수 밖에 없어. 다행히 기독교는 예수가 부활했다는 확신을 바탕으로 시작되었고, 그래서 그의 부활에 대한 수많은 사람들의 목격과 증언이 있어. 그 중에 예수의 죽음 이후 곧바로 기록된 문건들부터 살펴보자.

성경에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서신, 고린도전서가 있어. 아무도 바울이 고린도전서의 저자라는데 이의를 제기하지 않지. 그런데 그 고린도전서에 바울 자신이 부활한 예수를 만났다는 내용이 두 군데나 나와.

내가 사도가 아닙니까? 내가 우리 주 예수를 뵙지 못하였습니까? (9장 1절, 표준새번역)

내가 전해 받은 중요한 것을, 여러분에게 전해 드렸습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과, 무덤에 묻히셨다는 것과, 성경대로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나셨다는 것과, 게바에게 나타나시고 다음에 열두 제자에게 나타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리스도께서는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자매들에게 나타나셨는데, 그 가운데 더러는 세상을 떠났지만, 대다수는 지금도 살아 있습니다. 그 다음에 야고보에게 나타나시고, 그 다음에 모든 사도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맨 나중에 달이 차지 못하여 태어난 자와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15장 3~8절, 표준새번역)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예수가 죽었다는 것, 장사되어 무덤에 묻혔다는 것, 성경대로 사흘 후에 부활했다는 것과 그가 베드로와 자신을 비롯한 수백명의 사람에게 나타났다고 증언했어. 특별히 이 기록이 예수 부활의 강력한 증거가 될 수 있는 이유는, 이 편지가 왜곡되기에는 너무도 이른 시기에 기록되었다는 것이야. 전설이나 신화로 발전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기간 내에 기록된 글이지. 그리고 바울이라는 저자에 대한 신뢰도 한몫해. 유대 최고 랍비의 수제자였고, 그가 쓴 글 대부분이 신약성경으로 채택될 정도로 뛰어난 신학자요 그리스도인이었으니까.

위의 편지글 중 두번째 인용한 것은 특별해. 그것은 초대 교회 사람들에게 외워져 전승해 내려오는 신경(creed)이기 때문이야. 신경이란 종교적인 신조 혹은 믿음을 표현한 경문을 말해. 교리의 핵심을 담은 구문으로서 종교를 공유하는 이들 사이에 거듭하여 외워지는 것이지. 이 신경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은 지 불과 몇 년 안에 만들어져 사람들에게 전승되었다고 여겨져. 고린도전서 15장 3-8절이 신경으로 믿어지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대표적인 이유는, 사용된 언어와 형식이 매우 이른 시기의 문건이란 것을 드러내고, 쓰인 문체나 용어가 바울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야. 게다가 바울이 이 신경을 전해받았고, 또 고린도교인들에게 전해주었다고 3절에 직접 기록하고 있지. 이 신경은 예수의 죽음, 장사, 부활과 나타남을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어. 그런데 이 신경은 늦어도 A.D. 51년에 기록된 것으로 판단되며, 적잖은 학자들은 이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기록되었다고 생각해. 부활 사건 후 2년에서 8년 혹은 A.D. 32년에서 38년경에 바울이 다메섹이나 예루살렘 중 한 군데서 이 신경을 받았다고 보고 있어(13). 따라서 이것은 놀라울 정도로 이른 시기에 기록된 자료이며, 초창기 기독교의 순수한 증언이야. 특히나 예수의 삶과 죽음 모두를 목격한 사람들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기간에 기록된 증언인 만큼 신뢰도는 더 높지. 예수의 부활이 거짓이라면, 동시대의 사람들이 거짓된 신경을 그냥 놔둘리가 없거든. 그것을 믿고 헌신할 리는 더욱 만무하지.

예수의 출현에 대해서는 복음서에도 기록이 매우 많아.

  • 무덤있는 동산에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남 (요한복음 20장 10~18절)
  • 길가에서 여인들에게 나타남 (마태복음 28장 8~10절)
  • 시몬 베드로에게 나타남 (누가복음 24장 34절)
  • 엠마오 도상에서 글로바를 포함한 두 제자에게 나타남 (누가복음 24장 13~32절)
  • 열한 제자를 포함한 여러 사람들에게 나타남 (누가복음 24장 33~49절)
  • 도마를 제외한 열 사도와 여러 사람들 앞에 나타남 (요한복음 20장 19~23절)
  • 도마와 다른 사도들에게 나타남 (요한복음 20장 26~30절)
  • 디베랴 호숫가에서 일곱 제자들에게 나타남 (요한복음 21장 1~23절)
  • 제자들에게 나타남 (마태복음 28장 16~20절)
  • 승천하기 전에 감람산에서 사도들과 함께 함 (누가복음 24장 50~52절, 사도행전 1장 4~9절)

예수는 이렇듯 수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나 부활했음을 보여주었어. 사람들은 그와 함께 생선과 빵을 나눠먹기도 하고 대화를 나누었고 그의 몸을 만지기도 했어. 예수는 특히 그의 부활로 말미암아 새롭게 조명된 구약성경을 잘 해석해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었지. 제자들은 비로소 그들의 율법책에 나타난 메시아의 모든 이야기가 예수에 의해 완성된다는 것을 깨달았어.

예수가 부활 후에 나타났다는 증거는 시간이 흐르며 변질되고 왜곡된 기록이 아니야. 예수의 부활은 매우 초기부터 교회의 중심적 선포내용이었어. 바울은 그의 서신서에서 목격자들을 만나 그들의 증언을 직접 들으라고 까지 했지. 사도행전에는 예수의 부활에 대한 매우 초기의 확증들이 곳곳에 기록되어 있고, 복음서에는 예수를 직접 만난 사람들이 세세히 묘사되어 있어. 영국의 신학자 마이클 그린은 “예수의 출현은 고대의 어떤 사건보다도 잘 증명된다. …예수가 부활 후 다시 나타났다는 사실을 의심할 어떤 합리적 이유도 있을 수 없다”라고 결론지었어(14).

예수가 부활했음을 웅변해주는 그의 죽음 후 사건들을 살펴보자. A→B→C의 일련의 사건에서 C를 살펴보자구. A는 예수의 죽음이었어. 대체 무슨 일들이 일어났기에 우리는 B가 다름 아닌 예수의 부활이라고 주장하는걸까?

첫째, 제자들의 삶이 변화되었고, 그들이 죽기까지 예수의 부활을 증거했어. 예수가 체포되어 십자가에 못박히자 그의 제자들은 낙담했고 절망에 빠졌어. 그들은 예수가 메시아라고 굳게 믿은 이들이었어. 자신들이 모시는 스승이 곧 수천 년간 이어져 내려온 유대 예언이 가리키는 그 메시아라고 믿었어. 로마의 압제에서 동족을 구원하고 성전을 재건하여 옛 이스라엘의 영광을 재현할 영웅이라고 확신했지. 수많은 백성들도 예수를 환영했어. 예루살렘 입성을 앞둔 전날 밤, 그들은 예수가 왕이 될 때 굵직한 벼슬들을 한 자리씩 차지하리라는 달콤한 꿈도 꾸었어. 그러나 왠걸. 예수는 그들이 기대했던 메시아의 과업을 완수하기는 커녕 너무도 비참하게 최후를 맞이했어. 그뿐이 아니야. 그는 나무로 만들어진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어. 유대인들은 나무에 달려 죽은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라고 믿었어(신명기 22장 22~3절). 그들의 사랑하는 스승은 빛바랜 영광이라도 회복하기는 커녕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은 죄인이 되어 버린 것이었어. 절망한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졌어. 예수 운동은 중지되고 말았지.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다시 뭉쳤어. 그리고 예수의 부활에 대해 전하기 시작했지. 그들의 남은 생애를 모두 이 일에 헌신했어. 도무지 그들에게 금전적 이익이 있지도 않은 일인데 말이야. 그들은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았어. 자주 굶었고, 조롱당했고, 협박을 당했고, 맞았고, 감옥에 갇히기도 했어. 그러나 그들은 예수의 부활을 전파하는 일을 중단하지 않았어. 결국엔 대다수의 제자들이 십자가형을 비롯한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처형당했지. 이들이 무슨 사적인 보상과 이익을 노리고 이렇게 살았을까? 아니, 그렇지 않아. 역사적 기록은 강한 신념에 바탕을 둔 이들의 헌신적 삶을 증거하고 있어. 그렇다면 무엇 때문이었을까?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헌신적인 삶을 살게 하였을까? 그것은 그들이 직접 경험한 것 때문일거야.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것을 보고 느낀 것이지. 예루살렘에서 예수의 부활을 이야기하다가 대제사장들에게 잡힌 뒤,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하지 말라는 협박을 받은 베드로와 요한이 한 얘기를 들어보자.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 4장 20절, 표준새번역)

그들이 예수의 부활을 믿은 것은 현대인인 우리가 예수의 부활을 믿는 것과는 달라. 현대 기독교인이 믿는 것은 전해 들은 것이야.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이야기를 믿는 것이지. 내가 예수의 부활을 믿을 때는, 예수의 부활이 사실이라는 것을 그저 ‘믿을’ 뿐이야. 내 눈과 내 촉감으로 확인한 게 아니거든. 따라서 예수의 부활이 설령 거짓이었더라도 확실한 반증이 있을 수 없는 지금, 난 광신적인 믿음도 유지할 수 있어. 귀를 막고, 예수는 부활했어!하고 스스로에게 외치며 믿음을 고수할 수 있지. 그러나 예수의 제자들의 믿음은 달라. 그들은 예수의 죽음을 목격했고, 마찬가지로 예수의 부활을 확인할 수 있는 시대에 살았어. 한두 명도 아닌 여러 사람이 동시에 자신의 삶을 걸고 오감으로 진의 여부를 가릴 수 있는 특정한 사실에 헌신한다는 것. 그것은 곧 그 특정한 사실이 그들 눈 앞에서 일어났음을 뜻해. 게다가 실의에 빠진 채 자신들의 생업으로 돌아가 힘없이 살던 이들이 갑자기 열정적으로 돌변한 것은 무언가 특이한 일이 그들의 삶에 일어났음을 암시하지. 바로 예수의 부활 말이야.

둘째, 기독교 신앙에 회의적인 이들이 예수의 죽음 이후 완전히 바뀌어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어. 예수가 죽기 전에는 그를 믿지 않던 회의론자, 그의 주장을 부정하던 적대론자들이 있었어. 그러나 예수의 죽음 후에는 완전히 바뀌어서 열렬한 기독교 신자가 되었지. 여기에 대해서는 그들이 부활한 예수를 직접 만났다고 밖에는 설명할 수가 없어. 예수의 가족들부터 살펴보자.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의 동생인 야고보를 비롯한 가족들이 예수를 믿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에 맞섰다고 나와. 밖에서 활동 중인 그를 집 안에 붙잡아 두려고도 했지. 고대 유대교에서 랍비가 가족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것은 적잖이 난처한 일이었어. 따라서 복음서 저자가 예수에게 누가 되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가족의 믿지 않음을 허위로 기록할 리는 없어.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의 동생인 야고보는 예수의 죽음 뒤에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고 예수에 대한 신앙 때문에 돌에 맞아 죽게 돼. 왜 야고보의 삶이 변했을까? 바울은 부활한 예수가 그에게 나타났다고 설명해줘. 글쎄, 그것말고 야고보의 변화된 삶을 설명할 수 있을까?

예수를 믿은 뒤에 이름이 바울로 바뀐 사울을 살펴보자. 그는 바리새인이었기 때문에 유대인의 전통을 깨뜨리는 것이라면 모두 증오했어. 유대전통을 무시할 뿐더러 전혀 메시아같지 않은 인물을 주로 모시는 기독교는 매우 이단취급했지. 기독교인을 체포하고 학대하는 데 앞장섰던 인물이었어. 그런데 그는 예수의 죽음이 있은 뒤 얼마 뒤에 180도 달라진 사람이 되었어. 예수교를 학대하기는 커녕 본인이 기독교 신앙의 변호자가 되어 세계를 돌아다니며 기독교를 전파하고 교회를 세우는 사도가 되었지. 무엇이 그를 변화시켰을까? 그는 자신이 직접 쓴 갈라디아서에 회심의 배경을 설명해. 그는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보았고 예수가 자신을 택했다는 음성을 직접 들었다고 말해.

셋째, 적잖은 유대인들이 예수의 죽음 이후, 자신의 신념처럼 고수해 온 전통과 사회규범을 바꾸었어. 사람이 자신이 가장 소중하다고 여기는 신념을 바꾸기란 쉽지 않아. 특히 그 신념이 결부된 전통과 관습을 바꾼다는 것은 더더욱 어렵지. 카톨릭이 조선에 유입되었을 때, 조상을 무시하고 제사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크게 박해를 받았어. 새로운 지식과 관념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현대와 달리, 고대에는 전통이 크게 존중을 받았어. 그 전통을 굳게 지킴으로서 민족의 정체성을 보존하려고 했던 유대인의 경우에, 전통의 중요성이란 더할 나위가 없이 컸지. 이웃나라의 침략으로 말미암아 뿔뿔이 흩어져 수백 년이 넘도록 포로생활을 지속해 온 유대인이 한 민족으로 남아있을 수 있던 건 그들의 전통에 대한 강한 신념과 집착 덕분이었어. 곳곳에 유대 회당을 짓고 안식일마다 모여서 그들의 전통과 율법을 기념했지. 게다가 신으로부터 받았던 율법이요, 의식이요, 제도라 믿었기 때문에 그들은 이를 버릴 수 없었어. 그것을 버리면 저주를 받아 죽은 후 지옥에 가게 될 거라고 믿었거든. 그런데 이 유대인들이 그들의 전통을 갑자기 바꾸었어.

하나, 동물 희생 제사를 드리지 않게 됐어. 그들은 아브라함과 모세 시대 이후로 죄를 용서받기 위해 매년마다 동물 희생 제사를 드려왔어. 그러면 그들의 죄가 동물에게 전가되기 때문에, 제사를 드린 이는 하나님께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회복하게 된다는 거야. 그런데 나사렛 출신의 한 목수가 죽고 나서 그를 따르는 유대인들은 더 이상 희생 제사를 드리지 않게 됐어.

둘, 모세의 율법을 절대시하지 않게 되었어. 유대인들은 시내산에서 돌판에 새겨진 십계명을 비롯해 모세를 통해 받은 하나님의 계명을 절대적으로 중시했어. 유대교에게 있어서 모세의 계명이란 유대교를 이방인들과 이방종교들로부터 구분짓는 절대적 강령이었지. 그런데 예수의 죽음 이후 그를 따르던 유대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자신들의 공동체 일원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어.

셋, 안식일을 지키지 않기 시작했어. 유대인들은 매주 토요일이 되면 종교적 행위 외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음으로서 안식일을 철저히 지켰어. 그런데 예수의 죽음 이후, 그를 따르는 이들이 1500년 간이나 이어져 내려온 전통을 바꾸었어. 그리스도인들은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어. 왜냐하면 예수가 부활한 날이 일요일이었거든.

넷, 유일신론을 버리고 삼위일체론을 주장하기 시작했어. 유대인들은 그야말로 단 한 분이신 하나님을 믿었어. 그런데 예수의 죽음 이후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고 성령이 하나라고 주장했어. 이것은 그들이 믿던 것과 근본적으로 다른 거야. 하나님인 동시에 그가 사람일 수 있다는 것은 그들에게는 생소할 뿐더러 매우 이단적인 생각이지. 대제사장 가야바가 예수를 신성모독죄로 기소했던 이유는 예수 스스로 자신의 신성을 이야기했기 때문이었어. 사람이란 것이 눈에 빤히 보이는 데 자신이 감히 신이라니! 용납할 수 없는 발언이었어.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지. 그러나 예수를 따르던 유대인들은 기독교가 시작된 지 채 10년이 지나기도 전에 예수를 하나님으로 경배하기 시작했어.

다섯, 유대인들이 수천 년간 믿어왔던 메시아관을 버리고 새로운 종류의 메시아를 주장하기 시작했어.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신에 의해 선출된 선지자 혹은 왕에 의해 인도되던 민족이었어. 그들의 선지자는 군대를 이끌어 적을 쳐부수었어. 고통받는 동족을 구출하고 나라를 재건했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성전을 지었어. 그들의 역사는 이의 반복이었어. 침략받고 고통받을 때, 회개하고 구원을 부르짖는 그들을 위해, 하나님이 선지자나 왕을 보내어 적을 부수고 그들을 구원해내었지. 성전이 재건되고 율법을 지키는 전통이 회복되었어. 유대인들은 당연히 오실 메시아도 같은 임무를 수행해 줄 것으로 기대했어. 로마 군대를 쳐부수고, 이스라엘의 영광을 회복해주는 왕 같은 메시아,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메시아를 기대했지. 그런데 그런 메시아와는 거리가 멀었던 예수의 허무한 죽음 뒤에, 그를 따르던 유대인들은 새로운 메시아를 말하기 시작했어. 온 세상의 죄를 인하여 고통 받고 죽은 메시아를 말하기 시작했지.

한두 명도 아닌, 최소한 만 명이 넘는 유대인 공동체가 수 세기동안 자신들을 지탱해 오던 다섯 가지 핵심 제도를 포기했어(15). 그것도 예수의 죽음 후 5주가 채 지나지 않아서 말이야.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어떤 B가 A에서 출발해 C까지 이어지는 과정을 이성적으로 설명해줄 수 있을까? 답은 간단해. 그 이유는 그 유대인들이 부활한 예수를 만났기 때문이야.

넷째, 기독교가 시작되면서 새로운 의식과 관습이 생겨났어. 바로 성찬과 세례야. 성찬은 성도들이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먹는 의식으로서 바로 예수의 죽음을 기념해.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주며 자신의 살이요 피라고 묘사했지. 그는 자신의 살을 먹고 자신의 피를 마시는 자라야 영생을 얻었고 마지막 날에 부활한다고 이야기했어.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죽음이 큰 과업을 성취하기 위한 불가피한 일이요 영광스런 일이라고 여겼어. 그래서 그들은 예수의 죽음을 기억하는 의식을 시작했어. 빵과 포도주를 먹으며 예수의 희생을 기념하는 것이지. 종교의 창시자인 예수의 탄생이나 부활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의 죽음을 기념하는 희한한 의식이 생겨났어.

세례는 어떨까? 세례는 기독교 신자가 되었음을 고백하는 성도가 물 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의식이야. 물 속에 들어가는 것은 예수의 죽음을 기념하고, 물 밖으로 나오는 것은 예수의 부활을 기념하는 뜻을 담고 있어. 세례의식은 원래 유대 전통에서 비롯된 거야. 이방인들이 모세의 율법을 따르고자 했을 때,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의 권위로 이방인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어.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의 권위가 아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지.

이 두가지 예식은 예수의 부활이 없었다면 탄생하기 힘든 것들이야. 성찬은 예수의 거룩한 죽음을 기념하는 것으로서 그의 부활이 없었다면 생겨날 수 없는 의식이지. 예수를 하나님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만 받는 의식인 세례 역시 죽음과 부활의 모티브를 담고 있다는 면에서 예수의 부활 없이 발생원인을 설명하기 어렵지. 게다가 두 예식 모두 기독교가 가진 독특한 것으로서 신비종교나 다른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기 힘들어. 그때까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신을 믿는 신비종교가 없었을 뿐더러, 두 예식이 거행되었던 것이 너무 이른 시기라 다른 종교나 문화의 영향을 받았기가 힘들거든(16).

다섯째, 예수의 죽음 이후 교회가 출현했어. 교회는 예수의 죽음 이후 급작스럽게 생겨나 크게 번성하기 시작했고, 채 20년이 지나지 않아 로마 황실에까지 들어갔어. 나중에는 수많은 경쟁 사상들을 물리치고 로마의 국교가 되기까지 이르렀지. 그래, 종교가 창시되어 빠른 속도로 성장할 수 있어. 그러나 예수의 죽음 이후 갑작스런 기독교의 출현과 공동체의 급속한 번성은 타당한 역사적 이유가 있기 마련이야. 앞의 네 가지 사건들과 더불어 교회의 출현은 예수의 부활로 인해 가장 잘 설명되지. 다른 어떤 설명보다도 역사적 개연성이 압도적으로 높다는 말이야.

예수는 두말할 나위없이 실존한 인물이었어. 그리고 그의 전기에 대해 기록한 성경은 어느 고대 기록보다도 사본도 많고, 정확한 목격담을 담은 글이야. 매우 초기에 기록된 것으로서 전설이나 신화로 변질될 가능성도 없는 것이지. 예수는 죽고, 무덤에 장사되었고, 사람들 앞에 나타났어. 그의 죽음 이후 사람들에게 큰 변화가 일어났어. 절망한 제자들이 갑자기 강한 신념에 목숨을 바쳐 헌신하기 시작했어. 회의론자들이 기독교 신자가 되었어. 유대인들이 굳게 지키던 전통과 율법을 포기하고 새로운 의식과 교리에 충실하기 시작했어. 교회가 만들어졌고, 수많은 이들이 예수의 부활을 목격했음을 증거하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기 시작했어. 예수의 죽음 뒤에 갑작스레 발생한 이 모든 역사적 사건들은 하나의 사건을 가리켜. 바로 예수의 부활 말이야. 기적을 배제하지 않고, 역사적 탐구를 수행할 때 확신을 가지고 결론을 내릴 수 있어. 예수란 사람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말이야.

(13) 예수는 역사다, 리 스트로벨 지음, 304쪽

(14) 예수는 역사다, 리 스트로벨 지음, 349쪽

(15) 예수는 역사다, 리 스트로벨 지음, 333쪽

(16) 예수는 역사다, 리 스트로벨 지음, 3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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