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받는 인간 – 손봉호

제 1장 논의를 시작하면서

(3) 고통의 경험은 그 자체 내에 이미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기를 바라는 욕구가 포함되어 있다. 그것이 고통의 본성 가운데 하나요, 고통이 주어진 목적 가운데 하나다. (목적을 지향하게끔 하는 동기라고 봐야할 듯하다) 그런 점에서 고통은 기쁨, 사랑, 그리움, 슬픔 등 우리가 경험하는 다른 느낌과 다르고 배고픔, 목마름, 가려움과 비슷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

(6) 사유실험에 관한 이야기, 현상학적인 방법 적용 (담장에 피어있는 장미꽃을 보면서 동시에 빨간 색을 인시하는 본질직관의 방법) – “만약 사람에게 고통의 경험이 없었다면 어떻게 될까?”

(12) 선천성 무통증 환자(congenital insensitivity to pain)와 환상지통(phantom-limb pain) 환자의 특별함. 전자는 통증을 느낄 수 있는 모든 신경조직이 갖추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통증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경우고, 후자는 팔이나 다리를 절단당한 사람들의 약 35%에게 일어나는 것으로 잘라내어져 없어진 부분에 고통을 느끼는 경우다. 그 외에도 척추하부 통증에 시달리는 환자의 75%에 있어서는 어떤 신체적 결함도 발견하지 못한다는 연구발표가 있었다.

(16) 즉 학문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들은 그렇게 심각한 것들이 아니거나 아예 진정한 존재가 아니라고 취급해 버리는 것이다. 현상학자 후설은 서양에서 갈릴레오로 시작된 과학주의가 그런 오류에 빠졌다고 지적한다. 즉 자연과학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세계는 진정한 세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고통을 느끼게 하는 선험적 실체가 있다고 해 봅시다.

무섭다. 두렵다. 으스스하다. 어떤 이들에게는 전혀 무섭지 않으며 두렵지 않습니다. 죽음. 시체. 귀신.

제 3장 ‘아픔’, ‘괴로움’, ‘고통’

1. 정확한 정의를 거부하는 고통

국제고통학회가 정의한 고통은, “조직의 실체적 혹은 가능한 파손과 관계하여 겪는 불쾌한 감각적 그리고 정서적 경험, 혹은 그러한 파손이란 표현을 사용하여 서술되는 불쾌한 감각적, 정서적 경험”

고통을 표현하는 언어는 ‘작용자의 언어(language of agency)’일 수 밖에 없고, 그것은 주로 ‘마치… 것 같은’의 구조를 갖는다고 한다.

동물이 느끼는 고통? – (26) 프레디네에 의하면 가장 하급동물에서는 고통의 감각이 거의 발달되어 있지 않고, 의식과 지능을 갖춘 고등동물에 있어서 비로소 확실하게 등장하며, 행동이 지능적이고 의식작용이 분명한 정도에 따라 고통을 느끼는 정도가 더 강하다고 한다.

사람은 짐승들과 같이 단순히 아파할 뿐 아니라 짐승들과는 달리 ‘괴로워’하도록 결정되어 있다.

아픔을 느끼는 것은 확실성을 갖는 것이다. 고통에 있어서 상대성이란 있을 수 없다. 흔히 사람들은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질 때 그것이 꿈이 아님을 확인하기 위하여 자기 살을 꼬집어 본다. 자신의 몸이 자신의 의식에게 전달해 주는 가장 확실하고, 가짜일 수 없는 정보를 주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지식과 감각을 다 의심할 수 있어도 고통은 의심할 수 없는 현실이다.

꿈을 꾸면서 쾌락에 겨운 나, 고통에 신음하는 나 등을 경험한다. 꿈 깨고 나서 꿈 깨서 다행이다. 아아, 꿈이여 영원하라라는 생각을 한다. 환상인 줄 알면서도 오히려 꿈 속에서 행복과 쾌락이 부여되면, 영원히 꿈 속에 있기를 바라며, 환상임에도 불구하고 꿈 속의 고통이 싫어 다시는 그와 같은 꿈을 꾸지 않기를 바란다.

자신의 존재와 활동에 대한 인식이 있기 전에 고통을 경험하고, 고통을 통하여 자신의 몸과 자신의 존재를 인식한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이전에, 나는 아파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2. 가장 원초적인 고통

원초적이란 말은 근원적이란 뜻이어서, 고통이란 경험을 다른 경험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뜻이다. 물론 고통만이 원초적인 경험은 아니다. 기쁨, 슬픔도 그렇다. 어떤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선악에 대한 개념은 직관적 어쩌면 원초적인 것이라 하겠다 (37). 아리스토텔레스 왈 우리가 나쁜 짓을 하는 것은 쾌락 때문이고, 고상한 행동을 하기 싫어하는 것은 고통 때문이다? 아냐, 고통을 줄이기 위해서 나쁜 짓을 하기도 해.

미국 남북 전쟁 때 외과의사였던 미첼. 불행하게도 고통은 지속될 수 있고 지속되면 더욱 심해질 수 있으나 행복감은 지속되지 않는다. 지속되는 행복은 행복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재미있는 관찰이다. 신으로부터 멀어져 고통을 계속 느끼게끔 되어 있는 우리는, 영속적인 고통을 체험하나 쾌락은 한순간이다. 왜 한순간의 쾌락이라도 허용되었을까? 루이스의 말대로 천국의 맛봄이 조금이나마 허락되었기 때문일까?

3. 부정의 근원으로서의 고통

쾌락은 사람이 능동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지만, 고통은 당하는 것이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고통의 수동성은 우리 감각기관의 수동성보다 훨씬 더 심각한 의미에서 수동적이다. 감각의 수동성에는 환영하는 능동성이 있고 그렇게 함으로 바로 지각이 일어난다. 그러나 고통을 당하는 감수성은 상처에 노출된 약점이 있고 따라서 수용성보다 더 수동적이다. 그것은 경험보다 더 수동적인 시련이다.

고통은 인간의 연약함과 유한성을 죽음보다 더 절실하게 인식시키는 경험이다. 고통은 선천적 주체를 세계내로 끌어 내리며, 창조자가 아니라 피해자로 만든다. 고대 그리스 인들은 “고통을 당하는 자는 영원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한다. (그러나 하나님도 우리 때문에 슬퍼하고 아파하시지 않나? 그도 고통을 당하지 않나?)

고통이 수동적이라지만, 그것은 오히려 우리를 적극적인 행동으로 내몬다. 추워서 집과 가죽옷을 짓고, 배고파 농사와 목축을 했다.

고통은 모든 ‘문제거리’의 근원이다. 직간접적으로 우리에게 고통을 가져다 줄 만한 것은 문제거리고, 직간접으로 우리의 고통을 감소시키거나 제거하는 데 공헌할 수 있는 것은 ‘흥미’롭다. 인간에게 고통이 없다면 도무지 무엇이 ‘문제’가 되겠는가? 아마 인간에게 고통이란 경험이 없었따면 인간은 영원히 사유활동을 시작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고통은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는 가장 근원적인 조건이라 할 수 있다.

고통은 문제거리의 뿌리일 뿐 아니라 모든 부정의 핵이기도 하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긍정적인 것들이 쾌락을 가능하게 하고 부정적인 것들이 고통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을 가져다 주는 모든 것을 우리는 ‘긍정적’이라 부르고, 고통을 가져다 주는

일반적으로 ‘부정적’이라 표현한다 하는 것이 옳다. 즉 ‘쾌락은 긍정적이고 고통은 부정적’이 아니라 쾌락과 고통이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의 표준이 된다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무자유(non-freedom) 혹은 고통을 당하는 것에서 중요한 것은 부정(not)의 구체성이 어떤 논리적인 부정(not)보다 더 부정적인 상처란 이름으로 대두된다는 사실이다. 악의 부정성은 아마도 모든 논리적 부정(not)의 근원이요, 핵일 것이다. 악의 부정(not)은 무의미의 정도에 이를 만큼 부정적이다.” 라고 주장한다. 고통을 통해서 부정이 태어나고 부정을 인식한다는 것이다. 고통이 상처란 경험으로 인간에게 다가오지 않은 한 부정은 단순히 놀이의 규칙처럼 약속에 의한 사고놀이의 규칙에 불과할 것이다.

부정은 신에 의해 정의되나, 인간의 이에 대한 선험적 지식은 신만큼 충분하지 않다. 후천적으로 인간은 이를 고통에 의해 배우게 된다.

제 5장 주관적 경험으로서의 고통

1. 사적인 고통

고통은 표현될 수 없으며, 나밖에 모르는 것이다. 슬픔은 고독을 불러온다. 슬픈 자들은 홀로 있을 수 밖에 없으며 이들이 서로 만날 때는 제 3자가 개입되었을 때 뿐이다. “함께 모이자” 라는 외침은 슬픈 자들이 할 수 없는 것이다.

박완서 씨 예를 기억해보니, 자기는 장성한 아들이 죽었고, 자신을 찾아온 이는 딸이 위중한 병에 걸렸다. 자신의 슬픔으로 달래니, 상대방은 위로가 되었다. 그것이 무척 싫었으나, 상대방 깊은 고통에 한줌 위로가 되었다는 것은 일단 기억해두자.

2. 지향적이 될 수 없는 고통

고통을 겪을 때는, 고통이 주는 대상이나 고통을 받는 나에 대한 생각을 하지 못한다는 이야기이다. 사과의 빨간 구형의 모습을 보면, 우리는 사과를 생각한다. 사람의 얼굴을 보면 우리는 그 사람을 생각한다. 감각을 타고 뇌로 전달되는 그 빨간 신호에 집중하지 않는단 얘기다. 그러나 고통은 다르다. 신호 그자체가 경험이 되며, 우리는 철저하게 그 경험에 당하고 만다.

3. ‘나’를 의식하게 하는 고통

데카르트, 로크, 칸트, 후설 등의 주관주의적 철학에서는 자아의 존재가 직관적으로 확실하고 그 확실한 바탕 위에서 다른 사람, 세계, 신의 존재를 증명하거나 연역하려 하였다. 그에 대항해 쉘러, 사르트르, 부버 등은 타인에 의한 나의 존재 인식을 말하였다. (69)

어떻게 ‘나’의 인식이 가능한가? 미드의 설명을 보자. 상대방의 반응을 통하여 나를 의식한다. 내가 뭘 보고 gesture를 취했을 때, 상대방의 반응을 보고 내 gesture가 가진 의미를 파악한다는 것이다. 자의식은 이렇게 생길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목적격으로의 자신(me)이지 주체격으로서의 자신(I)이 아니다. (67)

고통을 통해 이뤄지는 ‘나’의 인식을 생각해보자. 다른 사람이 나로 하여금 나를 인식하게 한다면, 과연 다른 사람이 내게 주는 느낌은 무엇인가? 무엇을 오감으로 감지하여 “아, 이게 나구나!” 하고 느끼게 하는 것일까? 이것은 고통이다. 기쁨에 겨운 사람은 흥분으로 자신의 바깥으로 나가버린 뒤 자신을 망각해버릴 수 있다. 그러나 고통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네덜란드 심리학자 바으텐데이크 왈, “모든 형태의 고통은 자기 자신에게로 파고들고, 고통과 직접, 간접으로 관계되지 않은 모든 것으로부터 자신을 격리시킨다. 이렇게 시야를 한정시키는 현상은 정서적인 면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심지어 사고에 있어서도 일어난다.”

헤겔도 “아픔을 통하여 사람은 자신의 주체성을 느낀다.” (71)

(오, 갑작스런 나의 생각. 플라톤이 아리스토텔레스와 다르게 육신을 악한 것으로 설정하고 이데아를 상위의 것으로 여기게 된 것은 고통과 쾌락 구도와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고통은 한없이 육신을 향하게 하니 매우 육적인 것이요 또한 싫은 것이니 악한 것이다. 인간은 쾌락을 느끼고 느끼며 하늘로 날아오르는 느낌을 갖기를 바란다. 육체를 떠나고 싶다는 것은 고통에서 회피하는 것이요, 더 나아가 쾌락에 잠기고 싶은 것이다)

물론 고통을 느낄 수 있다고 해서 항상 자기의식이 생긴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그런 주장은 무책임한 환원주의가 될 것이다. 중추신경이 없는 곤충은 고통을 느끼는 것 같지 않으나 중추신경을 가진 모든 생물은 고통을 느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런 짐승들에게 자아의식은 찾아볼 수 없다. 이성, 혹은 정신이라고 부르는 반성의 능력이 있어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그런 인간이 구체적으로 자기의식을 얻는 과정에서는 다른 사람, 혹은 ‘너’ 못지 않게 고통의 경험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4. 공개적이 되려는 사적인 고통

심한 고통을 당하면 비명을 지른다. 사적인 고통은 심하면 심할수록 공개적이 되려고 한다. 사적이지 못하고, 가장 정직하며 적나라한 것이기에 객관적이다. 남들이 절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인 동시에 남의 이해를 기반으로 꽤 객관적이다. 고통은 주체를 괴롭히는 객관성이다. 고통을 가장 주관적인 것으로 경험하는 것, 즉 그 표현은 객관적으로 매개된다. (76, 아도르노) 언어와 사고를 분리할 수 없다면 고통은 동시에 언어적 표현을 요구하는 충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제 6장 고통과 역사의 의미

1. 고통의 의미에 대한 요구

(78) 고통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경험이며, 철저히 사적이면서도 공적이 되려는 충동을 가진 독특한 경험임을 살펴보았다. 언어를 거부하고 언어를 파괴하지만 동시에 고통은 우리의 사유와 언어형성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경험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인간이 당하는 고통이 가진 또 하나의 중요한 특성은 그것이 다른 어느 느낌이나 경험보다 더 그 의미에 대하여 관심을 갖도록 한다는 사실이다. 고통은 우리를 위협하므로 무시해 버릴 수 없다. 고통은 계속해서 왜 그 자체가 있어야 하는지를 묻도록 요구한다.

긍정적인 ‘왜’보다 부정적인 ‘왜’가 더 절실하고 중요하다.

인간은 물론 다른 방법으로도 고통을 당했다. 인간은 주로 병든 동물이다. 그러나 그의 문제는 고통 그자체가 아니라 ‘무슨 목적으로 우리가 고통을 당하나’ 하는 ㅈ러실한 질문에 대해 대답이 없다는 사실이다. 가장 용감한 동물인 인간. 그러나 무엇보다도 확실하게 고통을 당하게 되어 있는 인간은 고통을 그 자체로 부인하지 않는다. 그 고통의 의미가 분명하다면, 즉 고통의 목적이 드러난다면, 그는 고통을 바라고 심지어는 추구할 것이다. 고통 그 자체가 아니라 고통의 의미 없음이 … 인류 위에 내려진 저주였다. – 니체

어떤 사건이나 현상이 ‘의미’를 가지려면 우리는 그것이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나 과정으로 ‘이해’되거나 아니면 과거에 이미 일어난 사건의 불가피한 결과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어떤 논리적 설명이 가능해야 하는 것이다.

2. 고통의 의미와 역사의 합리성

고통은 어떻게 합리화는가 질문이 있다면, 그 후에는 “역사가 어떤 합리성을 가지고 있는가”란 질문을 할 수 있다.

역사에 대한 어떤 해석이 생겨날 수 있는 가장 두드러진 요소는 악과 고통에 대한 기본적인 경험이며 인간의 행복추구다. 역사의 해석은 궁극적으로 역사의 의미를 역사적 행위에 의하여 일어나는 고통의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다. – 뢰비트

고통이 역사의 해석을 요구하는 것은 지금 당하고 있는 고통이 앞으로 무슨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될 수 있으며 과거 어떤 원인의 결과인가를 묻도록 하기 때문이다. 지금 당하고 있는 고통이 그 자체로 목적으로 인식되지 않는 한, 즉 그 자체로 만족스러운 것이 아닌 한, 그것은 과거에 일어난 원인에 의한 불가피한 결과이든지 아니면 앞으로 달성하려는 이상을 위한 불가결한 수단임이 밝혀져야 의미가 있다 할 수 있다.

3. 고통에 대한 역사철학적 이해

(1) 허무주의 비극의 주인공들

니체의 초인은 고통의 운명을 ‘기쁘게’ 수용한다. 일종의 운명에 대한 사랑이며, 운명을 거절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는 합리적인 태도이다.

(2) 라이프니츠의 변신론 (신을 변호하는 이론)

더 큰 선을 가져오기 위하여 전능하신 신이 악을 허락했다.

등산사고에서 아들을 잃은 슬픔에서 월터스토프는 “나는 설명할 수가 없다. 이 가장 깊고 가장 고통스러운 비밀에 직면하여 그저 견디고 있을 뿐이다. ~ 사람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정당화하려고 만들어 낸 변신론들을 읽어 보았다. 별로 설득력이 없었다. 내가 제기한 질문 중 가장 고통스러운 것에 대해서는 답을 얻을 수가 없었다. 나는 하나님께서 왜 그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만 계셨는지 알 수가 없다. 그가 상하는 것을 왜 보고만 계셨는지 모른다. 짐작할 수도 없다. (89)

4. 역사철학의 걸림돌로서의 고통

모든 사람의 고통이 역사의 흐름 속에 설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제 7장

1. 생물학적 생존과 고통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어떤 소년은 온몸이 상처투성이고, 손가락 몇이 부러졌으며, 피가 흐르는 무릎으로 기어 다니고, 불에 손을 넣고, 날카로운 물건에 부딪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한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아이들의 부모는 하루종일 그런 아이들을 지켜 보지 않으면 안되고, 그런 아이들은 대개 일찍 죽는다 한다.

고통은 무엇보다도 비정상적인 상황을 인식하게 하는 기능을 한다. (104) 그래서 적어도 우리가 지금 아는 바 생물학적 구조가 유지되는 한 동물에 있어서 고통은 생존보존에 불가결하다.

2. 공동체 유지와 고통

3. 고통과 희생

(113) 고통이 인간의 생존을 가능케 하고, 공동체 형성에 중요한 기능을 한다 해도, 그런 고통을 왜 ‘내’가 당해야 하는 가에 대한 충분한 대답은 되지 못한다.

“왜 구태여 나까지도?” 혹은 “왜 구태여 나만?”에 대해서는 종교외에는 아무 이론도 만족스런 대답을 제시해 줄 수 없을 것이다. 헤겔은 “이성은 개인 하나하나가 고통을 당하는 것에 대해 머물러 있을 수 없다.”고 함으로써 고통이 개개인에게 가지는 의미에 대하여 철학의 무력감을 표시하였다.

제 8장 고통과 윤리

1. 실천을 목적으로 하는 윤리이론

윤리학은 실천을 이끌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적유희에 불과하다. 실천을 이끌어내지 못하는 윤리학이란 마치 병을 고치지 못하는 의학과 같다.

“사람은 윤리적으로 행동해야만 한다.”
“사람은 본래 윤리적인 동물이므로 윤리적으로 행동하지 않으면 짐승이나 다름없다.”

와 같은 것은 설득력이 없다. 윤리학이란 좀 더 ‘피부에 와 닿는’ 표현으로 실천력이 있는 철학이어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통에 기반한 윤리학은 힘이 있을 것이다.

2. 고통의 윤리적 의미

(1) 윤리적 당위와 고통

앞에서 고통을 선과 악을 구별하는 가장 원초적인 기준이라고 주장하였다.

(127) 쾌락은 항상 느껴지지 않아도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으나 고통을 제거하지 않고 정상적인 삶을 사는 것은 매우 어렵다.

3. 비도덕적 행위와 고통

욕망은 고통 바깥에 있는 또 하나의 본능이 아니라 바로 고통 그 자체의 본성에 놓여 있다. 고통은 그 자체가 제거되기를 원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고, 그것이 바로 욕망의 근원인 것이다.

4. 사회윤리와 고통

(141) 권세에 대한 이야기. 일반적으로 제도, 구조, 법률, 집단 등 비인격적인 세력들이 가져다 줄 수 있는 고통은 인격체들이 가할 수 있는 악보다 더 파괴적이며, 고쳐질 가능성도 훨씬 더 희박하다. (니버가 이에 대해 매우 좋은 책을 썼단다. 1932년에)

제 9장

고통의 극복과 문화

1. 고통과 경이

경이의 저 밑바탕 어느 구석에는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 숨어 있는 것이다. (진짜?) 아름답다고 느끼고 왜 그런지 이해하려는 것도 고통에 대한 두려움일까?

고통은 비정상의 전형이요, 비정상적인 것을 비정상적인 것으로 인식케 하는 계기가 된다. 강영안 교수의 “악에 대한 형이상학적 성찰”, 악이란 무엇인가 란 책을 읽어볼까?

쾌락은 쾌락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2. 고통의 자살지향성

3. 자살과 진통

4. 고통의 극복과 종교

(1) 불교에서의 고통

존재가 고통이다. 그니까 고통에서 해방되는 것은 이게 다 고통이라는 걸 깨닫고 거기서 해방되어야 한다. 이게 소승불교인데 사실 철저한 개인주의요, 자기 중심적이다. 그래서 등장한 것은 대승불교. 어미 호랑이를 잃은 새끼호랑이들을 보고 자신의 목을 찔러 엎드려 짐승과 새끼를 살린 마하사바타 왕자의 이야기. 열반을 포기하고 중생을 위해 희생하는 보살을 등장시켰다.

(2) 기독교와 고통

(169) 기독교의 고통관이 불교의 그것과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은 고통이 인간에게 있어서 본래적인 것이 아니라 죄의 결과라는 주장에 있다. 죄를 짓기 전의 아담과 하와는 고통을 당하지 않았고 죄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천국에서도 역시 고통이란 있을 수 없다. 엄격하게 말해서 모든 고통은 기독교에서는 어디까지는 벌이요, 불교에서처럼 인간에게 존재론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윤리적으로 선택된 것이다.

기독교의 고통관은 여러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하나님이 전능할 뿐 아니라 사랑으로 가득 찬 인격적인 신이라면 그런 자비로운 신이 어떻게 인간에게 그렇게 참혹한 고통을 허락하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될 수 밖에 없다.

(171) 그러나 모든 변신론적 시도는 특별히 나쁜 죄를 짓지 않았으면서도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나 그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족시킬 수 없다.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그런 논리적인 위로를 거부하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고통당하는 사람들, 특히 절망적인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은 지푸라기라도 잡으려 하고, 가능한 한 설득력 있는 변신론이 주어지기를 열망한다. 그렇기 때문에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변신론을 제시해 보려고 안간힘을 다한다. 그러나 그것이 근본적인 위로를 제시할 수 없는 것은 ‘카라마조프 형제’에서 이반이 말하듯 우리는 유클리드가 아는 세상에 살고 있고, 거기서는 전능자의 사랑과 무죄한 사람의 고통이 어떤 이론으로도 조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이 문제를 궁극적으로 내세와 하나님의 공정한 최후 심판에 대한 교리로 해결한다. 고통을 가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잘못을 회개하고 피해자에게 응당의 보상을 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그에 상응하는 보응을 이 땅 위에서나 내세에 받을 것이다. 회개란 단순히 잘못을 반성하는 정도의 것이 아니라 잘못에 상응하는 고통의 벌을 받을 각오를 할 정도의 철저한 뉘우침을 뜻한다. … 그러나 회개하지 않은 사람, 그리스도의 대속의 혜택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내세에서 영원한 벌을 받을 수 밖에 없다고 가르친다.

5. 고통과 노동

노동은 필수불가결한 것이며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데 꼭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노동은 괴롭다. 이 딜레마를 어떻게 풀 수 있을까. 아무도 모른다.

제 10장 인간과 고통

1. 인간이란 신비

2. 이론적 인간 이해의 약점

3. 고통받는 인간

4. 고통받는 얼굴과 윤리적 의무

5. 현대인과 고통

 

 

<<COPY 본>> 2011.08.26

“잠”과 “실신”에 대하여

고통이 지나칠 때, 우리의 의식은 감각의 인식을 거부한다.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닥쳐올 때 우리는 그 고통을 느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미칠 피해를 막기 위해 스스로 감각을 차단합니다.) 우리 스스로 고통을 피해 도망치는 출구는 잠 또는 자살이요, 우리 몸이 스스로 의식을 보호하기 위해 실행하는 기제는 실신 또는 기절이다.

고통을 가진 이가 불면증에 걸렸다면, 이는 더할 나위없는 고통이 된다. 고통을 피할 수 없다는 두려움까지 겹쳐 패닉 상태에 이른다. 죽음 너머로 간 이의 정신을 연구할 수는 없으므로 대신 잠을 살펴보기로 하자.

잠에서는 시간을 인식할 수 없다. 감각체계도 어느 이상 무감해진다. 내가 위장의 움직임을, 심장의 박동을 제어할 수 없듯이 몸이 한순간에 무정부상태가 되어버린다.

인간이 철저하게 물질적이라면, 잠은 물질 체계를 정돈하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인간이 정신적이라면, 초자연적인 무언가가 육체와 결합하여 연동하는 거라면?

꿈에서 깨는 것. 행복한 꿈을 꾸다가 깨며 아쉬워하는 경험. 무서운 꿈을 꾸다가 깨서 안도하는 경험.

고통은 자아로 하여금 끊임없이 내면으로 향하게 한다. 자기 연민에 빠질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고통은 자아의 블랙홀이 될 수 있다. (슈바르츠실드 포인트)

내가 우울증을 겪으며 경험한 것은 단순하게 블랙홀이 되어 버린 고통의 실재를 목격한 것이다. 수없이 자살을 생각했다. 내 고통을 겪는 것은 내 몸이니 이를 버리면 고통의 블랙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 고통의 블랙홀은 내 몸에 갇힌 것이니 내 몸을 죽이면 따라서 고통도 없어질 것이라 확신했다.

우리의 역할은 끄집어 내는데 목적이 있다. 선한 신이 창조한 이곳은 묘하게도 선과 악이 공존하는 곳이다. 우리가 할 일은 선한 길을 따라 가는 것이다. 과거에서 미래로 향하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우리는 신을 향해 올라가고 그는 내려와 우리를 만난다. 그 길은 좁은 길이다. 중용의 길이다.

고통의 블랙홀에 빠져보지 않은 사람은, 고통은 극복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약간의 남의 도움만 있으면 자력으로 극복할 수 있는 범위의 고통만 경험해보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자신의 시야에 회복의 지평선이 들어와 있기 때문에 얼만큼의 시간과 노력이 들어 회복될 수 있을지 압니다. 혹은, 그것을 모르더라도 계속 회복을 향해 한발짝씩 걸어갈 의지와 힘이 있습니다.

고통은 고독한 인간의 고독함을 더욱 깨닫게 합니다. 인간이 겪는 고통을 하나의 숫자에 대변할 때, 비슷한 고통이라 해도 그 숫자는 저 숫자와 다르며 한끝차이인 것 같아도 그 사이에는 무수한 숫자가 존재할 수 있는 것처럼요.

왜 이런 고통이 존재할까요? 신은 왜? 창조과정에 불필요했을까요? 예수님은 왜 십자가 고통을 겪은 건가요?

고통은 분류를 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고통의 기작을 이해하고 고통이 사람에게 주는 영향을 파악하기 위해서 등등) 자연의 타락으로 인한 고통. 자연재해에 의한 고통. 신체의 통점이 가져다 주는 고통. 그리고 2차적으로 정신이 느끼는 고통. 정신이 느끼는 고통은 똑같이 날아오는 돌에 맞아도 고의냐 우연이냐에 따라 크게 달라집니다. 고의로 맞았다면 즉각 화가 납니다. 상대방에 대한 증오가 일 수 있으며 억울하게 느낄 수도 있습니다. 증오, 분노 등은 마음에 담아둘 경우 좋지 않다는 것은 이제 심리학적으로 상식이 되었습니다. 반대로 우연히 맞았을 경우 그날 특별히 기분이 나쁜 것이 아니라면 그리고 상처가 대수롭지 않다면 넘어갑니다. 그런데 돌이 팔을 때린 것과 얼굴을 때린  것이 또한 고통이 다릅니다. 얼굴은 소중하게 여기는 부분이기 때문에 그 부위에 상처를 입은 것이 너무 싫고 화가 납니다.

신체적 고통은 누구에게나 비슷하게 다가옵니다. 고통에 대한 민감도의 차이가 있을 뿐, 신체적 고통이 두뇌에 보내는 신호의 스펙트럼과 amplitude는 대개 비슷합니다.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영역이 마비되지 않았다면 말입니다. 누구나 때리면 아픈 것도

신체적 고통은 정신적 고통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예컨대 길에서 누군가가 어깨를 치고 지나갔을 때 실수로 부딪힌 것이 아니라 일부러 그랬다면 화가 납니다. 무덥고 습한 여름 날씨는 사람들을 짜증나게 할 수 있습니다. 사우나에 들어앉은 사람은 마냥 기분 좋은 데 말입니다. 그러나 똑같은 신체적 고통에 대해서 사람들이 느끼는 정신적 고통은 제각각입니다. 어깨를 치고 지나간 사람을 향해 분을 쏟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를 즉각 용서하고 감정을 추스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신체적 고통이 정신적 고통으로 확산되는 것을 그들의 이성, 그리고 이성으로 훈련된 습관이 함께 제어합니다.

정서적 고통은 비로소 의식됩니다. 신체적 고통은 그만의 경로를 통해 의식에 도달합니다. 의식에 도달하는 신체적 고통이 극심할 경우, 신경이 고통의 전달을 스스로 차단합니다. 그 때 사람은 기절합니다.

지나친 정서적 고통은 그를 제어하는 사슬을 끊고 폭발할 수 있습니다.(우울증, 조증) 그런 고통은 고삐가 다시 잡힐 때까지 우리의 정서를 유린합니다.

그 때 우리 이성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아니, 의식이라고 해야 할까요.

유대인을 설득시키기 위한 의미 – 대속. 하나님이 그런 낡은 제도로 인류를 구원한다고는 보기 힘들다. 대속이란 하나의 상징이다. 그가 받은 고통의 의미란 대체 무엇일까. 다 이루었다란 뜻은 대체 무엇일까. 블랙홀에서 모든 이를 구출해 낼 특권을?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일까? 희망과 두려움(포기, 안주), 쾌락과 고통, 행복과 불행, 사랑과 무관심 이런 대조는 왜 생긴 것일까? 전쟁과 평화, 선행과 악행.

자유의지. 질서와 무질서. 먹이사슬, 자연에서 발생하는 악. 재해.

지옥이란 고통이 주어지는 곳이 아닙니다. 안식없는 고통, 무한한 고통이 있는 곳이기에 지옥이라 불리는 겁니다. 우리가 찾아가거나 불려가는 곳이 아닙니다. 우리가 고통 안에 거하기에 우리를 지옥이라 부릅니다.

블랙홀의 심연에 빠져드는 순간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어둠을 등지는 것입니다. 고통이라는 중력이 자아를 블랙홀로 몰아갑니다. 심한 고통은 슈바르츠실드 선을 지나 우리의 블랙홀은 고독의 극치입니다. 홀로 있는 자아는 얼굴을 타인에게로 돌리지 못합니다. 타인의 얼굴을 그래서 볼 수도 없습니다. 개인주의를 넘어 이기주의로 발전합니다. 빛마저 빨려드는 저 심연에서, 나는 내가 들어왔던 빛이 있는 입구를 향해 애써 고개를 돌려야 한다. 빛의 자취만 남은 입구라 하더라도, 아니 이제 빛이 없는 곳이라 하더라도 내가 떨어지는 방향을 등지고 빛이 있었던 그곳을 향해 얼굴을 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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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epsky3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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