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 머리말과 맺음말

머리말쯤 사용될 토막생각들

이 책은 제 자신의 고통 극복에 대한 수기입니다. 따라서 매우 비전문적입니다만, 그러나 제가 감사할 수 있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게 하기만 한다면 어떤 하찮은 지식이라도 저에게는 긍정입니다. (따라서 고통에 대해서는 매우 많은 책들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고통은 정상인 고통이 있고, 비정상인 고통이 있습니다.

희미해져가는 기억 속에서 고통의 기억은 그 무엇보다도 선명하게 내 안에 자리잡습니다. 뉴스에서나 나옴직한 다른 이들의 고통은 내 기억을 스쳐 지나가는, 그야말로 세상이 무섭구나라는 느낌만을 남기는 것입니다. 나 밖에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은 언어로도 다 표현할 수 없기에 타인이 위로해 줄 수도 없습니다.

나의 고통과 이웃의 고통을 상기해 보고자

고통을 겪다보면 고통의 의미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게 될 때가 있습니다.

이 책은 일단 깊고 어두운 고통의 심연에서 “왜 고통이, 나에게, 지금?”이라고 절규하는 분들을 염두에 두고 쓰여졌습니다.

이 책은 철저히 실천을 격려하기 위해 쓰여졌습니다. 실천윤리학.

이 책은 사실 고통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대체 이 처절하고 끔찍한 고통들의 의미는 무엇이며, 그 고통들로부터 우리는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내용의 주입니다.

아주 작은 고통에서부터 블랙홀에 갇혀 한 줄기 빛마저 허락하지 않는 극심한 고통에 이르기까지 다루어 볼 생각입니다.

“…힘내.”

“넌 좀 가만히 있어. 누군 힘낼 줄 몰라서 이러고 있는 줄 알아? 네가 대체 내가 겪는 이 고통에 대해 뭘 안다고 충고야?”

(그렇지만 친구가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둘의 대화에서 의미를 찾고, 고통 해결의 의미를 찾아가는 데 있습니다.

머리말 (루이스의 서문을 보면서 참조해서 적자) “고통 안의 소통”

“고통에서 어떻게 벗어나야 하는가?”
“고통에 빠진 이를 어떻게 도와야 하는가?”

윤리적 요구는 그저 과부와 고아의 얼굴을 본다고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연민 이상의 것이 필요.

고통을 겪고 있는 누구라면 가질 의문이 바로 “왜?” 입니다. 그리고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떠올릴 질문이 “어떻게?”일 겁니다. 위의 두 질문은 고통을 겪는 당사자 외에도 당사자 옆에서 그를 돕고자 애를 쓰는 이들도 함께 묻는 것일 겁니다.

좋습니다. 그렇게 타인의 도움과 나의 노력으로 나는 고통에서 벗어났습니다.

맺음말

개인의 고통이 조금이라도 본인에게 의미가 있다면 그를 살려야만 합니다. 그가 죽으면 고통도 쓸모없는 경험이 되기 때문입니다.

고통 받는 이가 있을 때 우리는 그가 고통에 의한 악영향을 받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고통이 없어지면 어쩌고 저쩌고.

고통의 당위성: 사랑을 하다보면 죽도록 사랑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가 겪은 십자가에서의 고통은 악에 대한 단죄와 죽음의 고통도 불사하는 표현되는 사랑이 모두 담겨있습니다. 네가 날 사랑한다면 저 호수에 빠져. 그런 고통과 불편을 감수할 정도로, 다시 말해 그런 총체적 부정들을 이겨낼 정도로 네가 내 말을 따르고자 하는 의지, 즉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보여줄 마음이 크냐는 겁니다.

예수가 죽어서, 그래서 고통을 겪어서만 우리에게 사랑을 웅변할 수 있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쾌락을 주는 것만으로 우리가 그 사랑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을 아는 이유 중 큰 것은 그들이 우리를 위해 희생하기 때문입니다. 몸과 마음이 힘들고 손해인 데도 심지어 아이가 미운데도 불구하고 (그 부정의 메세지를 거스르고) 아이를 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얼굴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예수님 역시 얼굴 너머의 그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변신론자들 중에 예수가 십자가형에서 세상의 모든 고통을 다 짊어졌다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믿음, 특종 사건) 그러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화형을 당해보지 않았고, 손가락이나 발가락이 잘리는 극도의 고통도 경험하지 않았으며 여성만이 겪을 수 있는 특별한 고통의 경험도 하지 못했습니다. 고통의 기능 중에는 긍정을 긍정하는 부정이 있습니다. 고통 중에 특별히 남에게 가시적인 고통들이 있습니다. 특히 가시적 효과가 드러나는 제국들의 형벌이 그러하지요. 짐승들에게 피와 살이 뜯기며 먹히는 형벌, 태형, 화형, 십자가형.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고문의 전문가들, 인간이 어떻게 고통을 극도로 느끼는 동시, 그것을 바라보는 자들이 두려움의 고통을 크게 느끼는지를 극대화시키는 것을 잘 아는 이들입니다. 예수의 십자가형은 그 기능에 충실히 부합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그의 정신이 함몰되지 않은 것이 그 증거인데, 그가 뇌에 충격을 받아 이성의 지배력을 증강시키는 세로토닌 따위의 신경전달물질 분배가 교란되면, 매우 부정적인 감정에 사로잡힐 수가 있습니다. 불만, 걱정, 신경질적, 증오, 분노, 심지어 살의까지 들 수 있습니다. 예수의 행적에서 이와 같은 모습이 드러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리고 드러날수도 없고 드러났을리가 없는(그렇잖다면 사람들이 그리 따르지 않았을 것) 것을 생각한다면, 예수는 적어도 우리가 아는 수십 가지 정신병은 겪지 않았습니다.

긍정을 긍정하는 부정의 기능을 활용해 예수가 웅변한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십자가형만치 엄정하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통이 악에 대한 형벌이라면, 그는 고통받을 일이 없으므로 그가 남의 고통을 대신 짊어졌다고 볼 수 있는데 그렇다면 남의 형벌과 고통이 그만큼 크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죄가 크고 그 대가가 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죽음이 그야말로 확실했다는 것. 그런데 그가 부활했다는 것.

십자가에서 예수가 웅변한 메세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보라 내가 네 악과 네 잘못을 모두 책임졌다. 네가 할 일은 너도 나와 같이 하라.

예수의 메세지는 공동체를 향한 메세지이기도 하며 개인을 향한 메세지이기도 합니다. 개인의 고통은 그만이 아는 고통이면서도 꼭 그렇지 않고 타인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다. 마취로 그가 고통으로 죽음에 이르지 않도록 도울 수 있으며 이는 정신적, 육체적 마취가 있습니다. 육체적 마취라 하면 20세기 이르러 개발된 마취제를 말하는 것 같은데 과학기술이 개발된 요즘에서야 적용되는 이야기가 아니냐. 아닙니다. 중국에는 기공이 동양에는 침술이 있었으며, 스트레스가 가득한 생활을 떠나 안전한 자연에 기거할 수도 있었습니다.

레비나스는 고통을 고통으로 볼 수 있는 이성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변신론은 죽었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아우슈비츠마냥 악하다 일컬어진 소돔과 고모라는 그렇게 멸망했습니다. 변신론이고 자시고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멸하셨습니다. 아모리의 죄악이 차지 않았기 때문에 심판이 지연되었습니다. 곧 죽을 이들입니다.

고통에 대한 과학적 연구는 분명히 개인의 고통에 대한 책임이 개인보다 타인에게, 그리고 공동체에게 있음을 밝혀낼 것이라 저는 확신합니다. 고통을 겪은 이들은 두 가지 반응을 보입니다. 고통으로부터의 회피냐. 고통을 겪은 이들을 향해 나가 돕느냐. 자기 방어냐, 남을 도우러 나가느냐. 저는 다른 건 몰라도

* 고통을 경험할 기회를 얻지 못하는 이들: 부자들. 주께서 왈,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느니라

* 힘을 지난 고통을 겪어 살 소망까지 끊어질 이들:

(당신의 고통은 의미있습니다. 다만 그 의미가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았을 뿐. 아직 당신에게 선택의 여지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당신을 떠미는 악한 세력은 이미 힘을 잃고 떠벌이는 이들이라는 것을. 선과 악이 존재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어렵다!! )

저는 여러분들께는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정서의 폭주는 이성이 통제하지 못합니다. 자신을 자살로 이끄는 고통이 육체적인 것이라면 진통제의 사용을 권하겠고, 정서적인 것이라면 필히 두뇌의 건강이 안 좋아졌을 테니 우울증, 조울증, 정신분열증 등등 회복제의 섭취를 권하며, 그럼에도 스트레스가 과할 때에는 주변인들의 도움에 하나님의 지혜가 함께 하기를 기도하며, 혼자 계시다면 그야말로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기를 간구하겠습니다.

끝끝내 당신과 함께 하기를 원하는 고통이 있다면 그를 안으십시오. 니체처럼 고통을 애견삼아 이름도 붙여주고 함께 해도 좋습니다. 상실의 슬픔은 많은 이들이 죽음까지 안고 갑니다. 슬픔의 고통이 그러한 이유는 슬픔을 놓으면 잃은 이의 기억마저 놓아버릴 것 같기 때문입니다. 제랄드 싯처는 그래서 강의시간에도 울었다. 심지어 육체적 질병인 암마저 친구가 되어야 잘 극복한다고 합니다. 고통을 받아들이지 않고 싸워 이기려고만 하면 오히려 질병을 이길 확률이 낮다고 합니다. 우울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고통을 안고 자란 이들. 갑작스런 사고로 전신마비를 겪은 이들.

세브란스 병원에서 만난 젊은 여성분. 첫 아이를 출산하면서 마취의 잘못인지 전신마비가 되어 목 위의 근육만 움직일 수 있는 분. 다행히 병원에서 책임을 떠맡으며 죽는 날까지 공짜로 입원과 관리를 해주는. 그러나 남편이 재혼하고 떠나고 심지어 아이의 면회마저 허락하지 않아 외롭게 침대에 누워 있는 분. 벽에 붙어있는 성경말씀을 읽으며 감사의 태도로 일관하는 그분의 환한 얼굴은 그야말로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저는 깨닫되, 고통을 겪고 있는 이에게 진리를 논하는 것보다 무엇보다 옆에 앉은 침묵이, 그리고 그보다도 힘든 이의 마음을 울리는 몇 마디 격려가 큰 힘이 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자신의 고통을 안을 수 있는 이가 타인의 고통을 안을 수 있습니다. 고통은 자신을 재발견하는 기회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고통은 개인의 책임만이 아닙니다. 남의 도움이 미숙하고 서툴더라도 받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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