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7장 기독교 믿음에 대하여 – 1. 칭의에 대한 재정의

1. 칭의에 대한 재정의

2. 하나님을 용서하기

이제까지 고통에 대한 신념의 역할에 대해서 논하였습니다. 회복의 시작이 되는 믿음. 그리고 고통의 경험이 이해되어지면서 자신이 갖게 되는 새로운 신념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였습니다. 고통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서 비롯되고 공동체에서 책임져야 하는 것이라고도 하였고, 그러나 회복은 공동체에서 돕되 마취 수준에 그쳐야 한다는 것도 이야기하였습니다. 고통에서 회복하고 고통에서 벗어나는 그 모든 것의 과정에는 신념이 자리한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지식을 얻었습니다. 슬픔은 지식이고, 고통은 앎입니다. 저는 여기서 한 가지 특별한 믿음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종교적 믿음, 그 중에서도 기독교의 믿음입니다. 바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고통을 허락하는 선한 신을 변호하려는, 흔해빠진 변신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거냐.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믿다가 격한 고통 때문에 하나님을 용서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서 이 장을 준비했습니다. 무신론자나 불가지론자가 유신론자가 되는 것은 상대적으로 좀 낫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없는 옵션이 추가되어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신론자가 신을 잃는 것은, 그 자체로 고통스런 일입니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무엇에 대한 모든 것의 열쇠를 신에게 맡겼는데, 만일 신이 없다면 나는 죽음, 타인, 사랑, 미래, 삶의 의미 모든 것을 재정의해야 합니다. 바울이 말한 바, 우리는 불쌍한 자가 됩니다.

저는 두 가지 기준은 분명히 세워놓고 시작하고자 합니다. 천국과 지옥입니다. 그리고 절대선과 사탄. 예수의 음성을 아는 양과 그렇지 못한 양. 우리를 넘어 양에게 다가오는 늑대들의 존재. 선과 악 두가지 기둥을 분명히 박아놓고 논의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돌이켜보건대 악은 실존하기 때문이요, 악에 대한 하나님 심판의 엄정성은 이미 자신의 아들마저 십자가에 못박는 결의한 태도로 자명해졌습니다. 사탄의 목소리를 듣거나 사탄에 빙의된 사람을 볼짝시면, 사탄의 존재를 부인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성령과 사단이 우리의 의식에 잇닿아 있어 감각할 수 없이 우리와 교감하는 존재일 수도 있기에, 그들의 존재가 전혀 비과학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초자연적인 요소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아니면 아예 영혼이 존재한다면 성령의 존재와 더불어 사탄의 존재는 우리와 공존하며 서로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입니다.

1. 칭의에 대한 재정의

옳은 믿음은 고통의 시작에서부터 끝까지 살아남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정의하고 있는 이신칭의에서의 믿음은 “예수가 하나님의 성육신한 아들로서 십자가에 나의 죄를 대신해 못박혀 돌아가셨다”를 믿는다는 믿음입니다.

이 명제를 믿는 믿음이 대체 고통받는 이들에게 무슨 힘을 주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톰 라이트의 단순한 명제가 그래서 좋습니다. 바울이 이야기한 복음은 “예수를 믿는” 것이다. 유대인이 역사와 문화를 통해, 다시 말해 구전적으로 전해내려온 이야기를 토라를 배경으로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했을 때, 그리고 저 끝의 시간에 이방인이 심판받고 고난받는 유대인이 부활할 그 끝의 시간이 아닌, 역사 중간에 예수가 부활함으로서 재조명되는 유대인들의 이야기. 그리고 거기서 유대인들이 믿게 된 메시아로서의 ‘예수’. ex) 김요석 목사님의 이야기. 나사로의 이야기. (미래적 지향성)

저는 믿음이란 하나님을 향해 바라보는 아이의 얼굴같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신뢰하고 의지하기에 저를 맡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기에 자신의 행동도 하나님의 말같지 않은 율법이나 명령까지에도 순종할 수 있는 겁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Love Wins 저자처럼 ‘믿는다’도 동사이므로 행위에 들어간다구요? 맞습니다. 우린 게다가 하나님을 이 꽉물고 힘주어 믿지요. 습관처럼 하는 행위보다 오히려 더 힘이 듭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에 힘줄 때는 그것을 방어하기 위한 것입니다. 믿음은 내가 아는 최선의 지식으로 신념을 구축하고 그 위에 올라타면 하나님이 나머지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십니다. 시골 농부의 믿음과 톨스토이 작가의 믿음.

절대 정의, 절대 기억, 심판 이런 게 없다면 고통은 무의미, 반이성 등을 떠나 그야말로 불의의 결정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죽음에 유일하게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이 초자연적인 존재입니다. 그리고 시간의 처음과 끝, 우주의 시작과 끝을 언급한 경전은 기독교가 유일합니다.

저는 사랑이 창조세계를 붙잡는 하나님의 질서라는 것 때문에라도 기독교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 믿음이 위대한 것은 그 믿음이 참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죽음, 고통, 윤리, 폭력, 그리고 좋은 것까지 한계가: 사랑, 은혜, 자비, 리소스, 건강 등등. 한계가 깨어지지 않으면 우리 삶에는 의미가 없습니다. 굳이 의미가 있어봤자 백 년 남짓합니다. 참을 가리키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삶을 제한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레비나스의 철학을 받아, 예수가 나의 고통과 과오까지 책임을 지고, 그 책무를 다하는 것이 곧 십자가에서 못 박히는 일이었다면 나는 두 방향에서 모두 명령을 듣는 셈입니다. 타인의 얼굴로부터 오는 호소, 명령. 그리고 그를 도우라는 예수의 명령.

구원의 확신에 대한 교리는 잘못되었다고 봅니다. 우리가 누구관대 감히 죄인이 죄인의 구원을 정할 수 있단 말입니까? 마치 저 양은 목자들의 소리를 분별못할거야. 하고 속삭이는 우둔한 양무리와 같습니다.

믿음은 내가 만든 길과 같습니다. 이 길들의 방향은 내 삶의 모든 과정에서 수정되기도 하고 강화되기도 합니다. 항상 하나님을 바라보고, 성경을 읽고, (온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런 자라야

믿음은 분명 지식일진데 가장 교육받지 못한 이에게도 잘 받아들여 집니다. 믿음은 쉬운 무엇입니다.

시골농부도 가고, 백부장도 가며, 나사로도 가고 톨스토이도 가되 어느 동방나라의 커다란 교회 목사님들은 가지 못할 그런 길일 겁니다.

믿음이란 나의 앎이 진실에 미치지 못했음을 좌절하지 않는 것이다.

믿음이란 아직 나의 지식이 절대 진리에 미치지 못한 것을 좌절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직 절대 진리에 미치지 못했다고 해서 내가 얻은 지식을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얻은 지식에 만족하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얻은 지식에 만족했다면, 그것은 곧 무지이고 교만입니다. 믿음은 무지에 대한 자각이며, 더 나은 지식

믿음이란 진실의 존재를 믿는 것이며, 이 믿음에 기반해 나는 진실을 탐구한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란, 다시 말해 하나님이 의롭다 여기는 믿음이란 순전히 은혜입니다. (로마서 4장 2절부터) 순전히 은혜라면서 또 믿어야 구원받는다는 것은 무언지. Love Wins의 저자처럼 믿는다verb는 동사인지. 그럼 믿으면 존나 힘줘서 믿어야 하는지. 강하게 자기 최면 걸어야 하는건지. 하하 우습습니다.

로마서 10장 6-15절

6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7 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8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11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14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신명기 30장 11-14절

11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12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이 아니요
13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도 아니라
14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바울이 로마서에서 율법과 믿음을 대조하며 이야기하고자 한 것은 믿음이 쉽다는 것입니다. (음, 믿음이 있네 없네 식으로 천국에 갔네 못갔네 따지는 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이야기할려고 봤더니 그런 의미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쉬운 믿음.

2. 하나님 용서하기

“왜 하나님은 나에게 이런 고통을?”

첫째, 당신에게만 그야말로 스스로 절멸할 것만 같은 그 고통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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