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에 대한 믿음 – 2. 하나님 용서하기

1. 칭의에 대한 재정의

2. 고통의 유용성? – 재미, 감동, 긍정을 긍정하는 부정…??

2. 하나님을 용서하기 – punishment로서의 고통

이제까지 고통에 대한 신념의 역할에 대해서 논하였습니다. 회복의 시작이 되는 믿음. 그리고 고통의 경험이 이해되어지면서 자신이 갖게 되는 새로운 신념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였습니다. 고통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서 비롯되고 공동체에서 책임져야 하는 것이라고도 하였고, 그러나 회복은 공동체에서 돕되 마취 수준에 그쳐야 한다는 것도 이야기하였습니다. 고통에서 회복하고 고통에서 벗어나는 그 모든 것의 과정에는 신념이 자리한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지식을 얻었습니다. 슬픔은 지식이고, 고통은 앎입니다. 저는 여기서 한 가지 특별한 믿음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종교적 믿음, 그 중에서도 기독교의 믿음입니다. 바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고통을 허락하는 선한 신을 변호하려는, 흔해빠진 변신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거냐.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믿다가 격한 고통 때문에 하나님을 용서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서 이 장을 준비했습니다. 무신론자나 불가지론자가 유신론자가 되는 것은 상대적으로 좀 낫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없는 옵션이 추가되어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신론자가 신을 잃는 것은, 그 자체로 고통스런 일입니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무엇에 대한 모든 것의 열쇠를 신에게 맡겼는데, 만일 신이 없다면 나는 죽음, 타인, 사랑, 미래, 삶의 의미 모든 것을 재정의해야 합니다. 바울이 말한 바, 우리는 불쌍한 자가 됩니다.

저는 두 가지 기준은 분명히 세워놓고 시작하고자 합니다. 천국과 지옥입니다. 그리고 절대선과 사탄. 예수의 음성을 아는 양과 그렇지 못한 양. 우리를 넘어 양에게 다가오는 늑대들의 존재. 선과 악 두가지 기둥을 분명히 박아놓고 논의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돌이켜보건대 악은 실존하기 때문이요, 악에 대한 하나님 심판의 엄정성은 이미 자신의 아들마저 십자가에 못박는 결의한 태도로 자명해졌습니다. 사탄의 목소리를 듣거나 사탄에 빙의된 사람을 볼짝시면, 사탄의 존재를 부인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성령과 사단이 우리의 의식에 잇닿아 있어 감각할 수 없이 우리와 교감하는 존재일 수도 있기에, 그들의 존재가 전혀 비과학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초자연적인 요소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아니면 아예 영혼이 존재한다면 성령의 존재와 더불어 사탄의 존재는 우리와 공존하며 서로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입니다.

1. 칭의에 대한 재정의

2. 하나님 용서하기

기대를 가지고 이 장을 읽기 시작하셨다면 여러분이 겪고 계신 고통은 순수한 정서에 가깝다는 것을 먼저 인지하시기 바랍니다. 흥미, 즐거움, 놀라움, 공포, 분노, 수치심, 모욕, 역겨움 등 정서를 느낄 때의 뇌의 기작과 다를 바가 없다는 말입니다. 사실 누가 분류한 정서의 종류에는 고통이 들어가며,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몇몇 과학자들은 고통이 감각의 인지가 아닌 순수한 정서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당연한 것은, 여러분이 고통을 느끼는 것은 올바른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아프게 하는데 아프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으며, 생떼같은 자식을 잃은 부모를 잃었는데 슬프지 않을 부모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이성을 잃는 분노. 고통도 마찬가집니다. 이성을 찾도록 도움을 주는 글입니다. 즉, 진통제 혹은 안정제와 더불어 이성을 잡아주는 글도 함께 적어보겠습니다.

통증이 특별히 과한 이유. 고문하는 하나님. 이걸 믿어! 하나님이 원하는 신념은 머리로만 믿는 게 아닌 것 같다. 지식에 대한 것이라면, 잘 배우면 될 일이다. 맞다 틀리다. 그러나 좋다 나쁘다의 개념. 선악의 개념. 사랑이 머리로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일지. 내가 너를 사랑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때려서 교육하는 거라고? 그 이상의 의미는 없을까? 근데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확실히 그러하다. 사랑의 대가는 가혹합니다. 그리고 제가 보기에 심한 고통을 겪는 일부를 보면, 남을 위해 사용될 무엇만 같습니다. 혹 고통을 통해 하나님을 믿는 이가 있다고 합시다. 당신과 비슷한 고통을 겪을 때, 그가 일어나는 것이 혹 당신을 위해서인지 어찌 압니까? 예수의 고통이 당신을 위한 것이란 것을 어찌 알았습니까? 듣고 안 것이 아닙니까? 예수의 십자가 고통은 제자들로 하여금 그보다 더한 고통도 견뎌낼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냥 정치범으로 몰려 죽은 것으로 보인 그야말로 실패의 죽음이, 그리될 지 누가 알았단 말입니까?

하나님의 침묵. 그것은 고통받는 당신에 대한 믿음일지도 모릅니다. 왜 배신이 아닌지 나서서 설명해주면 될 일을 그리도 침묵으로 일관한단 말입니까? 음~

아무도 의식적으로 ‘아파하지’않는다의 무엇. 고통당할 뿐이다.

답해야 할 질문들:

– 고통이 선을 초래하는가 악을 초래하는가? 악을 초래하는 고통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고통이 최종적으로 선을 위해 기능하는 것이라면, 아무리봐도 쓸데없는 고통은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죽음이 선을 초래하는가 악을 초래하는가? … 같은 질문 물어보기

엄청난 통증이 몰려올 경우, 죽음을 꿈꾸는 것은 당연합니다. 죽음보다 더한 고통. 그렇습니다.

 

 

이 장에서는 큰 딜레마를 다룰 생각입니다. 불의의 고통이 편만한 세상에서 나는 좋으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가.

하나님은 어찌 이러실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에 대한 분노와 불만, 원망과 실망, 저주와 살의에는 모두 하나님에 대한 배신이란 기저가 깔려 있습니다. 배신. 신념을 배반한다는 것. 그러나 우리는 한 가지 자문해야 합니다. 누구의 신념이란 말입니까? 그 신념이 진리라도 된단 말입니까?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고통은 안타깝게도 크던 작던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조정하는데 사용됩니다. 우리가 죽음 앞에 겸손해야 한다면 고통 앞에서도 그리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만드신 사랑의 질서를 지키면 현세의 고통이 사라진단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마저도 친히 십자가의 고통을 지셔야 했던 곳입니다. 주님의 열두 제자마저도 극심한 고통을 맞으며 세상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고통을 남을 위한 사랑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다릅니다. 사랑은 악으로 빚어진 고통마저도 아름답게 승화시킵니다.

여러분, 죽음이 선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어떤 면에서는 고통이 죽음보다 더 악합니다. 그야말로 의미없는 고통, 미치는 고통, 의인이 악인되는 고통. 우리가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는, 죽음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이란 권세 앞에 무력한 우리는 죽음에 대한 운명을 내면화하고 대신 자신이 원하는 죽음을 맞게 해 달라고 신과 타협합니다. 그렇기에 자신이 원하지 않는 죽음을 경험할 때 고통하는 것입니다. 변신론이 성공할 수 없는 이유는 자명합니다. (고통은 미지의 것이 아니로되 미지의 죽음보다 강력합니다. (통계 사용) 자살하는 이들을 보면 자명합니다. 이들이 신념이 약해서 자살합니까? 좋습니다. 그렇다면 그 고통은 누구의 책임입니까? 그것은 우리 모두의 책임입니다. 고통에 몰려 죽음에 이르는 이들을 한명도 남김없이 구할 수 없다면, 우리는 고통에게 영원히 패배하는 것입니다.)

믿으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여전히 어찌할 수 없는 것들로 인하여 우리는 고통을 받습니다. 태어남, 죽음, 자연, 지식의 부족, 미래, 과거, 통증, 타인 등등.

죽음은 무엇이 극복합니까. 완전한 자아의 소멸에 대한 두려움은 무엇으로 극복합니까. 믿음과 소망입니다. 자연은 지식으로 얼마간 극복할 수 있으나, 여전히 우리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며, 자연재해, 전염병, 유전병, 암, 바이러스, 질병,

재미 – 스릴, 고통을 이기며 느끼는 쾌감. 쾌락. 경쟁에서 이기는 짜릿한 기분. 유머는 조금 기분이 고조된 상황, 그래서 마음이 쉽게 상하지 않는 상태, 그 긴장 사이를 유연하게 파고들며 예의를 어길 때 발생합니다. 몸으로 웃기는 유머는 남에게 판단받거나 놀림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무릅쓰고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용서될 뿐더러 즐거운 이유는 우리가 즐길 준비가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감동 –

악이 편만하여 상식을 초월하는 고통을 겪곤 하는 우리와 선하시고 전능하시다는 하나님.

 

“왜 하나님은 나에게 이런 고통을?”

첫째, 당신에게만 그야말로 스스로 절멸할 것만 같은 그 고통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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