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번째 편지: 전개 2 – 예수는 부활했다 (4/4)

4. 예수는 부활했는가?

예수는 죽은 뒤에 무덤에 장사되었어.  그 날은 안식일 전날이었지. 날이 저물자 산헤드린 공회원이자 남몰래 예수의 제자이기도 했던 아리마대 요셉이란 사람이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요청했어. 빌라도는 백부장에게 예수가 죽었는지를 확인받은 뒤에 요셉에게 시체를 내주었지. 요셉은 세마포를 사서 예수의 몸을 묶어 내리고, 니고데모가 가져온 몰약과 알로에를 시체에 바른 뒤, 세마포로 예수의 몸을 싸서 무덤에 집어 넣었어. 무덤은 그가 자신을 위해 준비했던 곳이었어. 부자였던 그는 자신의 집 근처 동산에 있는 새 무덤에 예수의 시체를 안치했지.

그가 무덤에 안치된 후에 그를 모함해 잡아죽였던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빌라도와 함께 한자리에 모였어. 예수가 살아생전에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고 공언하던 것을 기억하고, 그의 무덤에 파숫꾼을 세워 무덤을 지키자고 결정해. 왜냐하면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훔쳐간 뒤 사람들에게 예수는 부활했다고 퍼뜨리고 다닐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야. 그래서 그들은 경비병을 데려가 무덤입구를 돌로 막은 뒤 굳게 지켰지.

안식일이 지났어. 다음 날 새벽에 예수를 사랑했던 여인들이 향품을 들고 무덤을 찾아왔어. 예수의 시체에 발라주려고 말이지. 그런데 그들은 무덤의 큰 돌이 굴려져 있고, 시체가 사라진 것을 발견해. 마태복음에는 이렇게 기록되어있어. 큰 지진이 나며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그 형상이 번개같고 그 옷은 눈같이 희다고 기록되어있어. 파숫꾼들은 천사를 무서워해 떨며 납작하게 엎드렸대. 그리고 천사는 여인들에게 예수가 부활했다고 이야기하며 갈릴리로 가라고 말하지. 두려움과 무서움, 동시에 기쁨에 휩싸인 그녀들은 동산을 내려가는 길에 예수를 만나지. 그리고 그들은 다른 제자들에게 이 소식을 전해.

자, 이것이 복음서가 전하는 예수의 죽음 후 사흘 간 벌어진 일의 모습이야. 그 후에는 예수가 여인들과 제자들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 앞에 자신의 부활한 모습을 나타내는 이야기를 전하지.

예수가 부활했다는 것은 우리 눈으로 확인할 수 없어. 왜냐하면 예수는 더이상 우리와 함께 지구상에 거하지 않거든. 성경에 따르면, 그는 승천했어. 성령이 각 사람에게 임할 것이기 때문에 자신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유익하다고 설명하면서 말이야. 그의 부활을 확인하는 방법은 역사적 기록을 살펴볼 수 밖에 없어. 다행히 기독교는 예수가 부활했다는 확신을 바탕으로 시작되었고, 그래서 그의 부활에 대한 수많은 사람들의 목격과 증언이 있어. 그 중에 예수의 죽음 이후 곧바로 기록된 문건들부터 살펴보자.

성경에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서신, 고린도전서가 있어. 아무도 바울이 고린도전서의 저자라는데 이의를 제기하지 않지. 그런데 그 고린도전서에 바울 자신이 부활한 예수를 만났다는 내용이 두 군데나 나와.

내가 사도가 아닙니까? 내가 우리 주 예수를 뵙지 못하였습니까? (9장 1절, 표준새번역)

내가 전해 받은 중요한 것을, 여러분에게 전해 드렸습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과, 무덤에 묻히셨다는 것과, 성경대로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나셨다는 것과, 게바에게 나타나시고 다음에 열두 제자에게 나타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리스도께서는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자매들에게 나타나셨는데, 그 가운데 더러는 세상을 떠났지만, 대다수는 지금도 살아 있습니다. 그 다음에 야고보에게 나타나시고, 그 다음에 모든 사도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맨 나중에 달이 차지 못하여 태어난 자와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15장 3~8절, 표준새번역)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예수가 죽었다는 것, 장사되어 무덤에 묻혔다는 것, 성경대로 사흘 후에 부활했다는 것과 그가 베드로와 자신을 비롯한 수백명의 사람에게 나타났다고 증언했어. 특별히 이 기록이 예수 부활의 강력한 증거가 될 수 있는 이유는, 이 편지가 왜곡되기에는 너무도 이른 시기에 기록되었다는 것이야. 전설이나 신화로 발전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기간 내에 기록된 글이지. 그리고 바울이라는 저자에 대한 신뢰도 한몫해. 유대 최고 랍비의 수제자였고, 그가 쓴 글 대부분이 신약성경으로 채택될 정도로 뛰어난 신학자요 그리스도인이었으니까.

위의 편지글 중 두번째 인용한 것은 특별해. 그것은 초대 교회 사람들에게 외워져 전승해 내려오는 신경(creed)이기 때문이야. 신경이란 종교적인 신조 혹은 믿음을 표현한 경문을 말해. 교리의 핵심을 담은 구문으로서 종교를 공유하는 이들 사이에 거듭하여 외워지는 것이지. 이 신경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은 지 불과 몇 년 안에 만들어져 사람들에게 전승되었다고 여겨져. 고린도전서 15장 3-8절이 신경으로 믿어지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대표적인 이유는, 사용된 언어와 형식이 매우 이른 시기의 문건이란 것을 드러내고, 쓰인 문체나 용어가 바울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야. 게다가 바울이 이 신경을 전해받았고, 또 고린도교인들에게 전해주었다고 3절에 직접 기록하고 있지. 이 신경은 예수의 죽음, 장사, 부활과 나타남을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어. 그런데 이 신경은 늦어도 A.D. 51년에 기록된 것으로 판단되며, 적잖은 학자들은 이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기록되었다고 생각해. 부활 사건 후 2년에서 8년 혹은 A.D. 32년에서 38년경에 바울이 다메섹이나 예루살렘 중 한 군데서 이 신경을 받았다고 보고 있어(13). 따라서 이것은 놀라울 정도로 이른 시기에 기록된 자료이며, 초창기 기독교의 순수한 증언이야. 특히나 예수의 삶과 죽음 모두를 목격한 사람들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기간에 기록된 증언인 만큼 신뢰도는 더 높지. 예수의 부활이 거짓이라면, 동시대의 사람들이 거짓된 신경을 그냥 놔둘리가 없거든. 그것을 믿고 헌신할 리는 더욱 만무하지.

예수의 출현에 대해서는 복음서에도 기록이 매우 많아.

  • 무덤있는 동산에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남 (요한복음 20장 10~18절)
  • 길가에서 여인들에게 나타남 (마태복음 28장 8~10절)
  • 시몬 베드로에게 나타남 (누가복음 24장 34절)
  • 엠마오 도상에서 글로바를 포함한 두 제자에게 나타남 (누가복음 24장 13~32절)
  • 열한 제자를 포함한 여러 사람들에게 나타남 (누가복음 24장 33~49절)
  • 도마를 제외한 열 사도와 여러 사람들 앞에 나타남 (요한복음 20장 19~23절)
  • 도마와 다른 사도들에게 나타남 (요한복음 20장 26~30절)
  • 디베랴 호숫가에서 일곱 제자들에게 나타남 (요한복음 21장 1~23절)
  • 제자들에게 나타남 (마태복음 28장 16~20절)
  • 승천하기 전에 감람산에서 사도들과 함께 함 (누가복음 24장 50~52절, 사도행전 1장 4~9절)

예수는 이렇듯 수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나 부활했음을 보여주었어. 사람들은 그와 함께 생선과 빵을 나눠먹기도 하고 대화를 나누었고 그의 몸을 만지기도 했어. 예수는 특히 그의 부활로 말미암아 새롭게 조명된 구약성경을 잘 해석해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었지. 제자들은 비로소 그들의 율법책에 나타난 메시아의 모든 이야기가 예수에 의해 완성된다는 것을 깨달았어.

예수가 부활 후에 나타났다는 증거는 시간이 흐르며 변질되고 왜곡된 기록이 아니야. 예수의 부활은 매우 초기부터 교회의 중심적 선포내용이었어. 바울은 그의 서신서에서 목격자들을 만나 그들의 증언을 직접 들으라고 까지 했지. 사도행전에는 예수의 부활에 대한 매우 초기의 확증들이 곳곳에 기록되어 있고, 복음서에는 예수를 직접 만난 사람들이 세세히 묘사되어 있어. 영국의 신학자 마이클 그린은 “예수의 출현은 고대의 어떤 사건보다도 잘 증명된다. …예수가 부활 후 다시 나타났다는 사실을 의심할 어떤 합리적 이유도 있을 수 없다”라고 결론지었어(14).

예수가 부활했음을 웅변해주는 그의 죽음 후 사건들을 살펴보자. A→B→C의 일련의 사건에서 C를 살펴보자구. A는 예수의 죽음이었어. 대체 무슨 일들이 일어났기에 우리는 B가 다름 아닌 예수의 부활이라고 주장하는걸까?

첫째, 제자들의 삶이 변화되었고, 그들이 죽기까지 예수의 부활을 증거했어. 예수가 체포되어 십자가에 못박히자 그의 제자들은 낙담했고 절망에 빠졌어. 그들은 예수가 메시아라고 굳게 믿은 이들이었어. 자신들이 모시는 스승이 곧 수천 년간 이어져 내려온 유대 예언이 가리키는 그 메시아라고 믿었어. 로마의 압제에서 동족을 구원하고 성전을 재건하여 옛 이스라엘의 영광을 재현할 영웅이라고 확신했지. 수많은 백성들도 예수를 환영했어. 예루살렘 입성을 앞둔 전날 밤, 그들은 예수가 왕이 될 때 굵직한 벼슬들을 한 자리씩 차지하리라는 달콤한 꿈도 꾸었어. 그러나 왠걸. 예수는 그들이 기대했던 메시아의 과업을 완수하기는 커녕 너무도 비참하게 최후를 맞이했어. 그뿐이 아니야. 그는 나무로 만들어진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어. 유대인들은 나무에 달려 죽은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라고 믿었어(신명기 22장 22~3절). 그들의 사랑하는 스승은 빛바랜 영광이라도 회복하기는 커녕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은 죄인이 되어 버린 것이었어. 절망한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졌어. 예수 운동은 중지되고 말았지.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다시 뭉쳤어. 그리고 예수의 부활에 대해 전하기 시작했지. 그들의 남은 생애를 모두 이 일에 헌신했어. 도무지 그들에게 금전적 이익이 있지도 않은 일인데 말이야. 그들은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았어. 자주 굶었고, 조롱당했고, 협박을 당했고, 맞았고, 감옥에 갇히기도 했어. 그러나 그들은 예수의 부활을 전파하는 일을 중단하지 않았어. 결국엔 대다수의 제자들이 십자가형을 비롯한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처형당했지. 이들이 무슨 사적인 보상과 이익을 노리고 이렇게 살았을까? 아니, 그렇지 않아. 역사적 기록은 강한 신념에 바탕을 둔 이들의 헌신적 삶을 증거하고 있어. 그렇다면 무엇 때문이었을까?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헌신적인 삶을 살게 하였을까? 그것은 그들이 직접 경험한 것 때문일거야.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것을 보고 느낀 것이지. 예루살렘에서 예수의 부활을 이야기하다가 대제사장들에게 잡힌 뒤,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하지 말라는 협박을 받은 베드로와 요한이 한 얘기를 들어보자.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 4장 20절, 표준새번역)

그들이 예수의 부활을 믿은 것은 현대인인 우리가 예수의 부활을 믿는 것과는 달라. 현대 기독교인이 믿는 것은 전해 들은 것이야.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이야기를 믿는 것이지. 내가 예수의 부활을 믿을 때는, 예수의 부활이 사실이라는 것을 그저 ‘믿을’ 뿐이야. 내 눈과 내 촉감으로 확인한 게 아니거든. 따라서 예수의 부활이 설령 거짓이었더라도 확실한 반증이 있을 수 없는 지금, 난 광신적인 믿음도 유지할 수 있어. 귀를 막고, 예수는 부활했어!하고 스스로에게 외치며 믿음을 고수할 수 있지. 그러나 예수의 제자들의 믿음은 달라. 그들은 예수의 죽음을 목격했고, 마찬가지로 예수의 부활을 확인할 수 있는 시대에 살았어. 한두 명도 아닌 여러 사람이 동시에 자신의 삶을 걸고 오감으로 진의 여부를 가릴 수 있는 특정한 사실에 헌신한다는 것. 그것은 곧 그 특정한 사실이 그들 눈 앞에서 일어났음을 뜻해. 게다가 실의에 빠진 채 자신들의 생업으로 돌아가 힘없이 살던 이들이 갑자기 열정적으로 돌변한 것은 무언가 특이한 일이 그들의 삶에 일어났음을 암시하지. 바로 예수의 부활 말이야.

둘째, 기독교 신앙에 회의적인 이들이 예수의 죽음 이후 완전히 바뀌어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어. 예수가 죽기 전에는 그를 믿지 않던 회의론자, 그의 주장을 부정하던 적대론자들이 있었어. 그러나 예수의 죽음 후에는 완전히 바뀌어서 열렬한 기독교 신자가 되었지. 여기에 대해서는 그들이 부활한 예수를 직접 만났다고 밖에는 설명할 수가 없어. 예수의 가족들부터 살펴보자.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의 동생인 야고보를 비롯한 가족들이 예수를 믿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에 맞섰다고 나와. 밖에서 활동 중인 그를 집 안에 붙잡아 두려고도 했지. 고대 유대교에서 랍비가 가족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것은 적잖이 난처한 일이었어. 따라서 복음서 저자가 예수에게 누가 되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가족의 믿지 않음을 허위로 기록할 리는 없어.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의 동생인 야고보는 예수의 죽음 뒤에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고 예수에 대한 신앙 때문에 돌에 맞아 죽게 돼. 왜 야고보의 삶이 변했을까? 바울은 부활한 예수가 그에게 나타났다고 설명해줘. 글쎄, 그것말고 야고보의 변화된 삶을 설명할 수 있을까?

예수를 믿은 뒤에 이름이 바울로 바뀐 사울을 살펴보자. 그는 바리새인이었기 때문에 유대인의 전통을 깨뜨리는 것이라면 모두 증오했어. 유대전통을 무시할 뿐더러 전혀 메시아같지 않은 인물을 주로 모시는 기독교는 매우 이단취급했지. 기독교인을 체포하고 학대하는 데 앞장섰던 인물이었어. 그런데 그는 예수의 죽음이 있은 뒤 얼마 뒤에 180도 달라진 사람이 되었어. 예수교를 학대하기는 커녕 본인이 기독교 신앙의 변호자가 되어 세계를 돌아다니며 기독교를 전파하고 교회를 세우는 사도가 되었지. 무엇이 그를 변화시켰을까? 그는 자신이 직접 쓴 갈라디아서에 회심의 배경을 설명해. 그는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보았고 예수가 자신을 택했다는 음성을 직접 들었다고 말해.

셋째, 적잖은 유대인들이 예수의 죽음 이후, 자신의 신념처럼 고수해 온 전통과 사회규범을 바꾸었어. 사람이 자신이 가장 소중하다고 여기는 신념을 바꾸기란 쉽지 않아. 특히 그 신념이 결부된 전통과 관습을 바꾼다는 것은 더더욱 어렵지. 카톨릭이 조선에 유입되었을 때, 조상을 무시하고 제사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크게 박해를 받았어. 새로운 지식과 관념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현대와 달리, 고대에는 전통이 크게 존중을 받았어. 그 전통을 굳게 지킴으로서 민족의 정체성을 보존하려고 했던 유대인의 경우에, 전통의 중요성이란 더할 나위가 없이 컸지. 이웃나라의 침략으로 말미암아 뿔뿔이 흩어져 수백 년이 넘도록 포로생활을 지속해 온 유대인이 한 민족으로 남아있을 수 있던 건 그들의 전통에 대한 강한 신념과 집착 덕분이었어. 곳곳에 유대 회당을 짓고 안식일마다 모여서 그들의 전통과 율법을 기념했지. 게다가 신으로부터 받았던 율법이요, 의식이요, 제도라 믿었기 때문에 그들은 이를 버릴 수 없었어. 그것을 버리면 저주를 받아 죽은 후 지옥에 가게 될 거라고 믿었거든. 그런데 이 유대인들이 그들의 전통을 갑자기 바꾸었어.

하나, 동물 희생 제사를 드리지 않게 됐어. 그들은 아브라함과 모세 시대 이후로 죄를 용서받기 위해 매년마다 동물 희생 제사를 드려왔어. 그러면 그들의 죄가 동물에게 전가되기 때문에, 제사를 드린 이는 하나님께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회복하게 된다는 거야. 그런데 나사렛 출신의 한 목수가 죽고 나서 그를 따르는 유대인들은 더 이상 희생 제사를 드리지 않게 됐어.

둘, 모세의 율법을 절대시하지 않게 되었어. 유대인들은 시내산에서 돌판에 새겨진 십계명을 비롯해 모세를 통해 받은 하나님의 계명을 절대적으로 중시했어. 유대교에게 있어서 모세의 계명이란 유대교를 이방인들과 이방종교들로부터 구분짓는 절대적 강령이었지. 그런데 예수의 죽음 이후 그를 따르던 유대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자신들의 공동체 일원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어.

셋, 안식일을 지키지 않기 시작했어. 유대인들은 매주 토요일이 되면 종교적 행위 외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음으로서 안식일을 철저히 지켰어. 그런데 예수의 죽음 이후, 그를 따르는 이들이 1500년 간이나 이어져 내려온 전통을 바꾸었어. 그리스도인들은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어. 왜냐하면 예수가 부활한 날이 일요일이었거든.

넷, 유일신론을 버리고 삼위일체론을 주장하기 시작했어. 유대인들은 그야말로 단 한 분이신 하나님을 믿었어. 그런데 예수의 죽음 이후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고 성령이 하나라고 주장했어. 이것은 그들이 믿던 것과 근본적으로 다른 거야. 하나님인 동시에 그가 사람일 수 있다는 것은 그들에게는 생소할 뿐더러 매우 이단적인 생각이지. 대제사장 가야바가 예수를 신성모독죄로 기소했던 이유는 예수 스스로 자신의 신성을 이야기했기 때문이었어. 사람이란 것이 눈에 빤히 보이는 데 자신이 감히 신이라니! 용납할 수 없는 발언이었어.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지. 그러나 예수를 따르던 유대인들은 기독교가 시작된 지 채 10년이 지나기도 전에 예수를 하나님으로 경배하기 시작했어.

다섯, 유대인들이 수천 년간 믿어왔던 메시아관을 버리고 새로운 종류의 메시아를 주장하기 시작했어.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신에 의해 선출된 선지자 혹은 왕에 의해 인도되던 민족이었어. 그들의 선지자는 군대를 이끌어 적을 쳐부수었어. 고통받는 동족을 구출하고 나라를 재건했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성전을 지었어. 그들의 역사는 이의 반복이었어. 침략받고 고통받을 때, 회개하고 구원을 부르짖는 그들을 위해, 하나님이 선지자나 왕을 보내어 적을 부수고 그들을 구원해내었지. 성전이 재건되고 율법을 지키는 전통이 회복되었어. 유대인들은 당연히 오실 메시아도 같은 임무를 수행해 줄 것으로 기대했어. 로마 군대를 쳐부수고, 이스라엘의 영광을 회복해주는 왕 같은 메시아,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메시아를 기대했지. 그런데 그런 메시아와는 거리가 멀었던 예수의 허무한 죽음 뒤에, 그를 따르던 유대인들은 새로운 메시아를 말하기 시작했어. 온 세상의 죄를 인하여 고통 받고 죽은 메시아를 말하기 시작했지.

한두 명도 아닌, 최소한 만 명이 넘는 유대인 공동체가 수 세기동안 자신들을 지탱해 오던 다섯 가지 핵심 제도를 포기했어(15). 그것도 예수의 죽음 후 5주가 채 지나지 않아서 말이야.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어떤 B가 A에서 출발해 C까지 이어지는 과정을 이성적으로 설명해줄 수 있을까? 답은 간단해. 그 이유는 그 유대인들이 부활한 예수를 만났기 때문이야.

넷째, 기독교가 시작되면서 새로운 의식과 관습이 생겨났어. 바로 성찬과 세례야. 성찬은 성도들이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먹는 의식으로서 바로 예수의 죽음을 기념해.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주며 자신의 살이요 피라고 묘사했지. 그는 자신의 살을 먹고 자신의 피를 마시는 자라야 영생을 얻었고 마지막 날에 부활한다고 이야기했어.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죽음이 큰 과업을 성취하기 위한 불가피한 일이요 영광스런 일이라고 여겼어. 그래서 그들은 예수의 죽음을 기억하는 의식을 시작했어. 빵과 포도주를 먹으며 예수의 희생을 기념하는 것이지. 종교의 창시자인 예수의 탄생이나 부활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의 죽음을 기념하는 희한한 의식이 생겨났어.

세례는 어떨까? 세례는 기독교 신자가 되었음을 고백하는 성도가 물 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의식이야. 물 속에 들어가는 것은 예수의 죽음을 기념하고, 물 밖으로 나오는 것은 예수의 부활을 기념하는 뜻을 담고 있어. 세례의식은 원래 유대 전통에서 비롯된 거야. 이방인들이 모세의 율법을 따르고자 했을 때,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의 권위로 이방인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어.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의 권위가 아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지.

이 두가지 예식은 예수의 부활이 없었다면 탄생하기 힘든 것들이야. 성찬은 예수의 거룩한 죽음을 기념하는 것으로서 그의 부활이 없었다면 생겨날 수 없는 의식이지. 예수를 하나님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만 받는 의식인 세례 역시 죽음과 부활의 모티브를 담고 있다는 면에서 예수의 부활 없이 발생원인을 설명하기 어렵지. 게다가 두 예식 모두 기독교가 가진 독특한 것으로서 신비종교나 다른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기 힘들어. 그때까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신을 믿는 신비종교가 없었을 뿐더러, 두 예식이 거행되었던 것이 너무 이른 시기라 다른 종교나 문화의 영향을 받았기가 힘들거든(16).

다섯째, 예수의 죽음 이후 교회가 출현했어. 교회는 예수의 죽음 이후 급작스럽게 생겨나 크게 번성하기 시작했고, 채 20년이 지나지 않아 로마 황실에까지 들어갔어. 나중에는 수많은 경쟁 사상들을 물리치고 로마의 국교가 되기까지 이르렀지. 그래, 종교가 창시되어 빠른 속도로 성장할 수 있어. 그러나 예수의 죽음 이후 갑작스런 기독교의 출현과 공동체의 급속한 번성은 타당한 역사적 이유가 있기 마련이야. 앞의 네 가지 사건들과 더불어 교회의 출현은 예수의 부활로 인해 가장 잘 설명되지. 다른 어떤 설명보다도 역사적 개연성이 압도적으로 높다는 말이야.

예수는 두말할 나위없이 실존한 인물이었어. 그리고 그의 전기에 대해 기록한 성경은 어느 고대 기록보다도 사본도 많고, 정확한 목격담을 담은 글이야. 매우 초기에 기록된 것으로서 전설이나 신화로 변질될 가능성도 없는 것이지. 예수는 죽고, 무덤에 장사되었고, 사람들 앞에 나타났어. 그의 죽음 이후 사람들에게 큰 변화가 일어났어. 절망한 제자들이 갑자기 강한 신념에 목숨을 바쳐 헌신하기 시작했어. 회의론자들이 기독교 신자가 되었어. 유대인들이 굳게 지키던 전통과 율법을 포기하고 새로운 의식과 교리에 충실하기 시작했어. 교회가 만들어졌고, 수많은 이들이 예수의 부활을 목격했음을 증거하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기 시작했어. 예수의 죽음 뒤에 갑작스레 발생한 이 모든 역사적 사건들은 하나의 사건을 가리켜. 바로 예수의 부활 말이야. 기적을 배제하지 않고, 역사적 탐구를 수행할 때 확신을 가지고 결론을 내릴 수 있어. 예수란 사람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말이야.

(13) 예수는 역사다, 리 스트로벨 지음, 304쪽

(14) 예수는 역사다, 리 스트로벨 지음, 349쪽

(15) 예수는 역사다, 리 스트로벨 지음, 333쪽

(16) 예수는 역사다, 리 스트로벨 지음, 3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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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번째 편지: 전개 2 – 예수는 부활했다 (3/4)

3. 예수는 과연 죽었는가?

예수의 부활은 기독교 탄생의 기원이나 마찬가지야. 부활을 믿었던 유대인들이지만, 그들에게 부활이란 하나님이 새 하늘과 새 땅을 회복하는 저 먼 미래에나 일어날 일이지, 자신들의 삶 가운데서 일어나는 일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 그런데 그리스도인이라 불렸던 예수의 추종자들은 그의 부활을 증거하며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전파하기 시작했지. 그래서 말야, 난 예수는 누구였고, 예수는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를 이야기하기 전에 그의 부활부터 이야기하고 싶다. 역사의 개연성을 따지는 A→B→C의 과정에서 B가 되는 사건. 부활 말이야. 그만큼 부활은 중요하거든. 그렇다면 부활 전의 사건 A는 뭐였을까? 그래, 예수가 죽었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야 부활이지, 죽은 척 했다가 일어나거나 가사상태에 빠졌다가 일어나는 것은 부활이 아니지. 우리가 가진 역사적 자료를 바탕으로 예수가 진짜 죽었는지 의학적으로 한번 따져보자. 십자가형을 당했던 예수가 정말 목숨이 끊어졌는지 말이야.

자, 예수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예수는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열두 제자들과 마지막 저녁식사를 먹었어. 소위 최후의 만찬이라고 불렸던 저녁이었지. 그 저녁을 먹은 뒤 그는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갔어. 그리고 밤새도록 기도했지. 그는 기도하면서 다음날 닥쳐올 일들을 예상했어. 겪어야 할 고통이 어떤 고통인지 알았던 그는 심리적으로 큰 스트레스를 받았지. 오죽 힘들었으면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를 특별히 곁에 두고 기도했어. 천사마저 나타나 그를 도왔다고 누가복음에 적혀있어. 같은 복음서에는 예수가 힘써 기도할 때에 땀이 핏방울처럼 떨어졌다고 묘사되어있지.

자, 여기서 ‘혈한증(hematidrosis)’에 대해 알아보자. 예수의 땀이 핏방울처럼 점성이 커져 굵게 떨어졌다는 것은, 복음서 기자의 과장된 상상력에 기반한 묘사가 아니래. 흔히 일어나는 일은 아니지만, 정신적 스트레스를 아주 심하게 받을 때 일어나는 일이래. 과정은 다음과 같아. 사람이 심하게 고민하면 몸에서 분비되는 특정한 화학성분이 땀샘에 있는 모세관을 파괴해. 그 결과로 땀샘에 소량의 피가 들어오게 되고, 땀을 흘릴 때 피가 섞여서 나오게 돼. 혈한증이 일어나면 피부가 매우 약해져. 그래서 다음날 예수가 로마 군인들에게 채찍질을 당했을 때 피부가 극도로 민감해져 있었을 거야(10).

예수는 기도를 마치고 로마군인들에게 체포되었지. 그의 제자 중 하나인 가룟 유다의 배신을 통해서 말이야. 그는 유대인 제사장들에게 기소된 후, 로마군인들에게 태형을 당했어. 채찍질 말이야. 로마의 태형은 무시무시하게 잔인한 형벌이었다고 해. 채찍은 39개 이상의 땋은 가죽 가닥으로 이루어졌고, 그 안에는 쇠구슬이나 날카로운 뼛조각 등이 박혀있었어. 그래서 채찍질을 하면 살이 심하게 찢겨 나갔어. 특히 등이 심하게 찢겨져 나가 어떤 경우에는 척추의 일부가 드러나기까지 했다고 해. 로마의 태형을 연구했던 한 의사는 이렇게 말했다는군.

‘태형이 계속되면, 피부 밑에 있는 골격 근육까지 찢겨지게 되고, 찢겨진 살은 피범벅이 된 채로 리본처럼 덜렁덜렁 매달려 있게 된다’ (10)

많은 사람들은 십자가에 달리기도 전에 태형만 당하고서도 죽었대. 미국 메릴랜드 주 베데스다에 있는 국립보건원 소속 전문의 메드럴(Alexander Metherell) 박사에 의하면, 태형에 의해 죽지는 않더라도 희생자는 극도의 고통을 느끼게 되고 소위 저혈량성 쇼크(hypovolemic shock)에 빠진다는군(11). 저혈량성 쇼크란 어떤 사람이 많은 피를 흘리고 나서 겪는 상태를 의미해. 네 가지 증상을 수반하는데 첫 번째, 심장이 더 이상 피를 퍼 올리지 않아. 두번 째로 혈압이 떨어지고 희생자는 정신이 몽롱해지거나 기절하게 되지. 세 번째로, 신장은 남아 있는 피의 양을 유지하기 위해서 소변을 만드는 일을 중단해. 마지막 네 번째로, 몸은 흘린 피를 보충하기 위해서 수분을 요구하기 때문에 매우 목이 마르게 되지.

예수는 태형 이후에 저혈량성 쇼크에 빠졌어. 복음서에 보면, 예수는 십자가를 지고 갈보리 언덕으로 비틀거리면서 올라갔지. 쇼크 상태였던 그는 결국 넘어졌고, 로마 군인들은 시몬이라는 사람에게 십자가를 대신 지게 했지. 십자가에 달렸던 그는 “내가 목마르다”하고 말했고, 사람들이 그에게 신 포도주를 한 모금 주었지. 예수는 끔찍한 채찍질을 당했기 때문에 손과 발이 못에 박히기 전에 이미 위독한 상태에 빠져 있었어(11).

거기다가 예수의 손목과 발에는 5~7인치 정도 되는 대못이 박혔어. 이 곳은 중추신경이 지나가는 곳이기 때문에, 못이 그 곳을 내리칠 경우 신경은 완전히 파괴되지. 우리 팔꿈치나 무릎이 어디를 부딪힐 때 징~하고 저린 느낌 알지? 그걸 느껴주는 신경을 척골 신경이라고 하는데, 부딪칠 경우 매우 고통스러워. 예수가 경험한 고통이란 그 신경을 펜치로 잡아 비틀어 뭉개는 고통에 해당한다고 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래서 십자가형의 고통을 표현하기 위해 excruciating(십자가로부터, 고문하다)이란 단어조차 생겨나게 한, 극심한 고통이지(12).

예수는 그 상태로 십자가에 매달렸어.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몸은 몸무게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게 되는데, 무엇보다도 먼저 팔이 늘어난다고 해. 약 6인치 정도 늘어난다는군. 그리고 양쪽 어깨가 탈골이 돼. 참고로, 이것은 수백 년 전에 그에 대해 예언한 구약성경의 시편 22편의 내용,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라는 예언의 성취라고 할 수 있지.

예수의 죽음은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질식사야. 질식하게 되는 이유를 살펴보자. 먼저 횡경막에 연결된 근육이 충격을 받아 가슴의 상태가 들숨 상태로 돼. 호흡을 위해서 숨을 내쉬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십자가 위에서 발을 세워야 해. 그래야 횡경막을 당기는 근육을 잠시 이완시켜 숨을 내쉴 수 있어. 그러나 그 과정에서 발에 박혀 있는 못이 발을 깊이 찌르게 되지. 결국 못 구멍은 벌어지고 못이 발의 뼈와 닿게 되지. 간신히 숨을 내쉰 후에는, 세웠던 발을 내리고서 잠시 쉴 수 있게 돼. 그리고서는 다시 숨을 들이마시게 되지. 그러면 또 다시 숨을 내쉬기 위해 발을 세워야 하고, 완전히 지칠 때까지 예수는 이 과정을 반복하게 돼. 결국 지친 희생자는 발을 세울 수 없게 되고, 더 이상 숨을 쉴 수 없어 질식해 죽게 되는 거지(12).

호흡 수가 점점 줄어들기 시작하면 희생자는 소위 호흡 산독증에 빠지게 돼. 혈액 속의 이산화탄소가 탄산으로 분해되면서 혈액의 산성이 증가하는 증상이야. 심장 박동이 불규칙적으로 뛰게 돼. 아마도 예수는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뛰기 시작했을 때 죽음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알았을거야. 그래서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말할 수 있었을거야. 그리고 심장이 정지되면서 운명했지(12).

하나 특기할 만한 사실은 예수가 죽기 전 겪었던 저혈량성 쇼크가 심낭삼출을 유발했을 거란 거야. 저혈량성 쇼크는 그의 심장 박동 수를 빠르게 만들고, 이는 심장 주위에 있는 막 조직에 액체를 고이게 만들어. 이를 심낭삼출이라고 하지. 그리고 폐 주위에도 액체가 고이는데 이것은 늑막삼출이라고 불리지.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로마군인들이 와서 예수의 죽음을 확인할 때, 그의 오른쪽 옆구리를 창으로 찔러서 확인한 사건 때문이야. 확실하지는 않지만 성경의 묘사를 볼 때 창이 찌른 곳은 예수의 오른쪽 옆구리, 갈비뼈 사이였을 거야. 창은 오른쪽 폐와 심장을 꿰뚫었어. 그래서 창을 뺄 때 물처럼 보이는 액체-심낭삼출과 늑막삼출-가 나왔어. 요한이 복음서에서 증거하는 것처럼, 물처럼 투명한 액체가 흘러 나온 다음에 많은 양의 피가 쏟아져 나왔을 거야(12).

예수의 죽음은 지금까지의 의학적 증거들로도 충분해. 그런데 로마군인들이 그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수행한 일들을 또 살펴보자. 그 당시 안식일과 유월절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 지도자들은 해지기 전, 죄인들의 형집행을 마무리하고 싶었어. 안식일에는 일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시체를 치우는 등의 일이 곤란했기 때문이지. 로마 군인들은 소지한 단검의 손잡이를 이용해서 십자가에 매달린 희생자들의 다리뼈 아랫부분을 쳐 부러뜨렸어. 그러면 희생자는 발을 들어올릴 수가 없기 때문에 숨을 쉴 수가 없게 돼. 그래서 몇 분 안에 호흡산독증으로 죽게 되지. 신약 성경에는 예수는 다리가 꺾이지 않았다고 나와. 군인들은 예수가 이미 죽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야. 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창으로 예수의 심장을 찔렀고, 물과 피를 확인함으로써 그의 죽음을 확인했지(12).

그 군인들은 의사는 아니었어. 그러나 사람을 죽이는 일에는 그야말로 전문가였어. 사람을 죽이는 것이 그들의 직업이었고, 그들은 어렵지 않게 사람이 죽었는지를 판단할 수 있었어. 게다가 혹시라도 죄수가 탈출하면 그를 책임지고 있던 군인들은 대신 목숨을 내놓아야 했어. 따라서 십자가 위에서 희생자를 끌어내릴 때 그가 죽었는지를 꼭 확인했지. 예수는 죽은 체 한 것도 기절한 것도 아니었어. 그는 분명히 십자가 위에서 죽었어. 그것도 회복이 영 불가능한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말이야.

못이 박혀서 구멍이 뚫린 발로는 걸을 수도 없어. 탈골되어 버린 팔과 못구멍이 뚫린 손은 사용할 수 없어. 심장에 창구멍이 뚫린 상태로 기적적으로 예수가 살아났다고 하자. 그렇지만 그토록 애처로운 모습의 예수를 다시 만난 후에, 그가 죽음을 이긴 생명의 주님이라고 선포할 제자는 아무도 없을 거야. 그의 모습을 보고, 자신도 예수처럼 부활할 것이라고 믿으면서 목숨을 걸고 교회를 세우고 기독교를 전파하는 것은 정말이지 터무니없는 생각이지.

예수는 죽었어. 사람 죽이는 전문가들에게 확증까지 받았지. 그럼 이제 그의 죽음 이후 사건으로 옮겨가보자. 그토록 애처롭고 처참하게 죽은 이를 생명의 주라 고백하는 이들이 일어났는지 말이야.

(10) 예수는 역사다, 리 스트로벨 지음, 256-7쪽 (혈한증)

(11) 예수는 역사다, 리 스트로벨 지음, 258쪽

(12) 예수는 역사다, 리 스트로벨 지음, 26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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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번째 편지: 전개 2 – 예수는 부활했다 (2/4)

2. 성경에 나온 예수의 이야기는 신뢰할 만한가?

우리 가운데서 일어난 여러가지 일에 대하여 차례대로 이야기를 엮어 내려고, 손을 댄 사람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 이야기를, 처음부터 그 일의 목격자요 말씀의 전파자가 된 이들이 우리에게 전해 준 대로 엮어 냈습니다. 그런데 존귀하신 데오빌로님, 나도 모든 것을 처음부터 정확하게 조사하여 보았으므로, 귀하께 이 이야기를 차례대로 엮어 드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는, 이미 배우신 일들이 확실하다는 것을 귀하께서 아시게 하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장 1~4절, 표준새번역)

누가복음 초입에 저자는, 자신이 적은 복음서가 목격자의 증언을 그대로 담고 있다고 밝혔어. 직접 처음부터 정확하게 조사하여 보았다고 했지. 마찬가지로, 성경 중 사복음서는 예수를 직접 보고 경험한 이들에 의한 증언으로 이루어졌고, 또 그들에 의해 씌여졌다고 기록되어 있어. 예컨대, 마태복음서의 저자 마태는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명이었고, 마가복음서의 저자 마가는 베드로의 제자였어. 그리고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는 ‘사도 바울의 사랑하는 의사’인 누가였지. 그러나 이것이 과연 사실일까? 혹시 동명이인은 아닐까? 마태, 마가, 누가 모두 진실로 예수와 가까웠던 그들이 맞을까? 이건 사실 100% 확증하지는 못한다고 해. 엄밀하게 말하면 사복음서 모두 작자미상이지. 역사적 탐구의 한계가 있는 부분이야. 그렇지만 초대교회에 널리 퍼져 있는 증언에 따르면 그렇게 추정할 만한 개연성이 매우 높다고 해. 특별히 180년 경 프랑스 주교 이레니우스에 의해 씌인 글을 보자.

마태는 히브리 언어로 자신의 복음서를 출간했고 그 때 베드로와 바울은 로마에서 그 복음서를 설교하면서 교회를 세우고 있었다. 그들이 로마를 떠난 후에 베드로의 제자요 통역이었던 마가는 직접 베드로의 설교 내용을 우리에게 넘겨 주었다. 바울의 제자인 누가는 자기 선생이 설교한 복음서를 책에 기록했다. 그리고 주의 가슴에 기댄 적이 있는 주의 제자 요한은 아시아의 에베소에서 사는 동안 직접 복음서를 썼다(5).

역사적 기록을 어느 이상 신뢰한다면, 사복음서는 분명 예수의 목격자들에 의해 저술되었어. 다른 역사학자들의 비판은 곧 이 기록들이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왜곡되거나 거짓 기술되었다는 것이야. 그러나 굳이 역사적 기록에 크게 의존하지 않더라도 그토록 중요한 복음서가 마태, 마가, 누가 등에 의해 씌였다는 점은 오히려 그 기록의 진정성을 반증해. 기독교가 진짜라고 그토록 주장하길 원하면 권위 넘치는 베드로나 빌립, 야고보, 마리아 등에 의해서 복음서가 씌였을 텐데 그렇지 않았지. 오히려 경멸의 대상이었던 세리 출신의 마태, 예수의 제자들의 제자에 불과한 마가와 누가에 의해 이 소중한 예수의 전기들이 기록되었어. 그렇다면, 복음서의 기록에 있어 과장된 거짓이 있기 힘들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지.

한편, 복음서가 목격자의 증언을 담고 있다 하더라도 늦게 기록되었다면 그만큼 증언의 신뢰도는 감소할거야. 사람의 기억이란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지거나 왜곡되기 마련이니까. 그렇다면 복음서는 예수가 죽은 뒤 얼마 후에 기록되었을까? 먼저, 기독교의 신적인 요소를 인정하지 않는 자유주의 학자들이 받아들이는 연대는 다음과 같아. 마가복음은 70년대, 마태와 누가복음은 80년대, 그리고 요한복음은 90년대야(6). 이 연대만 하더라도 이미 상당한 중요성이 있어. 왜냐하면 이 시기는 예수의 일생을 지켜본 많은 목격자들이 생존해 있던 시대야. 예수를 따르는 이들과 예수에 적대적인 이들이 모두 공존했던 시기라는 것이지. 다시 말해, 예수에 관해 잘못된 가르침이 있었다면 즉시 고쳐졌을 수도 있는 시기라는 거야.

언뜻 보면, 예수가 죽은 뒤 40~60년 이후에 적힌 글들이므로 복음서 기록시기가 다소 늦은 듯이 보일 거야. 그러나 다른 고대서적들과 비교하면 어떨까? 역사학자들에게 일반적으로 신뢰받는 알렉산더 대왕의 전기를 보자. 가장 초기의 전기 두 편은 1세기경 아리안과 플루타크에 의해 쓰여졌어. 그 이후의 글들은 전설적인 면들이 가미되어 학자들에게 신뢰를 받지 못하지. 그런데 이 글들이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지 몇 년 후에나 쓰여진 지 알아? 무려 400년 이후에나 쓰여졌대. 복음서에 적힌 예수의 전기는 그야말로 알렉산더 대왕의 것에 비하면 정말 일찍 기록된 셈이야. 그런데 그 뿐이 아니야. 사실 복음서는 몇 가지 역사적 기록을 인정하기만 하면 훨씬 일찍 기록되었다고 해. 누가가 기록한 것이 분명한 사도행전과 누가복음을 서로 비교해 보자. 사도행전은 사도 바울이 죽기 전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62년 전에 기록된 것이 틀림없고, 이것은 누가복음의 두 번째 부분이기 때문에 실제 누가복음은 62년 이전에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 그렇다면 마가복음은 더 이전에 기록된 것이야. 왜냐하면 누가복음은 분명 마가복음을 참조한 것으로 학자들은 확신하거든. 각각의 복음서 기록에 1년쯤 걸렸다고 할당하면 마가복음은 대략 60년경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돼. 다시 말해, 예수가 죽은 뒤 30년이 채 안되어 그의 전기가 기록된 것이지(7).

자, 그럼 또다른 의문점을 가질 수 있어.

“예수에 대한 기록이 꽤 이르게 기록되었다고 치자. 그래서 기록의 정확도가 크게 감소되지 않았다고 하자. 그렇지만 충분한 양의 기록이 고고학적으로 발굴되었는가? 원본은 남아있는가? 그리고 그 원본에 담긴 기록은 신뢰할 만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전해졌는가?”

안타깝게도 신약성경의 원본은 발견되지 않았어. 다만 다양한 사본들이 남아있을 뿐이지. 그렇다면 대체 신약성경은 필사본이 몇 권이나 발굴되었을까? 원본이 없더라도 필사본이 충분히 많다면 원본의 내용을 조합하여 복구할 수 있을거야. 수가 많을수록, 특히 서로 다른 지역에서 다양한 시기에 기록되었을수록 사본들을 서로 비교하여 원래의 문서가 어떤 내용을 갖추고 있었는지 조합해 낼 수 있겠지.

신약성경의 장점은 또한 여기에 있어. 다른 고대문서에 비해 전례가 없을 정도로 사본이 많이 남아 있어. 무려 5,000개 이상의 희랍어(원어) 목록을 포함해 총 24,000여 개의 사본이 존재해. 적힌 시기도 다양하고, 언어도 다양해. 희랍어, 라틴어, 시리아어, 콥트어, 아르메니아어, 고트어 등으로도 적혔어. 가장 초기의 신약성경 사본은 요한복음 18장부터의 내용을 포함하는 것으로서 100-150년 경에 씌여졌다고 추정돼(8). 이집트 나일강변의 어느 마을 근처에서 발견되었다는군.

사본의 양 역시 비슷한 연대의 다른 고대문서와 비교해 보자. 116년경 역사가 타키투스에 의해 쓰인 «로마제국의 역사(Annals of Imperial Rome)»의 경우, 사본은 오늘날 단 하나밖에 없는데 그것은 850년경에 복사되었어. 1세기의 역사가 요세푸스가 쓴 «유대인의 전쟁(The Jewish War)»은 희랍어 사본이 아홉 개가 있고, 10~12세기 사이에 복사되었지. 신약성경 다음으로 사본이 많다는 호머의 «일리아드»를 보자. 오늘날 그 책의 희랍어 사본은 643개가 있어. 원본이 B. C. 800년 경에 쓰여진 것을 감안하면, A. D. 2세기와 3세기에 거쳐 쓰인 사본들은 원본에 비해 무척 나중에 쓰여진 것들이지(8).

원본과 사본이 쓰인 간격은 대략 700~1,000년. 그리고 사본의 수는 650여 개 혹은 몇 개. 그에 반해 신약성경은 원본으로부터 100년이 채 안 된 사본이 존재하고, 그 수도 다양한 시기와 지역에 걸쳐 수만권이나 존재하지. 그래서 세계의 저명한 학자들도 다음과 같이 말하곤 해.

세계 고대 문학 중에서 신약 성경만큼이나 본문에 대한 증거를 풍부하게 확보한 책은 없다. -F. F. 브루스, «신약 성경, 믿을 만한가?(The New Testament: Are They Reliable)»의 저자

책의 기록 시기와 가장 초기의 사본의 기록 시기 사이의 시간 간격이 신약 성경만큼 짧은 경우는 없다 -프레데릭 케년 경, «희랍어 파피루스 사본의 고문서학(The Palaeograpy of Greek Papyri)»의 저자

성경이 쓰여질 당시만큼이나 견고하게 전해 내려왔다는데 의심을 품을 마지막 근거가 이제는 완전히 제거되었다 -Bruce Metzger, 프린스턴 신학교 명예교수(9)

성경에 나온 예수의 전기는 신뢰할 수 있어. 저자들은 역사를 보존할 의도를 가지고 복음서를 기록했고, 글을 기록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어. 설명하기 곤란한 자료도 기꺼이 포함시킬 정도로 정직했고, 편견에 의한 왜곡 보도를 하지도 않았어. 현대의 신약성경은 본문 간의 일치도가 99.5퍼센트에 이를 정도로 서로 차이가 없고, 기독교 핵심교리에 대해서는 전혀 불일치가 존재하지 않아. 게다가 역사적 세부사항에 대한 묘사의 미세한 차이는 오히려 다양한 저자가 다양한 각도에서 대상을 관찰하고 기록했음을 웅변하는 근거가 되지.

(5) 예수는 역사다, 리 스트로벨 지음, 31쪽

(6) 예수는 역사다, 리 스트로벨 지음, 42쪽

(7) 예수는 역사다, 리 스트로벨 지음, 43-44쪽

(8) 예수는 역사다, 리 스트로벨 지음, 78-79쪽

(9) 예수는 역사다, 리 스트로벨 지음, 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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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구름이 어두컴컴하게 하늘을 메운 날
고통이 찾아와 마음 문을 두드릴 때면
나 반가이
문을 열고 미소로 그를 맞아들이리

다른 데로 가지 않고
내 삶에 찾아온 그를
더없는 감사로 환영하리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감되었던 어떤 이는 이렇게 기도했다네
자신의 고난과 죽음으로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스런 종말로부터 구원받게 해달라고

우리 주님의 삶이 그러했지 아니한가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네
부모의 산고와 양육의 인고 끝에 우리는 성장했고,
신앙선배들의 순교적 삶 덕분에 우리는 주를 알았네

삶이란 기쁨과 행복으로 점철되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란 걸 알았네
우리 작은 삶 하나하나에도 채워야할 시련의 몫이 있다네
그 몫을 채워가며 우리는 비로소 삶에 충실한 법을 배워간다네
과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게 말이야

고통은 신께서 허락한 성만찬일세
예수의 살이요 피일세
우리 기꺼이 먹도록 하세나

믿음, 사랑, 소망 이 영원한 것들을 기리며
찾아온 손님, 고통과 더불어 와인잔을 부딪히세나
니체가 그랬네
나를 죽이지 못한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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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수용소에서’ 발췌

강제수용소에 있었던 우리들은 수용소에도 막사를 지나가면서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거나 마지막 남은 빵을 나누어 주었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 물론 그런 사람이 아주 극소수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만 가지고도 다음과 같은 진리가 옳다는 것을 입증하기에 충분하다. 그 진리란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갈 수 있어도 단 한 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수용소에서는 항상 선택을 해야 했다. 매일같이, 매시간마다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이 찾아왔다. 그 결정이란 당신으로부터 당신의 자아와 내적인 자유를 빼앗아가겠다고 위협하는 저 부당한 권력에 복종할 것인가 아니면 말 것인가를 판가름하는 것이었다. 그 결정은 당신이 보통 수감자와 같은 사람이 되기 위해 자유와 존엄성을 포기하고 환경의 노리개가 되느냐 마느냐를 판가름하는 결정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강제수용소 수감자들이 보이는 심리적 반응은 어떤 물리적, 사회적 조건에 대한 단순한 표현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수면부족과 식량부족 그리고 다양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는 그런 환경이 수감자를 어떤 방식으로 행동하도록 유도할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최종적으로 분석을 해보면 그 수감자가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은 그 개긴의 내적인 선택의 결과이지 수용소라는 환경의 영향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근본적으로는 어떤 사람이라도, 심지어는 그렇게 척박한 환경에 있는 사람도 자기 자신이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이다. 강제수용소에서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가 세상에서 한 가지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 고통이 가치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수용소에는 남을 위해 희생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과 친해진 후, 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이 말을 자주 머리 속에 떠올렸다. 수용소에서 그들이 했던 행동, 그들이 겪었던 시련과 죽음은 하나의 사실, 즉 마지막 남은 내면의 자유는 결코 빼앗을 수 없다는 사실을 증언해 주고 있다. 그들의 시련은 가치 있는 것이었고, 그들이 고통을 참고 견뎌낸 것은 순수한 내적 성취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삶을 의미 있고 목적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빼앗기지 않는 영혼의 자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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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ppy B-day cards from SPECIAL friends (Rakesh)

Hey Bro!

It might be a bit late when you receive all these letters. But in any case we all WISH YOU A HAPPY BIRTHDAY! We might be miles apart from each other, but the sweet memories of our time with you here will never fade away. As we all await your coming back with full recovery, these letters are a reminder how much we care for you. So spend your B’day week filled with loving words from your friends in US. We all miss you BHa! Take care bro.

With all the blessings from God,

On behalf of Your Loving Friends,

Rake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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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ppy B-day cards from SPECIAL friends (Pete)

Dear Byunghang,

Happy Birthday Byunghang. I drove up to 519 last week, and behold, there was your car under it’s cover… reminding me that you will come back. What a cool thought. Your mom’s watercolor is on the wall, too, also triggering good memories of deep conversations. Who else do I know who reads NT Wright and Viktor Frankl in Korean and English? Who else could properly introduce us to Korean BBQ, induce me to read The Three Kingdoms, and watch Red Cliff for 5 hours? A birthday is supposed to be a time when you get gifts, but I am thinking of all the gifts you have given me. The best gift is your honesty and character as you’ve shared the challenge of life with me. So have a *blessed* day and a blessed year ahead!

Your older brother in Christ,

Pe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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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ppy B-day cards from SPECIAL friends (Sandy)

June 2010

Dear Byunghang,

Happy Birthday! We miss you & wanted to let you know we were thinking of you. 519 definitely isn’t the same without you.

Your birthday is a great opportunity to reflect on the blessing you have been to each of us. I admire the strength & perseverance you have demonstrated over the last few years and the vulnerability with which you have shared your challenges & triumphs with us. You have helped many of us in ourairlity to empathize with others and definitely, broadened the boundaries of our ability to be affectionate (:-)) + compassionate.

I appreciate your hugs and humors, smiles and laughter. On any hard days, when all I needed was to know someone cared, you let me sit by you for a while and then made sure it got up, headed home, handing a cup of hot tea to stay awake for the ride. These small acts of thoughtfulness helped more than you know.

Another quality which I get to see later in our friendship is the depth with which you read and write. I after wished I could speak Korean so I could read your blog or understand fully the mature content of the writers you were reading. I know God has gifted you with a sharp mind and has a plan and purpose for you and the talents He has given you.

I am praying that the coming year brings with it a deeper understanding of yourself, God, the world He created, and your place in it.

“May the Lord bless you and keep you; the Lord make his face shine upon you and be gracious to you; the Lord turn his face toward you and give you peace.” (Numbers 6:24-26)

Sending many hugs and prayers,

San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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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모든 여행의 궁극적인 목적지는 행복이다

춤추라,
아무도 바라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노래하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살라,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꾸뻬씨의 행복 여행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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