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긴 글: Happy B-day cards from SPECIAL friends (Iv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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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긴 글: Happy B-day cards from SPECIAL friends (D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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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긴 글: Happy B-day cards from SPECIAL friends (Bern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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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알아주는 단 한 사람

오늘은 문득 헤이즐넛 커피를 한 잔 마시며

닫혀 있던 가슴을 열고 감춰 온 말을 하고 싶은 사람이

꼭 한 사람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외로웠던 기억을 말하면 내가 곁에 있을게 하는 사람

이별을 말하면 이슬 고인 눈으로 보아 주는 사람

희망을 말하면 꿈에 젖어 행복해하는 사람

험한 세상에 굽이마다 지쳐 가는 삶이지만

때로 차 한 잔의 여유 속에 서러움을 나누어 마실 수 있는

마음을 알아주는 단 한 사람

굳이 인연의 줄을 당겨 묶지 않아도

관계의 틀을 짜 넣지 않아도

찻잔이 식어 갈 무렵 따스한 인생을 말해 줄 수 있는 사람

오늘은 문득 헤이즐넛 커피향이 나는

그런 사람이 그리워 집니다.

-배은미, ‘마음을 알아주는 단 한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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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t… I Have This Little Box

I Have This Little B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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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ittle Box

by Vasko Po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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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tters from friends – when I take a leave for Korea

Rakesh’s card

Hey Bro,

I feel sad that you will be gone for the next few months from 519. 😦

But, the fact that this is a good way for you to recover and come back here makes me feel comforted. Bro, just take care of yourself, do what you like the most, take good rest and of course enjoy your dates :-). I understand that it will be hard for you to pray, so I will be praying for you everyday. “He is the Way, Truth and Life.” So bro, I pray that He will show you the way to find the truth that you are seeking and eventually that can give a new life in you. Take care Bro! I Love You.

-라게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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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번째 편지: 전개 2 – 예수는 부활했다 (1/4)

전개 둘, 예수는 부활했다.

자, 이제 기적이 인간사에서 배제될 수 없음을 보였어. 기적이란 초자연적인 원인에 의해 야기된 사건이며, 바로 신의 행동이 원인이 되는 사건이야. 과학의 진보가 기적을 더 못 믿게 만들었다는 것은 착각에 불과해. 신의 존재와 같이 기적의 존재 역시 과학이 증명하거나 반증할 수 있는 무엇이 절대 아니야. 그렇다면 기적이 정말 일어났는지 여부는 무엇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 이것은 역사의 개연성을 따져볼 수 밖에 없어. 역사가 남긴 갖가지 기록으로 미루어 판단하는 것이지. 즉, A라는 사건이 C라는 사건으로 전개되었을 때 전개의 원인이 될 수 있는 수많은 중간 사건 가운데 하나인 B가 가장 개연성이 높다면, 학자들은 A→B→C 로 역사를 정리할 수 있겠지. 우리가 하나 염두에 둘 것은 B가 기적일 수도 있다는 것이야. 기적을 배제하지 않고 역사적 탐구를 해보자는 것이지.

난 이번 편지부터 비로소 기독교의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해. 기독교의 하나님이 바로 지금까지 우리가 논의해 온 신, 그 자존적이고 초자연적인 존재라는 것을 논증하려고 해. 이 논증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이뤄질 수 있어.

첫째는, 기독교에서 과연 참진리를 이야기하고 있는지를 따져보는거야. 기독교의 하나님이 진정 선한 신이라면 기독교의 교리는 참된 것이어야만 해. 인간의 부덕함과 한계로 인하여 조금 굽어지고 잘못 이해되었을지라도 그 중심은 빛을 발하는 진리이어야 할거야. 참진리. 우리 이성이 맞닥뜨렸을 때, 마치 지금까지의 모든 것을 설명해주는 듯한 이야기이어야 할거야. 우리를 꼭 안아주는 따뜻하고도 공정한 법칙이어야 할거야. 마치 오랜 갈증을 해소해 주는 샘물 같은 것일거야. 그 빛을 기독교 교리가 발산해야만 해. 그렇지 않다면, 기독교의 하나님은 우리가 찾는 신이 아닐 거야. 예수가 한 이야기들을 따져 보자구. 그가 헛소리를 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

둘째는 신과 인간이 어우러진 역사를 탐구해보고, 과연 그 역사가 우리가 찾는 신을 가리키는 지를 따져보는거야. 역사적 탐구를 하는 거지. 마침 기독교는 하나님이 인간 앞에 여러번 나타나 기적을 베풀었을 뿐 아니라 본인 스스로 사람으로 태어나 우리와 함께 30여년 넘게 살았다고 주장하므로 그 주장의 진위를 역사적으로 파악해보기 용이해. 그러나 한계가 있어. 지나버린 과거를 다시 눈으로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진위 여부를 확증하기가 어려워. 역사적 사실에 대한 해석에 따라 참이 될 수도 있고, 거짓이 될 수도 있는 것이지. 설령 결론이 ‘참’으로 도출된다 하더라도 우리가 아는 것은 ‘참에 제일 가까워 보인다’ 수준에 불과해. 그래서 어쩌면 믿음의 영역이라고 공격받을 수도 있지만, 범죄수사를 비롯한 사실 여부 판단은 모두 이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해. 범죄수사의 경우 제한된 사실을 가지고 이성을 최대한 활용하여 피고의 유죄 여부를 가려내잖아? 그러므로 최대한 이성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부분까지 논의해보자. 신이 우리에게 부여한 이성의 능력을 최대한 활용해 보자구.

먼저 두 번째 방법을 살펴보자. 첫 번째 방법이 더 엄밀한 방법 같아보이는 데도 생각보다는 그리 좋은 방법이 아니야. 왜냐하면 우리는 아직 참과 거짓을 가리는 도덕적 기원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지 모르기 때문이야. 어떤 것이 진정한 도덕인지 우리는 아직 모르지. 더군다나 진리는 날카로운 칼날과 같이 명확하고도 분명한 실재이거늘 우리는 추상적으로 대하는 경향이 있어. 그런 습관에 강하게 물든 탓에 ‘옳음과 그름’을 따져야 하는 종교적 진리 앞에서 우리는 ‘좋고 싫음’과 ‘같음과 다름’을 따지는 경향이 있어. 진리에 ‘순복’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호불호를 앞세워 ‘선택’한다구. 허접한 종교라면 이 첫 번째 논증으로 진위 여부가 갈리겠지만 고등 종교 사이에서는 어림도 없어. 요컨대 어느 도덕이 우월하다는 주장은 아직 논증도 불가능할 뿐더러 상대에게 오만하다는 인상을 주는 부작용까지 야기하지.

두 번째 방법은 이런 면에서 첫 번째 방법보다 나아. 용의자를 찾아서 범인인지 아닌지만 가려내면 되는 작업이거든. 과연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기적들이 진짜인지 아닌지 따져보자. 기독교는 기적이 없었음이 밝혀지는 순간 진짜 무너져내리니깐.

기독교의 핵심 역사는 바로 예수야. 그의 삶으로 말미암아 기독교는 탄생했고, 그의 부활에 기독교는 뿌리를 두고 있지. 그렇다면 우리는 그의 삶의 역사성에 대해 물음을 던져보기로 하자. 예수는 과연 실존한 인물인지, 그를 가리키는 역사적 자료는 고고학적으로 충분한지, 그 자료들은 신뢰할 만한지, 역사적 예수는 과연 기독교가 말하는 그 예수인지 등부터 따져보기로 하자.

참, 난 이 편지에서 학자들이 다룬 방대한 ‘역사적 예수’를 그려내지는 않을거야. 그럴 능력도 없구. 그러나 신학자들이 그려내는 핵심적인 부분을 요약하고 참고 문헌을 표기함으로서 더 깊은 토론을 위한 예비적 작업을 할거야. 따라서 부족한 부분이 많더라도 양해해 주길 바래.

1. 예수는 실존인물인가?

역사학자들은 예수는 기원전 2~7년 사이에 출생하여 기원후 26~36년 사이에 사망했다고 추정해(1). 예수의 자세한 삶의 면모는 대부분 복음서에서 알게 된 것이야. 예수의 집안과 그의 출생, 생애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세한 면모들이 신약성서, 그것도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서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어. 마태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는 유대인인 아버지 요셉과 어머니 마리아 슬하에서 태어나되, 성령으로 잉태되었다고 적혀 있어. 유다 지방 베들레헴의 어느 마구간에서 태어난 뒤, 나사렛이란 동네로 이사했지. 그런데 열두 살이 되었을 때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학자들과 대화를 나누며 영특함을 보였다는 것 외에는 딱히 예수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은 없어. 누가가 마리아 혹은 주변사람들을 인터뷰하여 적은 듯한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는 것이 예수의 어린 시절 묘사의 전부지. 그렇게 성장했던 예수는 나이 서른 즈음이 되어서야 기록의 전면에 등장해. 복음서에서는 이때부터의 예수의 삶에 대부분의 지면을 할애해. 남녀평등, 아이존중, 겸손의 미덕 등 당시 지나치리만치 혁신적이었던 그의 가르침을 비롯하여,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다 정치범으로 체포되어 십자가형으로 죽은 뒤 부활해서 승천한 이야기까지 적었지.

예수에 대한 다른 기록들은 어떨까? 비기독교적인 걸루 말이야. 성경만큼 자세하고 풍부한 기록이 있지는 않지만, 예수에 대한 역사적 기록 역시 적지 않아. 대표적인 것이 역사가 타키투스가 110년 경에 쓴 «연대기»라는 책이 있는데, 15권 44장 2절에서 그리스도의 처형에 관해 이렇게 적혀 있어.

64년 7월 19일 네로 황제가 로마 시내에 화재가 나자 ‘그리스도인’들을 방화범으로 지목하고 박해하였다. ‘그리스도인'(라틴어: Chrestiani)이란 명칭은 티베리우스 황제의 치세 때 폰티우스 필라투스(본디오 빌라도) 행정관에 의해 처형된 그리스도에게서 비롯되었으며, ‘이 사악한 미신’은 계속 번져나가고 있다

또한 1세기에 살았던 요세푸스(Flavius Josephus)라는 유대인 역사가는 93년경 완성한 그의 야심작 «고대사(The Antiquities)»에서 예수는 그리스도라 불렸다고,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이들이 고소를 당했음을 적었어.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산헤드린 공회를 소집한 후에 당시 그리스도라고 불린 예수의 형제인 야고보와 어떤 사람들을 그들 앞에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율법을 어겼다고 고소를 하고 돌로 쳐죽이도록 그들을 넘겨주었습니다(2).

그는 예수의 일생에 관한 훨씬 자세한 책 «플라비우스의 증언»이란 책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지. 참고로, 이 글은 세 부분이 후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가필되었다고 학자들은 생각해. ‘만약 그를 사람이라고 불러야만 한다면’, ‘그는 그리스도였다’, ‘죽은 지 사흘 째 되는 날에 부활해서 나타났다’ 라는 부분이지. 기독교에 적대적인 요세푸스가 그렇게 적었을 리 없거든.

이 무렵에 예수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만약 그를 사람이라고 불러야만 한다면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놀랄 만한 기적을 행했고 진리를 기꺼이 받아들인 사람들의 선생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많은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 그는 그리스도였다. 빌라도가 우리 중에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를 고소하는 말을 듣고 난 후 즉시 십자가에 처형하라는 선고를 내렸을 때 처음부터 그를 사랑한 사람들은 끝까지 애정을 버리지 않았다. 죽은 지 사흘째 되는 날에 부활해서 나타났는데, 이는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이미 이러한 무수히 많은 놀랄 만한 일들을 예언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이름을 따라 소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무리들은 오늘날까지 사라지지 않고 있다(3).

이외에도 «탈무드»의 ‹산헤드린›에는 이런 기록이 남아있어. 탈무드는 A. D. 500년 경 완성된 유대인의 저작으로 유대교의 구전 율법인 미슈나(Mishna)를 포함하는 책이야.

예수는 마술을 써서 이스라엘을 미혹시켜 배교하게 하였으므로 유월절 전날에 처형되었다(1).

이외에도 터키 북서방 지역을 다스리던 로마 총독 플리니(Pliny the Younger)는 그가 친구인 트라얀 황제와 주고 받은 편지에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자세한 언급을 하고 있지.

본디 종교적 운동이 널리 퍼지기 전까지는 종교 창시자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아. 특히나 로마제국과 지도급 유대인들에게 박해와 무시를 받은 기독교의 경우엔 기록이 충분하기 더욱 어렵지. 더군다나 예수의 운동은 역사가들의 관심을 끌만큼 정치적이지도 않았어. 그러나 그런 경향에도 불구하고 예수에 대한 기록은 무척 많은 편이야.

성경을 비롯한 기독교적 기록을 완전히 빼고 예수를 역사적으로 구성해볼까? 예수의 추종자들이 편견을 갖고 적었거나 심지어 왜곡시켰을 수도 있는 기록들은 모두 제외하고 말이야. 고대역사학자인 에드윈 야마우치 교수는 비기독교적인 역사기록에만 의거해서 예수란 인물에 대해 다음을 확증지을 수 있다고 주장해(4).

  1. 예수는 유대인 선생이었다.
  2. 당시의 많은 사람들은 그가 치유를 행하고 귀신을 쫓아내는 일을 했다고 믿었다.
  3. 어떤 사람들은 그가 메시아라고 믿었다.
  4. 그는 유대인 지도자들에 의해 배척을 받았다.
  5. 디베랴 지방에서 본디오 빌라도의 통치하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을 당했다.
  6. 이 수치스러운 죽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여전히 살아 있다고 믿은 추종자들은 팔레스타인 지방을 넘어 빠른 속도로 확산되어 A. D. 64년경엔 로마에서도 많은 군중들이 그의 제자가 되었다.
  7. 도시와 시골의 모든 부류의 사람들, 남자와 여자, 노예와 자유인들 모두가 그를 하나님으로 경배했다.

수많은 역사적 기록들과 전승들이 웅변해주듯 예수라는 인물의 역사적 존재 여부에 대해서는 역사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없어. 다만, 그에 대한 기록들이 왜곡되었다던지 의도적으로 수정되었다던지에 대한 이견들이 있을 뿐이야. 그렇다면 예수에 대한 기록들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 것인지 하나하나 따져보도록 하자. 예수를 직접 보고 그를 경험한 목격자들의 증언, 즉 성경의 신뢰성부터 살펴보자.

(1) 위키피디아 http://ko.wikipedia.org/wiki/예수

(2) 예수는 역사다, 리 스트로벨 지음, 100쪽

(3) 예수는 역사다, 리 스트로벨 지음, 101쪽

(4) 예수는 역사다, 리 스트로벨 지음, 1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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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번째 편지: 전개 1 – 기적은 일어난다

전개 하나, 기적은 일어난다.

지난 번 편지에서 우리의 성품을 거슬러 따라 올라갈 때 만나는 선한 신에 대한 이야기를 했어. 우리로 하여금 누미노제의 경외감과 선악의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신. 두렵고, 정의로운 신 말이야. 그 신은 아름답고, 기쁘고, 좋은 분일 거라는 이야기도 했어. 왜냐하면 우리가 그런 신을 바라기 때문이야. 우리 인간의 성품 스스로가 나침반이 되어 우리가 기대하는 무엇을 가리키고 있지. 만일 우리가 적자생존의 진화를 거쳐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존재들이라면, 슬프다던지, 아름다운 것과 정의로운 것을 추구한다던지 하는 도통 생존에 도움되지 않는 감정과 성품들을 잔뜩 갖고 태어났을 이유가 없어. 게다가 대부분의 시간 동안 그런 성품이 갈구하는 행복한 열매들을 움켜쥐지 못하는 결핍된 인생으로 점철되었을리도 없고 말이야.

난 그 선한 신이 자연에 일으키는 불협화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 기적 말이야. 어딘가 모르게 우리 삶을 더 생동감있게, 그러나 두렵게도 만드는 기적. 기적이 가능하다는 것은 곧 초자연을 배제하지 않는 역사적 탐구가 가능하다는 말이야. 이것은 기독교에서는 필수적인 전제야. 기독교가 성장한 역사 뒤에는 수많은 기적들이 뒤섞여 있거든. 아니, 기독교는 기적의 종교야. 기적이 불가능하다고 미리 단정해버리면, 예수의 부활을 증거한 신약성경은 모두 거짓말이 되어버리지.

이 편지에서 신이 왜 기적을 일으키는가에 대한 물음에는 답을 하지 않을거야. (ㄱ) 다만 기적이 자연현상과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 다시 말해, 귀납적으로 증명된 자연법칙이 틀렸다는 것을 보여주는 반례가 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기적이 또한 신의 본질이나 성품을 위배하는 무엇이 아니라는 것에 대한 논증을 하고 싶어.

자, 난 지금까지의 편지글에서 자연이 이성이라는 영역을 통해 초자연적인 무엇으로부터 침범당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어. 그래서 우리 인간이 갖는 두뇌는 두뇌 이상의 무엇이 될 수 있다고 했지. 그런데 말야. 초자연적인 존재, 즉 신이 굳이 이성을 통하지 않고 자연을 직접 건드릴 수는 없을까? 신이 자연의 특정한 시공간을 살짝 꼬집어 비틀 수는 없는 것일까? 그 경우, 자연은 움츠려진 용수철마냥 다시 튀어늘어나며 그 변화에 적응하며 자연스럽게 회복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신은 잔잔한 호수의 수면 위로 조약돌을 던질 수는 없는 것일까? 한번 우리가 호수에 던진 조약돌을 상상해보자. 호수의 바깥에서 날아온 그 조약돌의 운동량과 부력에 의해 호수는 물결을 일으키며 파르르 떨지만, 이내 잠잠해지지. 만일 조약돌을 만들어 내어 호수 위에 던진 것이 신이라고 생각해보자. 그렇다면 호수를 지배하는 자연법칙은 신의 간섭에 놀랍도록 금세 적응하여 원인에 따른 결과를 만들어내지. 만일 시간이 정지했다고 치자. 그래서 파르르 떨고 있는 물결이 잠시 멈추었다고 상상해보자구. 자연법칙이 깨졌을까? 아니, 그렇지 않아. 자연법칙 역시 시간의 멈춤과 함께 작용이 멈추었을 뿐이야. 엔트로피의 불가역적 방향으로 흐르는 시간. 시간이 멈추고, 물체의 움직임도 멈추고 자연법칙도 멈추었어. 다시 시간이 흐르자 물결이 출렁이고 자연법칙도 작용해. 물결 모양도 자연스럽고 자연법칙에 어긋난 건 아무것도 없게 되었어. 시간이 정지하는 동안은 자연법칙도 정지하고, 시간이 흐르며 자연법칙도 다시 작용하지. 시공간의 얼어버림에 자연 역시 얼어버리며, 족쇄가 풀리는 즉시 자연은 놀랍게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우주에서 운석이 날아와 지구에 떨어졌어. 지금은 누구도 이것을 기적이라 하지 않아. 신의 강림 따위로 생각하지 않는다구. 외부에서 날아온 운석의 간섭에 지구는 놀랍도록 자연스럽게 적응해. 운석이 주는 충격을 운동량의 법칙에 따라 땅이 흡수하지. 자연법칙은 바뀐 게 없어. 지구계 내에서 에너지-질량 보존의 법칙에 어긋났다구? 아니야, 우주 전체로 보면 질량보존의 법칙은 성립했어. 그렇다면 여기서 초자연주의를 기억해보자. 이미 우리는 자연이 실재의 전부라고 믿는 자연주의의 난점을 파헤쳤잖아. 그래서 자연 외의 또다른 자연, 아니 초자연마저 존재할 수 있다는 풍성한 초자연주의 철학을 견지하기로 했잖아. 그렇기 때문에 초자연적인 무엇이 우리의 시공간과 접해서 정자 하나를 어느 이스라엘 여인의 자궁 속에 하나 삽입한 것이 어찌 자연법칙을 어기는 일일까? 자연은 그 정자를 받아들여서 예수라 이름 지어진 아기를 우리 인류에게 선사해 주었지. 자연은 그 스스로의 규칙에 어긋나지 않도록 수정란을 가꾸고, 태를 열어 한 아기의 출산까지 인도해 주었지. 기적은 이렇게 가능할 수 있어.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이란 반복적인 자연법칙에 반하는 것이 아니냐구? 기적의 정의를 다시 한번 살펴보자. 기적은 특성상 하나의 예외적 사건이야. 우리가 기적을 말할 때는, 다시 반복될 수 있는 무엇을 말하는 게 아니라구. 다시 반복될 수 없는 일시적인 일이기 때문에 기적이라고 부르는 것이야. 자연 법칙에 대한 예외적 사건이 아니라면 우리가 어떻게 기적을 놀라운 사건이라고 부를 수 있겠어? 자연법칙은 반복적인 경험으로 증명된 모델이야. 반복적인 경험이 갖춰져야지만 과학은 성립한다구. 만일 모든 조건이 똑같은데 반복적으로 이루어지기만 했던 경험 외의 무엇이 일어났다면, 그 과학은 깨지게 되지. 이것이 과학의 취약점이야. 수천년간 똑같이 수행되어 왔던 것이 당장 내일 단 한번이라도 똑같이 수행되지 않는다면, 그 법칙은 무로 돌아가게 되지. 그런데 기적은 그 과학을 굳이 깨지도 않아. 아예 초자연적인 무엇에서 개입하기 때문에, 같은 조건의 경험이 아니게 되지. 단지, 이전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경험일 뿐. 예외적인 것. 그리고 흔하지 않은 것. 그래서 신기한 것. 그것이 기적이야.

요컨대 기적은 역시 신의 존재와 같은 초자연적 현상이야. 자연법칙을 깨뜨리거나 하는 것이 아닌 자연법칙 이외의 영역이야. 우리 과학자들이 수차례 같은 조건에서 실험과 이성적 추론을 통해 만든 것이 자연법칙이라면, 기적은 다른 조건에서 만들어진 실험결과라 할 수 있지. 초자연이 끼어드는 바람에 전혀 다른 실험 조건이 되어버렸다구. 기적은 자연법칙과 양립 가능해. 신이 존재한다면, 자연은 결코 기적에서 안전한 곳이 될 수 없어.

그렇다면 신은 왜 굳이 자연에 기적을 일으키려 하는걸까? 대위법으로 완성된 아름다운 화음같은 자연에 왜 굳이 불협화음을 일으키려 하는지… 글쎄, 신은 대위법 그 이상의 자연을 원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창의와 조화가 잘 버무려진, 완성될 때까지 끊임없는 진화와 발전을 거듭하는 그런 자연 말이야. 우리에게 불협화음을 허락했듯이 신 또한 그를 사용해서 다양한 색채를 자연에 입히고 있는 거라고 말이야. 그의 천부적인 재능으로 불협화음을 일반화음 사이사이에 섞어넣는 거라고 말이야. 시구에 변칙적인 운율을 섞어넣듯이 말이야.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신이 자기 마음대로 자연에 간섭한다는 뜻은 아니야. 절대선인 그는 태초에 계획해 놓은 악보대로 자신이 원하는 그 목적에 맞추어 최고의 음악을 연주하는 중일거야. 철저히 계획해 놓은 그대로 말이지. 역사의 중요한 시점에 다양한 기법으로 자신의 창조를 아름답게 이루어 가면서 말이야.

ㄱ. 이 대목이 궁금하다면, Lewis의 ‘기적’이라는 책의 12장 이후를 읽어봐. 인간의 복합체적 성질, 하강과 재상승 유형, 선택, 대리 등의 모델을 사용해 신이 기적을 활용하는 저자 나름의 이유를 적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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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인의 정치 참여에 대한 단상

이 글은 백지연의 끝장토론을 보고 나면 더 생각이 명료해질 것 같다. 글이 잘 써질 것 같다.

따라서 골격, 개요만 생각해 놓고, 나머지 살붙이기는 나중에 해야겠다.

종교인의 사회참여의 경우, 분명히 사회참여에 대한 논의가 완벽히 구성되었을 때 가능하다.

우리는 철학으로 산다. 특히 삶의 어려운 문제들에 대해서는 그렇다.

우리가 왜 사는지, 무엇을 위해 사는지는 바로 철학의 문제이고, 여기에 새로운 세계관을 안겨다주는 것이 바로 종교다. 나와 세계, 나와 타인의 관계를 바로잡아 주려고 노력한다.

각각의 철학적 관점을 발전시키면, 현대의 사회에서 현상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더불어 구체적인 정책, 행동강령, 윤리에까지 종교는 발전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들이 믿는 종교의 세계관을 제대로 이해하고, 그 올바르게 잡힌 토대 위에 이성적 추론과 현상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곁들여질 때 잘 수행될 수 있다.

허나 인간이 하는 일이 완벽할 수는 없는 법. 실패와 실수의 가능성을 서로 폭넓게 이해하되, 오류들이 잘 발견될 수 있도록 구체적인 이론을 문서화할 뿐더러 이론체계에 맞게 잘 정립되어야 할 것이다. 근거로 든 사례들이나 배경들도 정확히 정리되어야 하겠다.

앞에서 예를 들었듯이 진리와 거짓을 다투게 하는 것이 좋다. 종교적인 것도 잘 정리해서 윤리강령이나 정책으로까지 만들어라. 그리고 행정가들과 다퉈라. 이성적인 토론에서 진리가 거짓에게 패배하는 법은 없다. 진리를 담은 좋은 정책안이 나올 것이다.

따라서, 이런 걸 못할 종교집단은 후미로 빠져라. 현대사회에서 합의를 이끌어내는 기술을 갖지 못한 집단은 토론석상에 앉을 자격이 없다. 신께서 충분히 능력이 되는 자를 준비해 주실 것이니, 믿음이 약한 종교단체들이여 겸손히 뒤로 물러나 있기를. 목에 핏대 세우고, 동어반복과 다름없는 구호만 외치지 말지어다. 절대적 타자성을 지닌 타인들에게 설득력이 있을 리 없다.

예를 들어볼까? 4대강 이야기 말이야. 오오, 백지영 씨 토론을 보고 나면 더 명확해 지겠군.

“불교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기독교, 카톨릭은 이렇습니다. 등등”

“현상 합의”

성령께서 뭐라 하시니…. 이거 다 성경에 있는 내용 성령께서 반복하신거다. 얼마든지 이성을 잘 활용하면, 성령의 음성도 해석이 가능하다. 이성적으로 말이지.

워낙 급하면 일단 순종하고 보던지… 각 교회에서 결정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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